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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B1 일층, 지하 일층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어떤 글은 그리움으로 시작하고 어떤 글은 경멸로 시작한다. 때로는 추억으로 물들며 가끔은 다짜고짜 비판으로 운을 떼기도 한다. 어떤 것은 무난(함을 가장한 뻔함)하고 어떤 것은 파격적이다.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도 정하지 못하고 하얀 화면만 보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런 시작은 어떨까. 자신의 게으름을 적당하게 변명할 수 있으면서도 솔직함과 연민에 조금은 더 점수를 얻는 리뷰가 되지 않을까. 아니다, 나는 이 리뷰만큼은, 쿨하게 쓰고 싶었다. 쿨하게, 그래 대체로 이렇게?
김중혁을 좋아한다, 고 말하자. 김중혁의 단편소설들을 좋아한다, 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글 중, 맨 처음 접한『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었을 때 기분 좋은 흥분이 느껴졌다. 매우 흥미롭거나, 기막히게 잘 쓴(머리가 어질할만큼) 글을 앞에 둘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전 된 기타를 만지는 듯한 전율. 단행본 속 그의 글들은 모두 재밌었고 대체로 특이했고 그럼에도 -뜨근하기보단- 따뜻하고 온순해보였다. 단행본의 모든 단편들이 모두 내 맘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마냥, 하나도 빠짐없이 마음에 들었다. 평범하진 않지만 거슬리게 비범하지 않은 감각이. 허구인 걸 알아도 속을 것 같은 능청스러운 설정이. 무심하게 던지는 유머감각이. 기분좋은 고양이처럼 입술을 핥으며 웃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매뉴얼 제너레이션」과 「엇박자 D」인데 얼마 전, 신기하게도 고등학교 동창이 지금 매뉴얼 만드는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다시 떠올랐다. 그래, 매뉴얼이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만큼 기계에 필요한 매뉴얼을 만드는 사람이 있지, 그걸 알려준 건 김중혁이었지, 라고.
이렇게 시작할까. 뻔하디 뻔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거짓말로 의심되는 '매뉴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동창'조차 사실이니까, 의외로 논리적인 글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아냐, 논리적인 건 자신이 없다. 나에겐 그런 지력이 없으니까. 그러면 감상적으로 가자(감성, 이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스승으로 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연인이었으면 하는 이를 발견하고, 가끔은 가족이 되주길 원하는 이들도 만난다. 김중혁은, 김중혁의 인물들은, 김중혁의 글들은, 친구였으면 좋겠다. 쓸모없는 것들만 만드는 발명가와 상상력의 틀을 깨는 해커와 그것도 재주다 싶게 엇박자로 노래를 부르는 D와 같은 인물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벌이고 싶다.
라고 운을 떼볼까.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시작을 하고 싶었다.
이맘 때 가을 하늘은 아득하게 예뻐서, 정말 예쁘다는 말 외엔 할 수 없게 예뻐서 목을 빼고 길을 걷는다. 가로수에 부딪히기 직전까지, 목이 아슬아슬 아플때까지 오래오래 보며 걷는다. 그러다 눈을 거두면 어쩐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계획으로 하는 삶은 허무주의자가 될 수 있고, 희망으로 하는 삶은 절망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 밤은 반드시 두려움의 시간은 아니기에 반드시 두려움이 길어지지 않을거라고 믿는 것. 두콩이(자전거의 이름)를 깨끗이 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그래, 이 시작이 좋겠다. 자, 이제 걸어보자.
백일장에는 몇몇 제재와 산문과 시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나는 늘 산문이었다. 시를 택하는 아이들 중 많은 수가 좀 더 짧다는 이유로, 그저 그 자리를 어서 벗어나기 위한 꼼수로 택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시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시(詩)라는 말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짧은 말 안에 내 뜻을 담는 법을 몰랐다. 나노처럼 집적된 작고도 명징한 세계, 로 보이는 시의 견고함을 나는 결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보통의 친구들보다 늘 많은 페이지를 썼고 아이들은 내가 재능이 있거나 글에 능숙한 사람인 줄 알고 감탄했다. 부끄러웠다. 대학생이 된 후도 페이퍼의 페이지를 채우지 못해 절절매는 아이들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더 부끄러웠다. 그저 나는 짧게 쓰는 법을 몰랐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해석될 것 같고, 저렇게 쓰면 이렇게 보여질 것이 두려웠다. 더 많은 것을 더 오래 더 자세히 말하고 싶었을 뿐, 재능이나 능숙함과는 일절의 관계가 없었다. 부끄럽고 슬펐다.
시를 쓸 수 없었다. 소설 또한 요원했다. 하지만 가끔 단편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걸 떠올린다. 소설을 쓴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기억해낸다.
나는 곧잘 김중혁 작가를 '백수 삼촌' 같다고 생각해왔다. 아니면 오타쿠 삼촌, 까치머리 삼촌, 나랑 제일 친한 삼촌. 어쨌든 삼촌, 아저씨라기엔 그는 너무 가깝고 오빠보다는 좀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실상은 할 줄 아는 게 많은데도, 같이 있으면 무용한 이야기만 하고 내내 낄낄거리는데 그 시간이 누구보다 좋은, 그런 삼촌. 이 삼촌은 비트에도 뛰어나고 레고도 잘 만들고 게임도 썩 잘 만든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다른 어른들처럼 꿀밤을 먹이긴커녕 나보다 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그래서 가끔은 내가 덜 한심한 것 같다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엄마가 없을 때 해주는 밥은 때론 엄마보다 맛있고, 각종 매뉴얼을 신문처럼 읽고 모으며, 화음같기도 하고 소음같기도 한 악기들의 소리를 모은 테이프를 가지고 있고, 낙서를 잘(자주, 와 잘, 모두)하고 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멋지다고 생각하는 삼촌.
객관적으로 이 삼촌은 꽤 멋지고 대단하다. 다양한 이력과 현재진행형의 경력. 그것 모두를 한 시대에 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실은 어마어마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도 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의 글을 마주하면 그냥 뭐 이만하면 됐지 싶은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그리 나쁘지 않은, 썩 괜찮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내가 얼마나 평범하고 진부하고 자주 찌질한지를 느끼게 하는데. 그런데도,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고, 그래 뭐 뭐라도 되겠지, 뭐라도 안 되면 또 어때, 라고. 그건 그의 글이 가진, 공기가 호흡이 마음이 태도가, 바로 '이런 삼촌' 같은 데에 있다고 믿는다.
그의 매력은 특히, 단편에서 더 빛을 발한다. '대단해'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파는 아니다. 그보단 '귀여워!'와 '느물느물 능글능글 현실그리기'라고 정의 내려볼까. 그의 글은 무심하고 영민하다. 예민하면서도 즐겁다. 따뜻한데 그 따뜻함을 쑥스러워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사람이 활동하기에 최적의 온도는 영상 18~20도인데 김중혁의 글은 딱 19도,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역시, 신형철 씨는 최고.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랑게.
세 번째 소설집인 이번 소설도 비슷하다. 천연덕스럽고 온유하고 일견 무심하다. 그리고 약간 더 그로테스크하다. 자살하는 유리라니, 멜랑콜리하구나. 때묻은 연애 이야기가 갑자기 괴수의 전설로 변하는 건 어떻고? 스케이트 보드의 이야기는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가 떠오르게 한다. 아, 이 매력적인 글. 하물며 매력적인 작가. 그 중에서도 「크랴샤」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안다. 소멸된 것들은 되살아날 수 없다. 그리고 찢어진 것들은 절대 다시 붙지 않는다. 나는 삶과 마술을 때때로 바꾸고 싶어진다. 화장지가 붙는 대신 어머니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스카프가 비둘기로 변하는 대신 돈으로 변하는 장면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나도 가끔 환각을 본다. 쉰이 넘은 다음 급격히 나빠진 시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있었다가 없어진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어머니가 문득 나타날 때도 있다. 말을 걸 뻔한 적도 있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말이 목에 걸렸다가 다시 들어간다. 운전하다가 문득 강을 쳐다보는데 사라진 다리가 눈에 나타나기도 한다. 운조빌딩을 지나갈 때도 그랬다. 그 자리에는 이미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섰는데, 내게는 가끔 운조빌딩이 보인다. 바깥으로 툭 튀어나온 책상 같던 운조빌딩이 나타난다. 고개를 젓고 눈을 깜빡여본다. 환각은 금방 사라진다. 동그란 가로등 불빛이 수십 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눈이 침침하다. 도시는 절대 낡지 않는다. 나만 낡아갈 뿐이다. - 김중혁, 크랴샤
가장 낮은 곳, 혹은 진실에 접근하는 곳은 명징하게 대하기 어려운 것처럼 제일 좋아하는 것에 이유를 대기란 쉽지 않다. 「크랴샤」의 쓸쓸한 전조가, 마술과 현실을 상응시키는 대구가, 마술처럼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어조가, 소멸된 것들을 되살아날 수 없다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진심이, 좋았던 것 중의 하나라고만 말해야겠다. 짧고도 명확하고, 그런데도 정서와 유머와 진심이 모두 담긴, 이 글이 무척이나 좋다.
단편소설을 쓰고 싶었다. 레이먼드 카버나 피츠제럴드, 김애란 덕분에. 적은 양이라면 비교적 도전하기 쉽지 않을까 싶은 치졸한 비겁함 때문에. 소재의 문제, 라고 결론 짓거나 얼마간은 호흡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은 그럭저럭한 이유였지만 결정적이진 않았다. 결정적인건, 소거의 문제였다. 단편소설을 쓸 때는 어떤 문장을 제하고 어떤 논리를 빼고 얼마나 짧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쓸까(소재,와 호흡, 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고민할 것이다(물론 장편이라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단편소설은 물리적 제약이 있으니 더 크리라 짐작한다). 그렇다면 남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고, 핵심 또한 남기는 쪽이 아니라 버리는 쪽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기는 것보다 버리는 것에 더 인색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글은 길고 흐물거리는 변명이 되지 않았을까. 시(詩)에 대한 외경심의 근원 또한 그것이었겠지. 김중혁의 소설을 읽을 때는 -잊을 줄 알았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잃을 줄 알았던- 단편소설에 대한 가파른 열망이 함께 펄럭거린다.
길게 하고 싶었다. 문장도 호흡도 단어도. 그래야 조금 더 설명, 아니지 방어, 냉정하게 변명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는 깎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소멸된 것들은 살아날 수 없고, 깎아내린 것은 붙을 수 없는 이 도시생활에서. 더이상 소멸되고 깎아낼 것이 없어질 때까지.
덧) 멋진 글을 쓰고 싶다고 아주 가끔씩 큰 맘을 먹는다. 하지만 그 결심은 대개 평소(평소가 어느만큼이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보다도 훨씬 이상한 글이 되버리고 만다. 필연적인 것처럼. 이 리뷰는 위와 같은 생각으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그대로 옮겨본다. 정해진 건 제목 뿐. 처음부터 <판타스틱 c1+y 라이프>였다. '나는 이 속된 도시가 좋다. 여기에서 살아갈 것이다' 라는 작가의 말이 이 책의, 그리고 그의 모든 글의 핵심이자 소재라고 생각했기에. 그 덕분에 도시도 재밌는 곳, 이라고 생각하게 됐기에. 그런데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작을 했습니다, 라며 쓰다보니 영 제목과 동떨어져 눈물을 머금고 바꿨다.
하하. 리뷰도 못 쓰는 사람이 무슨 단편소설일까.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글은 절대 쇠퇴하지 않는다. 나만 겁을 먹고 있을 뿐이다(또는 형편없어질 뿐이다, 한심해질 뿐이다 등등으로 변용이 가능하다). 하긴 긴 사족으로 변명하는 것에 일단 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