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7월 나는 다량의 약을 먹고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약이 내 위 속에서 제대로 작용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없을 것이다.
약을 삼킨 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수 없으나 내 위는 그 약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 끊임없이 분홍색 약물들이 흘러나왔고 그런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각종 질문을 내 자아로부터 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나는 그녀를 진정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이것은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일까?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극단적인 동경은 아닌가?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진정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좀더 신중한 결정을 했어야지 않는가?
자살이란 결국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보복성 행위가 아닌가?
자살을 통해서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남은 자들의 눈물이 나의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적정한 것인가?
신입 대학생에게는 '사랑'에 대한 실체없는 동경이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사랑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같은 과 동기라는 것 이상으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실체는 '같은 과의 동기 그녀'가 아니라 '내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있던 또다른 그녀'였을지 모른다.
그 내면에서 동경하던 그녀가 현실의 그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내가 한 사랑은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계 속의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나만의 이상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짝사랑이었다.
아니 짝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현실적인 실체는 없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내 사랑의 실체가 있었고 그 실체는 내가 그녀의 곁으로 오기를 수년동안 기다렸기 때문이다.
나는 외도를 한 것이었다. 내 맘 속의 그녀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었고 현실의 그녀에 대한 이해도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착각으로 외도를 한 것이었다.
외도의 사실은 최근에야 깨달게 되었다.
당시에는 내 마음 속 그녀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 세상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이후 이별은 너무 쉬운 것이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역겨운 약물들과 함께 이별이라는 감정도 모두 화장실 변기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했다.
2년 또는 4년이라는 꽤 장시간을 함께한 여러번의 교제와 그리고 이별들은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졌고 또 쉽게 다시 누군가를 만났다.
이전까지의 이별은 그녀들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는 나 스스로가 2년간 교제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집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때도 이별의 고통은 없었다. 주는 고통도 받는 고통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세상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사랑의 목적은 우수한 DNA의 전파라고 했다.
도킨스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부정하고 이 모든 것을 세포나 호르몬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문화'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 시대적, 지역적 문화의 차이에 따라 사랑의 정의가 달라진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그리고 시대적 풍조인 '하루밤의 쉬운 사랑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너무도 가볍게 만든다.
어제 집사람과 지인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퇴근 길에 사고까지 겹쳐서 엄청난 교통정체를 경험했다.
성격이 급한 집사람은 엄청난 공격을 나에게 퍼부었다.
집사람은 예쁘지 않다. 상냥하지도 애교가 있지도 않다. 나보다 나이도 4살 많다. 두아이의 엄마로 배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밉지 않다. 나를 공격하는 그녀가 불편하지 않다. 도리어 정겹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그리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돌아왔다. 세상적 기준으로 어디서나 볼수 있는 그녀와의 이별은 두렵다.
조잘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 조잘대던 그 입을 다물고 웃는다.
알랭 드 보통은 성숙한 사랑은 결혼이라고 말한다.
융은 상대방에 대한 '신성화', 즉 눈에 콩깍지가 끼였을 때 결혼에 성공한다고 한다.
2014년도에 신혼부부 이혼률이 23.5%였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 콩깍지가 떨어지면 진정한 '그(그녀)'와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그녀)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별을 선택한다.
사랑이라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그(그녀)는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집사람과 결혼한지 14년이 흘렸다.
진정한 그녀와 대면한 지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융은 콩깍지가 떨어지고 진정한 그(그녀)를 만날때 '진정한 사랑'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이다.
그리고 현실을 대면한 남녀에게 아직도 주변의 이상이 많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없어질 수 없다.
다만 그 괴리를 서로간의 이해와 배려와 노력으로 메울수는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네가 내 속에서 녹아버렸고, 그리고 그런 나를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난 그런 이유로 그녀와의 이별이 두렵다.
때문에 더욱 이해하고 배려하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