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꿈을 꿨습니다. 나는 길을 잃었지요. 어두캄캄하고 부연 안개가 낀 숲이었습니다. 숲이 나오는 거의 모든 동화, 거의 모든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숲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약간 무서웠습니다. 부엉이가 눈을 빛내고 온갖 벌레들이 내게 귀 기울이며 울고 있었습니다. 공기마저 나를 주목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부스럭, 하는 소리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습니다. 나타난 건 당신이었지요. 나는 깜빡 울 뻔 했답니다. 당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고 나는 아무렇게나 그 손을 부여잡았지요. 우리는 사이좋은 그러나 겁먹은 남매처럼,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그 길을 조금씩 헤쳐 나왔습니다. 당신은 말이 없고 조금 떨고 있었지만 손은 따뜻했습니다. 내 손이 너무 차다는 것이 깨달을 만큼, 그것이 거의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손이었습니다. 이 곳은 어디입니까. 나는 어떻게 이 숲에 나타났지요. 어째서 당신은 숲 속에 있었을까요. 왜 당신은 숲에서 나가는 길을 알고 있나요. 내가 오기 전부터, 혹 얼마나 오랜 시간 여기 있었나요. 우리는 숲을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간 다음에도 내 손을 잡아 줄건가요. 나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 혼자 현실에 남았더군요. 사실 내가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 숲에 남아 있나요.

 

 

안개가 고인 밤이었다. 사오 미터 간격으로 가로등이 박혀 있어 상당히 어둡지는 않았다. 가로등은 길쭉하게 위로 솟아 있었는데 윗부분에 조그만 삿갓을 쓰고 있어 어찌 보면 버섯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파수를 서고 있는 무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잔디에 달라붙은 안개가 가로등 불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나는 안개를 먹고 숨이 조금 갑갑했다.

 

 

며칠 전 한 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170쪽이 되는 장편이라 부르기도 뭐하고 단편이라기엔 조금 긴 -사람들은 이걸 경장편이라고 부른다네요- 소설이었지요. 소설 속 인물들 - 은교 씨, 와 무재 씨, 라고 하는 사람들이지요- 도 첫 장면에서 길을 잃습니다. 나는 그 꿈을 떠올렸습니다. 그 때 우리도 그림자가 일어섰던가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 책의, 무재 씨와 은교 씨가 몹시 좋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렇겠지요. 여 씨 아저씨와 유곤 씨와 오무사 할아버지와 그들이 만지는 알전구와 퓨즈까지도 몹시 좋습니다. 당신도 그럴 것입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며 학점을 관리하고 스펙을 쌓은 학생과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학비를 벌고 생계를 유지하는 학생이 경쟁을 한다는 것은 애초 말이 되는 일일까, 하고요. 두 학생이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당신의 학점이 떨어지는 건 스펙이 없는 건 당신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걸까요. 3만원 짜리 주사와 8만원 짜리 주사 중 아이에게 어떤 걸 맞히겠냐고 묻는 사회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요. 두 아이가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고,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나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당연한 본능에 따르게 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빚을 안게 되는 것이, 정말로 개인의 낭비때문인가요. 단지 누군가가 좀 더 열심히 노력하고 오래 참는다면 그 사람과 내가 같아질 수 있는, 정말 그런 곳에서 내가 살고 있는 걸까요. 애시당초 이 사회에 살아감에 있어 평등이란 말이 가당키나 한 건지 가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무재 씨와 은교 씨와 가,나,다,라,마 동에서 일하는 모든 인물들이 생각이 날 것 같습니다. 숨이 작고 연약한 것들의 고운 냄새를 맡고 싶어질 것 같아요.

 

참으로 신기합니다. 어떤 것 하나 공정할 수 없는 세상인데 사랑은 참 흔한 것 같더군요. 사랑이라는 말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어서 가끔 나는 길을 가다 사랑을 줍습니다. 참으로 여기저기 떨어져있지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차림을 한 바로 앞 커플이 떨어트린걸까요. 아니면 커피숍 안에서 손을 맞잡고 웃는 저 남녀가 흘리고 들어간걸까요. 길거리에서 뽀뽀를 하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친구의 허리에 손을 얹은 남자일까요, 남자친구 무릎 위에 앉은 벤치의 여자일까요. 아니에요, 나는 그들을 행동을 폄하하거나 그 말들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랍니다. 그저, 그렇게 사랑이란 말이, 사랑이라는 표현이 사방에 있다는 게 다만 신기할 따름이죠. 

 

나는 사랑에 대해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은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만 또 어느 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날은 알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은 알다가도 모른다고 결론 내립니다. 나는 잘 알고 또 모릅니다. 아무거나 알거나 몇몇 것을 모르지요. 내가 알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입니다. 

 

 

은교 씨는 갈비탕 좋아하나요.

좋아해요.

나는 냉면을 좋아합니다.

그런가요.

또 무엇을 좋아하나요.

이것저것 좋아하는데요.

어떤 것이요.

그냥 이것저것을.

나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군요.

좋아합니다.

쇄골을요?

은교 씨를요.

......나는 쇄골이 하나도 반듯하지 않은데요.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쇄골이 반듯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쇄골이 반듯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좋다고 말하는 게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거기도 정전인가요?

네.

어두워요, 여기도, 라고 해 놓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은교 씨,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왜 울어요.

안 우는데요.

우는데요.

내버려 두세요.

무서워요?

네.

바보 같아요.

바보 아닌데요.

바보예요, 라고 말하고 무재 씨는 한숨을 쉬었다.

무재 씨, 하고 내가 말했다.

네, 하고 무재 씨가 말했다.

끊지 마요.

안 끊어요.

바보라고 해도 좋으니 끊지 마요, 라고 말해 놓고 무재 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전이 된 순간 겁 먹고 있을 상대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겁 먹은 상대방에게 바보라고 단언하며 한숨을 쉬는 마음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바보라고 해도 좋으니 전화를 끊지 말라는 안도와 절박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배드민턴이라도 할까요?

네.

언젠가, 라는 의미로 대답햇는데, 무재 씨가 왔다.

나는 요즘 잠이 오지 않아요, 운동을 하면 어떨까요, 운동을 하면 잠이 올까요, 오던데요, 그러면, 하고 전화로 대화를 나눈 뒤였다. 지금 갑니다, 라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져서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진심일까, 싶었는데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뒤에 무재 씨가 수통과 배드민턴 채를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왔다.

배드민턴 합시다.

 

잠이 안 온다며 배드민턴을 하자며 달려온 이에게 그 다음 날, 어제는 잘 잤냐요? 라고 묻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무재 씨, 우리가 그걸 전부 먹나요?

전부 먹죠.

와.

좋아요?

네.

좋다니까 좋네요.

나도 좋아요.

이런 대화를 나누며 도(道) 경계를 넘었다.

 

당신이 좋으니까 나도 좋다는, 그 명징함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참에 어두워지자고 생각하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차피, 차피, 라고 자신을 덮치는 그림자를 떨친 이야기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따끈하고 개운한 것을 먹고 싶어하는 상대방을 위해 차를 모는 것이,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얼마 전 반가울 정도로 오랜만에 감기에 걸렸습니다. 고열로 달뜬 상태에서 나는 밍그적거리며 상자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 속에는 색색깔의 재질별로 무늬별로 다양한 머플러들이 있었죠. 목을 내놓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다며 제가 하고 온 머플러를 강제적으로 둘러주던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은 하고 왔고 나는 하고 갔습니다. 몇몇 것은 돌려줬지만 그때 그때 돌려주지 못한 것들이 모여 이렇게 됐습니다. 신기하죠, 당신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던 색깔이 있었습니다. 나에겐 샘나도록 잘 어울린다며 자뭇 흐뭇하게 웃던 당신이었는데. 이상합니다, 왜 당신이 아니라 내게 어울리는 겁니까. 내게 둘러주기 위해 사준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이상합니다. 왜 내가 좋아하던 문양이 있을까요. 이건 내가 당신께 빌린 것들인데 말이죠. 그러고보니 이상합니다. 당신은 목감기에 잘 걸리지 않았는데, 머플러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렇게 많이 사서 내게 매주었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그것, 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네, 제가 아는 건 고작 이런 것들입니다.

     

목덜미를 당기는 듯한 어둠을 등지고 무재 씨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잡아 보자 손이라기보다는 무언가의 뼈를 잡은 것처럼 메마르고 차가웠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무재 씨의 뼈, 라고 생각하며 간절하게 잡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오래 혹은 멀리 그 숲에 있었다 한들 내가 찾아갈게요.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되는 거에요, 라고 말해줄게요. 따뜻하게 손을 데워갈까요. 아닙니다. 비록 따뜻한 손이 아니라면 또 어떻겠습니까. 내가 당신 옆에서,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손을 잡아줄텐데요, 당신이 내게 그랬듯 말입니다. 머플러를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겨우 이런 행동들 뿐이니까요. 그리고 당신께 이 책을 선물할게요. 그것이 이 책이 끝끝내 말로는 하지 않았던 그것, 당신이 내게 보였던 것이 그것, 일거라 나는 감히 확신합니다.

 

이런 행동이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덧) 낭비된 언어 없이 폼폼 솟는 사랑을 증명하는, 연약하고 아픈 것들을 곱게 돌아보는, 작가의 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누군가의 숲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 같이 길을 잃을지언정 그가 혼자서 그림자를 따라가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둘러 줄 머플러를 고르는 것도 사랑이 아니었을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아무 말 없이 그 마음을 고백해야 한다면 이 책을 선물하는 걸로 하고 싶다. 열 권쯤 책을 쟁여놓고 하나씩 주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에 내 사랑의 목적은 열 곳은 된다는 말. 어둡고 좁은, 불공평한 세상에서 잘도 살았구나. 부끄럽고 대견하다.  

 

이 책을 내게 선물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랑을 고백하게 된 그 분께 어설픈 리뷰로 윙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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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3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4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10-23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Shining 2012-10-24 13:07   좋아요 0 | URL
수다쟁이님 마음이 따뜻해졌다니 제 마음도 따끈해지는 것 같아요^^
이 책은 정말 언제나 고요하게 타는 벽난로같아요. 사랑스럽고 몽글하고 귀엽고.
아, 정말 좋아요.

맥거핀 2012-10-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리뷰군요. 소설이 조용히 녹아들어가 있는 글이라서 좋습니다. 몇년전 읽었던 황정은의 소설을 다시 꺼내봐야겠습니다.

Shining 2012-10-24 13:10   좋아요 0 | URL
희랍어 시간, 리뷰처럼 개인적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던 책이었어요.
이 뒤에 출간 된 파씨의 입문, 은 약간 난해하고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데 이 책만은
거의 모두에게 최선이 아닐까 싶어요. 한글로 쓴 책에서 최고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0-24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로 쓴 책에서 최고.............인데 아직도 안 읽은 1인......
(아..나는 진짜 댓글학원 다녀야 해..)

Shining 2012-10-25 11:13   좋아요 0 | URL
제가 좋다고좋다고 막 설레발 쳐서 읽는게 더 미뤄진거 아니에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걱정걱정..)
댓글학원은 뭡니까? 음, 댓글 잘 쓰도록 가르치는 학원?(아이님은 댓글도 글만큼 잘 쓰시니까 그럴리 없을테고) 댓글만 다는 학원?(아이님은 댓글도 글만큼 많이 읽으니까 그럴수 있을지도) 궁금해요! 좋은데면 같이 다녀요ㅎㅎ

티티카카 2012-10-2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샤이닝님의 이런 섬세함이 정말 좋아요.

Shining 2012-10-25 11:15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하하^^ 섬세함이라고 쓰고 감상적, 이라고 읽어주세요ㅋ
이 책, 세 번째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아니 읽을수록 좋아요.

이진 2012-10-27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저 이 책 읽고 있어요. 읽다가 너무너무너무너무(쓰지 못하는 수식어지만 이 단어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좋아서 방을 뒹굴었어요. 어쩌면 저런 글을 쓸까. 놀랍기도 하고, 따뜻하고. 하여튼 책 읽다가 며칠 전에 샤이닝님 리뷰를 본 기억이 나서 다시 들렀어요. 그 땐 제목만 보고는 껐는데, 좋아요 ㅠㅠㅠㅠㅠㅠㅠㅠ

Shining 2012-10-27 23:43   좋아요 0 | URL
이진님, 완전 오랜만! 잊어버리겠어요ㅠ

이 책 정말 좋죠? 진짜, 한글로 쓰여진 글 중의 베스트...라는 헌사가 아깝지 않아요ㅠ
신형철 님(님이래ㅋ)의 글까지. 오오오오오오. 펄펙트-_-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