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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늘 걷는 산책 코스가 있다. 걸어서 천변으로 나가서 천변에서 왕복 5km정도, 도합 7km 가량 되는 거리다. 길은 매우 길었지만 대개 그 정도만 걸었다. 돌아올 때를 생각해서 더 멀리 나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질리지도 않고 많이 걸었다. 들었던 노래만 수백곡, 걸었던 거리만 수천킬로미터, 지나쳤던 사람만 수백명, 별과 새와 갈대와 차도 참 많이 보았더랬지. 자전거로 갈 때도 있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 조깅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고 산책이기도 했다. 어떤 날, 결국 밤새 한숨도 못 자고 다섯 시가 조금 넘어 몰래 집에서 나왔다. 11월이었으니 새벽공기는 빛을 가를만큼 스산했다. 불면증을 앓는 사람이 잠을 자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잠을 자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각을 부여잡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아무 생각도 안 하려는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이미 낯선 풍경에 속해 있었다. 아, 너무 많이 걸어버렸다. 자전거를 타지 않는 한 이만큼씩 오면 돌아가는 길이 아무래도 지루하고 지친다. 올 때의 에너지와 갈 때의 에너지가 같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어쩌겠어,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던 자신을 가볍게 탓하며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할 것까지야 없지만 벌써부터 지루해진다. 돌아갈 길이, 무감해진다. 생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이 길을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아주 크게 울고 싶어진다. 나는 울지 않을테지만, 반드시 그러겠지만, 그래도 울고 싶어질 때 정도는 있는 법이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한다. 나 자신과 둘이서 마주 앉아 대질해본 결과 그건 진심이었다. 다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 전의 과정까지 진심에 도착까지의 인과가 모두 후회스럽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원망하지 않는다고도 하지 않았다. 되도록 적게 후회하고 되도록 속으로 원망했다. 후회하지 않는 건 강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약해서가 아닐까. 후회를 인정하는 후회조차 두려운 것이다. 비겁한데다 무책임한 사람까지 되는 것이 겁이 나는 것이다. 후회해도 별 수 없지 않냐고 결과론적으로 생각해서였다. 그럴바에야 마음이라도 지키라도 '내'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정말 어쩌다 어느 순간.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려고 했던게 아닌데, 그러고 싶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너무 멀리까지 와버려서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돌아갈 수는 있을까 막연해질 때가 있다. 돌아갈 곳이 있기는 한 걸까 망연한다. 그 순간 울대뼈 밑에서 차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것이 터져나올 것 같은 그런 감각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우리에 갇힌 야수가 철창을 쥐고 흔드는듯한 착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은지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은 주문을 외워가며 말이다. 서윤의 경우, 두려움을 이기는 제일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경험하는 거라 여기는 편이었다. 아니, 그보단 아예 두려움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상책이라고. 진짜 공포는 그렇게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 사실 서윤이 품고 있는 근원적인 두려움 중 하나는 가난이었다. 서윤은 오랫동안 그것이 제 삶 가까이 오지 못하게 흡사 파리 떼를 쫓는 사람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혹 그게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 호텔 니약 따
여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도 그저 즐기지 못하는 탓도 있지만, 탈 것을 잘 못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현실에 견고하게 자리 박는 걸 마음에 두는 목표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곳 저곳을 다니며 이것 저것을 보고 듣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것이 내 집, 내 공간, 내 가구, 내 물건으로 투영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라면 떠날 수 있다는 자유와 돌아올 곳이 있다는 부자유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가끔 K의 방랑벽과 J의 체류가 지겨웠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불행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떠나는 것과 아닌 것 중에 고를 수가 있었고 떠나는 것 중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고를 수 있었겠지. 어떤 이들은 떠난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채 모르고 살기도 하고 선택지를 읽어도 고를 수가 없기도 하고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다른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는데에 비하면 그들의 이기심은 얼마나 평온한가. 여전히 나는 바보같은 생각을 한다. K와 J보다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고 산 나는, 그들에 비해 더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 정도는 내게 돌려줘도 되지 않은가. 삶에는 누구를 더 봐주고 누구를 덜 봐주는 자비도 없고 누군가의 행과 불행을 절반으로 뚝 나눠주는 공평함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도 그런 허위의 진실을 믿다니. K와 J가 아닌 내가, 삶을 허투루 보고 있다는 사실에 반성하는, 그런 밤이 있다.
이런저런 곁눈질과 시행착오 끝에 가까스로 얻게 된 한 줌의 취향. 안도할 만한 기준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었던지. 상품 사이를 산책할 때 나는 엄격한 동시에 부드러운 사람이 됐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는데서 오는 여유. 그러나 원하지 않는 것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식의 까다로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리자 쇼핑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원하는 게 많아졌다.
오랜 소비 경험상 나는 이런 데서 기죽은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익숙한 듯 자연스레 행동하려 애썼다. 더불어 속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겸손한 표정을 짓는 일도 잊지 않았다. 교육받은 사람답게, 당신을 존중한다는, 나는 으스대는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태도. - 큐티클
분명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을 고르는 것과 저것을 고르지 않는 것의 차이, 침묵이 최고의 공격이자 최선의 방어라는 눈치, 가격을 먼저 묻는 속물이 아니라는 태도, 그러나 사실 가격을 물을 타이밍을 재고있는 조심스러움, 가지는 것과 가지지 않는 것 사이에는 취향이 있다는 식의 뉘앙스. 나는 언제부터 그런 것들을 배우고 연습하고 연기하게 되었을까. 비싼 옷을 입은 남자보다 제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남자의 안목에 감탄하고 예쁜 옷보다 잘 가꾼 손톱이나 머리칼을 가진 여자의 부유함을 알아채게 된 때는 언제였을까.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지 않고, 처음 본 걸 처음 봤다고 하지 않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장식하는 그 속박은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도시는 김중혁이 그리고 도시의 여자는 정이현이 그리고 도시의 현대인은 김애란이 그린다. 김애란이 그리는 현대인은 적당히 이기적이며 이타적이고 적당히 희생적이고 타협적이고 적당히 솔직하면서도 무심해서 가끔 한심해서 뭉클해진다.
언니. 가을이 깊네요. 밖을 보니 은행나무 몇 그루가 바람에 후드득 머리채를 털고 있어요. 세상은 앞으로 더 추워지겠죠?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저는 제가 뭔가 창의적이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며 살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지금 이게 나예요. 누군가 저한테 그래서 열심히 살았느냐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다, 나, 이런 사람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요즘 저는,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들어요. 휙휙- 차들이 바람을 찢고 지나갈 때 내는 그런 소리를요. 마치 제가 8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 왜 오락의 고수들 있잖아요. 걔네들은 정신없이 쏟아지는 총알이 아주 커다래 보인다던데. 다가오는 모양도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느껴진다 하고요. 저도 그랬으면 싶어요. 지금 선 자리가 위태롭고 아찔해도, 징검다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어도, 한 발 한 발 제가 발 디딜 자리가 미사일처럼 커다랗게 보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 서른
딱히 과거를 살고 있다고 자조하고 싶지 않고 회상이 기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주 하지 않으려 하지만 가끔씩은 스스로의 생각을 막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가 있다. 지금의 나보다 십 년 전의 Y가 더 현명하고 강했다는 것. 나는 왜 십 년 동안 너보다 더 자라지 못했을까 미안해지고 너는 왜 십 년 후의 나보다 이미 자라있었을까, 아파진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뭘 하다가 뭘 찾다가. 그건 이미 십 년 전에 네가 했던 말인데. 십 년 후의 나는 어쩌면 십 년 전의 너에게 답을 구하고 있는가. 또 십 년 후에도 나는 이십 년 전에 너에게 답을 구하는가. 나란 사람은 질리지도 않게 변하지 않는구나.
김애란의 단편을 읽으며 손목에 아로새겨진 뼈가 펄떡이는 걸 느낀다. 분명 그녀의 글을 좋아했다. 내게 안목과 취향이란 것이 모두 있다고 믿었을 때, 내 안목과 취향이 모두 그녀를 향해 YES라는 표지판을 들고 있었기에. 친구는 책 표지의 앞날개를 볼 때마다 우울해하며 등단년도와 자신의 나이를 비교해본다고 했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가질 수 없을 만한 것을 탐하는 사람이 아니고 가질 수 없을 것이라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예 탐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장담시키는 쪽이었다. 그러니 나는 김애란을 부러워하지도 시샘하지도 않을 수 있었다. 그저 제3자처럼 무심한 독자처럼 냉정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물 속 골리앗」과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얼마간의 실망과 지루함을 느꼈을 때는 내심 통쾌(!)해하기도 했다. 『비행운』역시 우연처럼 집어든 책이었고 다소간 고(高)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몇몇 편은 그저 그랬고 (심지어 지루하거나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첫 번째 단편집처럼 몰두하지는 않았다.
다만 몇몇 편이 매우, 개인적인 시선으로 눈에 들어왔다. 특히 「서른」의 전조가 유별나게 그랬다. 왜 이렇게 삶이 비루할까, 가 아니라 왜 이렇게 내 삶이 남루해졌을까, 라고 물을 때의 무구한 어리둥절함, 절묘한 피로감, 권태조차 느낄 수 없는 허무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스쳤다. 몇 가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자살을 시도했지만 일주일 간 누구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누군가의 사연, 사채와 동거와 다단계로 얼룩진 친구의 친구 이야기, 천체망원경과 에스프레소 머신과 드레스룸가 없는 삶도 있다는 것을 듣고 놀라던 중학교 동창의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 가끔씩 아직 낼 화가 남아있다는 것이, 여전히 분노하거나 모멸당했다고 생각하는 스스로의 감정이 놀라울 때가 있다. 다 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여전히 수많은 깨달음이 무수히 존재한다니, 삶은 얼마나 잔인한 방식으로 이타적인가. 왜 특수하게 나쁘게도 특별하게 불성실하게도 특이하게 요행을 바라며 살지도 않았는데 어느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엉망진창이 되고 그 엉망진창이 된 그림은 고치려고 하면 할 수록 더 퍼지는 얼룩처럼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걸까. 왜, 라는 소모적이고 감상적인 -비논리적이기도 한- 질문밖에 할 수 없게, 왜 사람을 구차하게 만드는 걸까.
별 수 없이 삶은 고루하고 비루하고 남루하다. 어떤 좋은 말을 해줘도 어떤 표현으로 '힐링'을 시도해도 어떤 긍정적 바람을 불어넣어도 나는 여전히 삶이 고루하고 비루하고 남루하다(심지어 고단하기까지). 삶의 고루함, 비루함, 남루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자고 제창하는 이들 속에서 삶은 그저 고루하고 비루하고 남루할 뿐이라고 말하는 이도 한 명은 있어야 한다. 『비행운』의 김애란은 그 한 명인 듯 해 나는 퍽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