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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자서전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지수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11월
평점 :
~라면 해야 할, 반드시 필독해야 하는, 한 번은 봐야 할 등등의 표현을 싫어한다. 강요를 하면 더 하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성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가끔 영화나 책을 읽으며 특정 타깃층을 겨냥해 쓸 때가 있다. 이런 식이다. 영화학도라면 혹은 시네필이라면 아마도 좋아할 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영화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물론 만족스러울 것 같지만 특히 영상연출을 다루는 사람들에겐 -좀 더 강하게 이야기해- 일독을 권하고 싶다. ‘영화자서전’이라는 표현이 돋보이는데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개인사 등은 배제하고 자신이 만든 영화(와 영상)의 이야기만을 다룬 게 인상적이다. 아마도 원고는 과거의 기록을 토대로 기억을 기반하여 현재에 썼을텐데도 정말 1995년이나 2005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드는 것이다. 때문에 더 진심으로 담은, 귀한 느낌이 들고 무엇보다 영화의 집필 시기가 달라지는 만큼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결혼을 하고 딸이 태어나는 등의 이야기가 가끔 더해질 때) 그의 영화가 그러하고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오스 야스지로의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사로운 이야기는 배제했지만 돈과 투자, 영화제와 시상은 물론 자국의 상황과 비판도 빼곡이 들어있기에 영화 바깥에 이야기에 주목해도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처음엔 자신 역시 서툴렀고 어렸지만(그런데 허오 샤오시엔과 이미 알았던 사이... 지아장커와 사진 찍으신 분...) 영화제란 마켓이기 때문에 에이전트와 단합해서 공략을 해야 한다는 것과 3대 영화제 등의 장점과 특징에 대해서도 서술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그 중에서 한국의 이야기도 몇 번 등장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와 연혁은 물론 외압으로 인한 문제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데다 심지어 지지성명도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의 영화학교나 영화아카데미, 외국으로 진출한 감독 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영화산업을 꽤 중요시하며 착실히 발달하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점도 놀랍다.
한국영화의 위기론은 언제고 대두되고 개인적으론 근래 2,3년 간 절실히 느끼지만 그런 우리나라의 실정도 일본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애니메이션 아니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만이 남아서 일본배우들은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 출연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나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지칭하며 ‘현재 일본에서 유일하게 영화다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하는 평도 들었었다. 단순히 영화제에 진출하고 상을 받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일본에서 영화가 얼마나 사양길에 들었는지를 들었었지만 이렇게 일본의 감독에게서 들으니 또 남다르다(하긴, 나만 해도 한 때는 구로사와 아키라, 미조구치 겐지, 오즈 야스지로, 오시마 나기사, 이마무라 쇼헤이, 구로사와 기요시, 미이케 다카시, 이와이 슌지 등의 영화를 봤지만 요샌 ......정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만 봤다. 그를 제외하고는 그나마 오기가미 나오코와 나카시마 테츠야 정도였나).
이를테면 제 어머니가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전쟁은 도쿄 대공습뿐이었습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타이완과 한국만으로 그쳤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지금쯤은......” 하고 주눅 들지도 않고 말하는 어머니에게는 명백히 피해 감정밖에 없습니다.
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식민지 타이완에서 나고 자랐는데, 타이완 시절의 행복했던 청춘가 이야기와 중국에서 패전을 맞이하며 시베리아로 억류되어 강제노동을 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본인이 무엇을 했는지)는 결국 말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수준이 이러니 당연히 일본사 자체도 그런 형태를 취하겠지요. ‘가해의 기억’은 없던 셈 치거나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라고 정색하거나 불문에 부칩니다. 즉 나라 전체가 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작품 제목으로 붙인 ‘망각’은 그런 점을 가리킵니다. 헌법 제9조는 대담하게 말하면 성서에서의 ‘원죄’가 아닐까요. 요컨대 ‘가해’를 망각하기 쉬운 국민성에 대한 일종의 쐐기로, 우리가 항상 죄의식을 자각하며 전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게 아닐까요. (중략) 그러니 “야스쿠니 신사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라고 아무리 말한들 국제적으로 이해받기 어렵습니다. 적어도 어쩌면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졌을지도 모를 중국인과 한국인은 당사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2011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일이며 일본의 역사 문제에 대한 비판 등을 담은 부분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말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이야기들에 집중하고 있다. 어떤 영화를 무슨 생각에서 생각에서부터 시작했고 어떻게 살을 더했는지. 투자를 받은 곳과 어째서 제작이 늦어졌는지. 캐스팅은 누구를 만나 누구를 소개받고 어디에서 보고 누구를 원했는지 등등. <환상의 빛>을 시작으로 해, 책을 쓴 시점에선 아직 영화화 되지 않은 <세 번째 살인>과 <어느 가족>을 제외한 모든 영화의 비하인드가 꼼꼼하게 담겨있다.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도중 더해진 사건이나 시간으로 인해 바뀐 설정은 물론 장소 섭외와 콘티까지 빼놓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이 중심이 되는 <아무도 모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의 경우에 아이들의 어떤 모습이 캐스팅과 시나리오로 이어졌는지도 꽤 상세히 써놓았다.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전공으로 삼았던 사람인지라 픽션을 연출할 때 어느 정도의 간섭과 작위가 허용되는지는 물론 피사체에 대한 예의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곱씹게 만들기도 하고 그 영화는 실패했지만 그 때 느꼈던 것들을 다음 영화에 좀 더 담을 수 있었기 때문에 성취가 있었다는 단단한 소감도 읽을 수 있다(ㅇㅇ작품은 실패했습니다, 라고 본인은 느꼈지만 주변에서 조언하길 ㅇㅇ영화를 함께한 배우, 스탭들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건 실례가 된다는 말을 듣고 수긍했다는 것도 재밌다. 그러더니 20년이 지난 영화이니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요?라고 하는 것 또한). 이쯤 되면 거의 영업 비밀을 다 담은 셈인데 이걸 읽는다 해도 그만큼 영화를 찍을 수 없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연하게도 감독의 팬이라거나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이 책이 즐겁겠지만 만약 전작을 다 보지 못했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지 않을까. 내 경우에도 감독이 다큐멘터리 PD출신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던데다 <디스턴스>와 <태풍이 지나가고>는 아직 보지 못했고 <공기인형>과 <하나>역시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때문에 아직 보지 않은 두 영화의 챕터는 읽지 않았고 보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인지 텍스트만으로 화면을 전달받기 어려워서인지 TV드라마의 에피소드도 상대적으로 가볍게 읽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 그 외의 이야기들, 어쩌면 몇 개의 챕터만으로도 분명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처음에 말했듯 반드시 읽어야 할 책, 꼭 봐야 할 영화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라면 한 번쯤 봐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고 영화를 봤다면 이 책 역시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지리라 지레 짐작해본다.
이 영화에서 그리고 싶었던 건 누가 옳고 그르다든가, 어른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든가, 아이를 둘러싼 법률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는 등의 비판이나 교훈이나 제언이 아닙니다. 정말로 거기서 사는 듯이 아이들의 일상을 그리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을 그들 곁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들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를 통해 그들의 말을 독백(모놀로그)이 아닌 대화(다이얼로그)로 만드는 것. 그들 눈에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이는 것. 제가 원했던 건 이러했습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통상적인 픽션 연출에서는 드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현장에서 발견한 대상과의 거리를 잡는 방법이자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방법이고, 취재자로서의 윤리적 자세입니다. (중략) 그 시도는 마지막까 제대로 관철했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도 모른다> 챕터 중
자잘한 디테일은 그다음에 채워 나갔습니다. 가령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나온다면 어머니가 심술궂게 트는 것일 테니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겠지...... 라든가, 식사를 한다면 모처럼이니 내가 좋아했던 옥수수튀김으로 할까 등등. 단, 먹는 장면은 밤의 장어 요리로 한정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요리를 하거나 치우는 장면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는 편이 등장인물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식사 장면에서는 먹는 것보다 준비와 정리가 중요하단느 점은 무코다 구니코 씨의 흠드라마에서 배웠습니다. - <걸어도 걸어도> 챕터 중
이처럼 저의 경우, 주제는 찍기 전에 아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자잘한 디테일을 채워 나가는 가운데 생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하지만 주제나 메시지는 저 자신이 의식하고 있을 뿐이라서 인터뷰할 때도 되도록 말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품에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나 생각하는 게 반영되어 있을 테니 구태여 말로 표현함으로써 제가 파악하고 있는 부분 외의 주제나 메시지가 버려지는 것을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부재는 채워지는가. 채워지지 않는가.
제 영화는 전반적으로 “상실을 그린다”는 말을 듣지만. 저 자신은 ‘남겨진 사람들’을 그린다고 생각합니다.
덧) 좋아하는 영화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겁지만 그 화자가 창작자 본인인데다 불편한 자만심이나 공허한 자기혐오, 공연한 자기연민이 배어있지 않은 어조라 인상적인 한편 읽는데 부담이 적었다. 게다가 읽고 나면 필연적으로 영화가 궁금해진다. 궁극의 셀프 세일즈이자 영화자서전이란 말이 딱이다. 혹 이 글을 읽고 한 명이라도 더 영화가 보고 싶어질까 싶어 열심히 스틸컷을 업어왔다. 나는 팔게 없어 나 대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팔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