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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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7월 나는 다량의 약을 먹고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렀다.
약이 내 위 속에서 제대로 작용했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없을 것이다.
약을 삼킨 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수 없으나 내 위는 그 약들을 밖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는 끊임없이 분홍색 약물들이 흘러나왔고 그런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각종 질문을 내 자아로부터 받아야 했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나는 그녀를 진정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이것은 정말 사랑이라는 감정일까?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극단적인 동경은 아닌가?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진정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좀더 신중한 결정을 했어야지 않는가?
자살이란 결국 그녀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보복성 행위가 아닌가?
자살을 통해서 무엇이 남을 것인가?
남은 자들의 눈물이 나의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적정한 것인가?

신입 대학생에게는 '사랑'에 대한 실체없는 동경이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사랑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같은 과 동기라는 것 이상으로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실체는 '같은 과의 동기 그녀'가 아니라 '내 속에 이미 오래전부터 만들어져 있던 또다른 그녀'였을지 모른다.
그 내면에서 동경하던 그녀가 현실의 그녀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내가 한 사랑은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계 속의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나만의 이상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짝사랑이었다.
아니 짝사랑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현실적인 실체는 없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내 사랑의 실체가 있었고 그 실체는 내가 그녀의 곁으로 오기를 수년동안 기다렸기 때문이다.

나는 외도를 한 것이었다. 내 맘 속의 그녀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었고 현실의 그녀에 대한 이해도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착각으로 외도를 한 것이었다. 

외도의 사실은 최근에야 깨달게 되었다.
당시에는 내 마음 속 그녀 자체를 부정하였다.
이 세상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 이후 이별은 너무 쉬운 것이었다. 위에서 쏟아지는 역겨운 약물들과 함께 이별이라는 감정도 모두 화장실 변기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했다.
2년 또는 4년이라는 꽤 장시간을 함께한 여러번의 교제와 그리고 이별들은 너무도 쉽게 받아들여졌고 또 쉽게 다시 누군가를 만났다. 
이전까지의 이별은 그녀들의 일방적인 통보였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는 나 스스로가 2년간 교제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집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때도 이별의 고통은 없었다. 주는 고통도 받는 고통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세상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사랑의 목적은 우수한 DNA의 전파라고 했다. 
도킨스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인간의 영혼과 감정을 부정하고 이 모든 것을 세포나 호르몬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랑을 '문화'의 산물로 보기도 한다. 시대적, 지역적 문화의 차이에 따라 사랑의 정의가 달라진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그리고 시대적 풍조인 '하루밤의 쉬운 사랑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너무도 가볍게 만든다.

어제 집사람과 지인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퇴근 길에 사고까지 겹쳐서 엄청난 교통정체를 경험했다. 
성격이 급한 집사람은 엄청난 공격을 나에게 퍼부었다.
집사람은 예쁘지 않다. 상냥하지도 애교가 있지도 않다. 나보다 나이도 4살 많다. 두아이의 엄마로 배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밉지 않다. 나를 공격하는 그녀가 불편하지 않다. 도리어 정겹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그리고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돌아왔다. 세상적 기준으로 어디서나 볼수 있는 그녀와의 이별은 두렵다.
조잘대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참 조잘대던 그 입을 다물고 웃는다. 

알랭 드 보통은 성숙한 사랑은 결혼이라고 말한다.
융은 상대방에 대한 '신성화', 즉 눈에 콩깍지가 끼였을 때 결혼에 성공한다고 한다.

2014년도에 신혼부부 이혼률이 23.5%였다.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 콩깍지가 떨어지면 진정한 '그(그녀)'와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그녀)를 인정하지 못하고 이별을 선택한다.
사랑이라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그(그녀)는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집사람과 결혼한지 14년이 흘렸다.
진정한 그녀와 대면한 지 꽤 오랜시간이 흘렀다. 

융은 콩깍지가 떨어지고 진정한 그(그녀)를 만날때 '진정한 사랑'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세상의 절반은 남자고 절반은 여자이다.
그리고 현실을 대면한 남녀에게 아직도 주변의 이상이 많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없어질 수 없다.
다만 그 괴리를 서로간의 이해와 배려와 노력으로 메울수는 있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네가 내 속에서 녹아버렸고, 그리고 그런 나를 내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기적인 사랑이지만 난 그런 이유로 그녀와의 이별이 두렵다.
때문에 더욱 이해하고 배려하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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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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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아서 아들을 생각하며 또다시 후회를 한다.
어제 저녁도 공부, 공부하며 아들에게 짜증을 냈다.
아들이 공부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또래 아이들 중에 꽤 성적이 우수한 편이다.
하지만 나의 욕심은 더욱더 아들을 다그치게 된다.

아들이 잠들기 전 잠시 지나가는 대화를 나누었다.
"아빠...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공부하라고 할거야?"(아들은 모태신앙으로 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다)
"아니..."
"왜?"
"천국에서는 공부가 필요없을 것 같아서... 공부는 사람들이 만든거잖아..."
"빨리 천국에 가고 싶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성적 순이 곧 인생의 성공 순도 아니고 행복 순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도 뉴스에 서울대 상경대 졸업생이 3년째 취업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갈 수록 경쟁이 치열해 지는 현실 속에서 아들의 미래에 대한 강박관념이 내 머리 속을 끊임없이 뒤흔다. 그리고 혼란스러워진 머리 속은 짜증으로 가득차고 이 짜증은 고스란이 아들이 감당하게 된다.

어쩌면 아들에게 내가 가진 어두운 그림자를 넘겨 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쉽지 않았던 내 인생의 쓴 물은 내 속에 눅눅하고 어둔 그림자를 만들었다.
신앙적인 조명은 나를 밝은 곳으로 이끌었지만 신앙의 흔들림과 갈등으로 인해 조명이 약해지면 다시금 그림자들이 들고 일어난다.

아들에게 물려줄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을 멈출수가 없다. 이런 강박관념은 결국 내 그림자의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영어 제목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다.
부모 없는 고아 '작은 나무'는 조부모의 손에 양육된다.
그의 조부모는 인디언으로 산 속 오두막에서 살고 있다.

내 관점에서 6세의 어린 아이를 산 속에서 키운다는 것은 무척 '곤란'한 일이다.
일단 현대문명와 격리된 산 속이라는 주위 환경이 너무나도 위험하고,
또 그 또래 아이들 그리고 주위 환경(특히 빠르게 변화되는 시대적 분위기)과의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자아를 형성해 가야 하는 시기에 현실 세계와는 완전히 격리된 산 속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결국엔 세상 속에서 홀로서기를 해야만 하는 '작은 나무'에게는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산 속 가정의 주생계수단이 불법 위스키 제조와 판매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도중 나도 모르게 여러가지 의미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리고 진정 아름다운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진정 아름다운 교육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가슴으로 어렴풋이 ... 다가온다.

"아빠, 나는 아빠하고 엄마하고 같은 날 천국에 가고 싶어... 그러니 나이 많이 들어서도 먼저 천국에 가면 안돼..."
"너는 나중에 와야지..."
"나중에 가면 천국에서 찾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많을텐데."
"찾을 수 있을거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교육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작은 나무'는 9살이 되던 해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
하지만 '작은 나무'는 외롭지 않았다. 하늘에 이름모를 새들도, 길 옆 나무들도, 지나가는 산 짐승들도, 발을 자극하는 흙과 자갈들도 모두 '작은 나무'의 친구들이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기 때문이다.

홀로 남겨진 '작은 나무'는 인디언들의 나라를 찾아 길을 떠난다.
한 때 그의 먼 선조들이 떠나왔던 나라를 찾아 떠난다.
'작은 나무'는 그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9살의 '작은 나무'의 걸음에는 힘이 있고 희망이 있다.

지난 2009년 오바마 미국대통령은 인디언 추장들을 초청해 백인들의 추악했던 과거 인디언정책에 대해 사과하였다.
이 책의 출간년도가 2009년이고 실제 집필시기는 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로서 저자는 절반의 인디언이다.

'작은 나무'의 힘찬 걸음에 투영된 저자의 외침이 이런 시대적 변화를 가져 오지 않았을까?

'작은 나무'의 교육과정 중 가장 큰 위기는 문명과의 접촉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와 같은 이유로 '작은 나무'의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그의 조부모들은 '작은 나무'의 양육문제로 고소를 당했고 결국 '작은 나무'는 도회지의 기독교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배운 '작은 나무'의 모습은 자본주의가 기승하며 자연파괴와 성장만을 주장하고 있는 시대에서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이었고, 특히 인디언들을 종교적 배척의 대상으로 보던 시대적 분위기는 결국 '작은 나무'를 다시 산 속으로 몰아내었다.

이전 자연에서 먹을 것을 찾던 시대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동화되어 함께 살았다. 자연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인간과 자연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였고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인정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욕심을 폭발시켰다. 더이상 인간과 자연은 하나가 아니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공공연히 신의 영역에 도전함을 슬로건으로 내건다.
자연의 우위에 서게 된 인간들은 자연을 파괴한다.
이전에는 먹을 만큼만 사냥했다면 이제는 재미로 사냥을 한다.
숲은 파괴되어진다. 

할아버지는 인간을 '칠면조'에 비유한다. 머리를 너무나 꼿꼿하게 처들고 있는 바람에 자기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연이 파괴되면서 인간도 파괴되어져 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같다.
일부 과학자들은 과연에도 이 지구를 정복한 종이 인간종일까?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런데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기계와 시멘트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2050년에는 인간과 비슷한 인공지능이 개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리고 인공지능에 의한 초인의 등장도 예고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 세계를 물려주는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기계와 시스템과 시멘트 건물이 우리와 함께 한지는 인간종의 수만년의 역사 중 몇백년 밖에 되지 않지만, 그들은 기계와 시멘트 위에서 태어났고 그런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다.

사랑은 이해는 것이다. 이해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
저자는 '너구리 잭'이라는 체로키족 인디언을 통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랑은 눈물이나 낭만보다는 하루밤의 육체적 사랑이다. 이런 육체적인 사랑의 밑바탕에는 생리적인 욕구해소라는 극단적인 개인적인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남여간의 사랑에서 육체적인 하나됨이 사랑의 농도를 더욱 짙게 하는 것이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런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성적 매력이 사라져가며 위기를 맞이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책에서는 사랑하던 남여의 이별에 대한 전조로 성적 쾌락이 약화되는 것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사랑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고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대로를 이해할 수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융이 말한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남여가 서로에 대한 콩깍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서로를 민낯으로 볼때 시작될 수 있다.

초겨울 산수유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던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찬 바람이 들어닦치고 있는데 있는데 산수유 열매는 왜 겨울준비를 하지 않고 여전히 나무에 매달려 있을까?

때를 아는 자의 여유일 것이다.
산수유 열매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은 때를 알기에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는 나비를 통해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비는 다가오는 죽음을 놓고 안달하지 않는다. 나비는 자신이 할 바를 다했으니 이제 죽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도 때가 있다. 우리가 급하게 서두르며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때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과 우리가 하나였을 때는 우리도 때를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분리되어지고 자연을 파괴하는 우리가 되었을 때 우리는 급하게 서두르게 되었다. 우리는 더이상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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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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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곳(이때 아무도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한다.)에서 항상 또 다른 나와 대면하게 된다. 또 다른 나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히 꼭꼭 숨겨둔 욕망들을 쏟아내는 것이다.
빛이 커지면 어두움도 커지듯 밝은 곳의 선한 모습은 어두운 곳의 악한 모습를 극도로 억압한 결과이다.
즉, 이면에 악한 속성을 억압한 만큼 겉으로는 선한 속성이 들어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죄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조금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선행으로 죄를 상쇄하려고 하지만 선행이 커질수록 이면의 그림자도 더욱 커지게 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융은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하지 말고 인정함으로써 명암의 균형과 융합을 통해 스스로의 발전의 동력으로 삼도록 권고한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까지 어떻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 이 숨겨진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내 속에 그림자를 깨닫고 인정하지만 이 힘은 현재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에도 부담이 되는 것이다.
내가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도 나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융은 만돌라라는 개념을 이야기 한다. 만돌라는 선과 악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도 아니고, 타협하거나 중립을 지키는 것도 아니다. 선만 있던지,  혹은 악만  있는 반쪽이 아니라 선악이 함께 있는 모순을 이야기한다.
잘못하면 삶의 다양한 색채들이 제 빛을 내지 못하고 회색을 만들어 낼수도 있다. 회색은 모든 색깔이 뭉쳐 중성화가 일어나면서 우중층한 단조로움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돌라는 삶의 다채로운 색을 내는 것이다.


자주 그림자로 인해 진한 흑색에 가까운 회색 속에서 주저앉을 때가 많다.


통제할 수 없는 폭발력, 거부할 수 없는 힘, 폭발 후 너무 처참하게 나의 내면을 파괴하는 힘, 그런것이 내 속에 있는 그림자이다.
신에게 부르짖음도 이제는 염치없다고 회색이 충고해 준다.
어쩌면 부르짖을 의지조차도 무참히 짖밟아버리는 힘이 그림자이다.


한때 모든 의지를 꺾고 그림자에 순응해서 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삶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한부 인생에서 그림자에 대한 단순한 순응은 신의 존재를 믿는 자로서 용납하기가 쉽지 않았다.
신은 염치없더라도 돌아오라... 그러면 용서하리라... 하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책 속에 글자들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을 통해, 뇌를 통해 나의 내면으로 들어온 글자들은 깊은 어둠에 잠긴 곳곳을 해집고 다니면서 밝은 빛을 심어준다. 마치 44년동안 청소하지 않던 지저분한 집안을 대청소를 하듯...
그 속에서 썩어 문들어진 더럽고 냄새나는 것을 만나 당황하기도 한다. 반면에 여기 있었구나 하고 예전에 잊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찾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있는 줄도 몰랐던 황금같은 보물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나는 '책' 이라는 것에서 해결점을 찾아 본다. 그림자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신이 모든 그림자에 대한 죄를 용서해 주셨다. 하지만 이미 그림자가 깊숙히 배인 육체의 틀 속에서는, 이 틀을 완전히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림자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와 더불어 융이 말하듯 삶의 무지개를 만들는 동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책을 통해 내면의 강팍한 마음을 치유하고 나만의 글을 통해서 그 찌꺼기들을 밖으로 배출한다.
나만의 이야기를 열심을 내어 들어주고 이해해 줄 누군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동병상련의 동지를 만났다고 해도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열을 내기 바뿌고 종국에는 우리가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에 만족하는 정도에 그친는 것이 일반이다.


속시원하게 마음 맞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과 자신의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끄집어내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내면의 성찰을 위해서는 깊은 곳에 있는 자기자신과의 깊은 만남이 필요하다.


책과 글쓰기가 이런 작업에 도움이 될 것 같고 때문에 지금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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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협력의 진화
로버트 액설로드 지음, 이경식 옮김 / 시스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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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전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쟁만큼 중대했다."

1914년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있었던 축구경기에 대한 한 장교의 회고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양국 군인이 전쟁을 잠시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휴전을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당시 휴전했던 양측 군인들은 선물을 교환하고 축구 경기를 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몇 치의 영토를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잠시 전투가 중단된 동안은 물론 전투를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와 벨기에 영토의 800킬로미터에 걸친 여러 전선에서는 적군끼리 서로 상당히 자제를 하는 일이 허다했다. 이들 참호를 둘러본 한 영국군 참모 장교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독일 병사들이 그들 방어선 안의 아군 소총 사정거리 내에서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군 병사들도 그것을 보고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현재 전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 양측 모두 "공존 공영" 정책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당시 서부전선의 상황은 극한의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협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이다.


이 책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통해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상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팃포탯'을 소개하고 어떻게 협력관계가 형성되어지고 또 진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사례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 팃포탯 전략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즉 맞대응 전략이다. 우선 협력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의 대응방식에 따라 맞대응하는 단순한 전략)

특히 팃포탯이 상대방을 패배시킴으로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부터 협력을 이끌어냄으로써 함께 공존하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축구나 체스 등 경쟁사회의 제로섬 게임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협력'이라는 삶의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팃포탯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충분한 관계의 지속성과 작은 조직이라도 함께 협력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협력이 형성되어지고 지속적으로 번성하게 된다. 즉, 비록 신자유주의 체제 속의 극도의 성과주의 조직 속에서도 1~2명의 극소수의 협력자만 있어도 공존공영의 협력시스템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팃포탯은 호혜주의에 입각한 전략이다.
(* 호혜주의 : 당사국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혜택을 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주의)
결코 먼저 배반하지 않고 신사적이다. 하지만, 배반에 대해서는 단호히 응징하는 반면 또 용서할 줄도 안다. 그리고 단순한 패턴으로 인해 누구든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정보가 곧 힘이 되었다. 조직마다 개인마다 자신의 숨겨진 비장의 한 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경쟁 속에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허를 찌를 수 있는 비수가 되고 자신에게는 큰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팃포탯은 자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공개해서 협력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2명이 투신자살하는 일이 발생했다. 꿈의 직장이라는 공직사회에도 성과주의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투신자살한 그들 옆에 함께 협력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사전에 자살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빛이 크고 넓게 펴지는 만큼 그림자도 크고 넓게 펴진다. 현대사회가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만큼 이면에는 소외되고 고립된 개인들이 늘어만 간다. 우리들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함께 나눌수 있는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다.

어제 독서모임 중 "조직에서 우리와 같은 모임은 매우 중요합니다. 직장내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함께 책을 읽고 함께 마음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런 모임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라는 의견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조금씩 달라보이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이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냥 끝나는 것인지?, 결국 시한부일 수 밖에 없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무엇인지?, 겨울이 왔음에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나무열매를 보면서 옆에 서있는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결코 늦지 않는다. ...
이전에는 잡념이라고 생각했던 온갖 생각의 파편들이 이제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냥 달리다 보면 너무 삭막한 세대이다. 인간성은 소멸되고 조직이 준 목표, 사회가 강요하는 목표를 향해 달고 달은 인생이다.

차를 몰고 한강변에 나갔다. 항상 앞만보고 속도를 냈다. 하지만 그 날따라 차가 너무 막혔다. 무심코 주위를 돌아보았다. 문득 여기 강변도로가 아닌가? 길을 잘못들었나? 하고 잠깐이지만 놀랐다. 몇년을 지나다닌 길이었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그때까지 도로에 가로수가 있는지... 한강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한번도 생각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직장 속에서 언제나 경쟁자였던 동료들을 새롭게 본다. 밟고 오르지 않으면 뒤처질것만 같았는데... 옆자리 동기의 머리에 흰머리도 보이고, 눈에 주름도 보인다. 그도 어느덧 불혹을 넘어버렸다. 항상 소리치던 팀장님의 얼굴에 삶에 지친 그림자가 보인다. 강인해 보이던 모습 속에 위로받고 싶은 모습이 함께 보인다. 이제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면 어떨까? 조직이 원하는 것은 결국 성과이다. 개인별 경쟁이 아니라 함께 협력해서 성과를 내더라도 좋다.

협력과 공존공영은 200만명의 사상자를 낸 그 참혹한 1차대전 서부전선 참호에서도 싹 텄다.
현 사회는 영화 '메트릭스'를 연상케 한다. 비록 눈에 보이는 거대한 기계는 없지만 사상과 이념 등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통제받으며 하나의 큰 구조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구조물 구석구석에서 작은 부품으로 소모되어지고 있는 우리들이 있다. 언젠가 마모되어서 더이상 사용할 수 없으며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되어질 것이다. 소진되어 교체된 부품으로서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차대전 서부전선의 군인들... 국가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념과 사상이 중요한 이슈이겠지만 참호에서 죽어가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 200만명의 죽음과 바꿀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과 가족이 있었고 때문에 함께 살아야만 했다. 그 곳에서 공존공영의 발생한 것이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조직이 준 목표를 행해 달려가는 우리들... 바로 눈 앞에 있는 승리의 보상만 보면 서로를 밟고 있지만 우리의 결국은 동일하다. 그냥 함께 가자.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우리다. 조금 빨리 가든, 조금 뒤에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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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 : 믿음의 시험
알렉 모티어 지음, 정옥배 옮김 / IVP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결론적으로 천국에서 만나는 자가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증거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이냐, 행위냐, 구원도 취소될 수 있다 등등 각종 설(?)들이 판을 치고 있다.
칼빈은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성도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웨슬레는 구원은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믿음을 지킬 책임이 성도들에게 있다.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구원은 취소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나 심판대에 설 때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설까지 나왔다.
이는 신앙인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현 시대에 대한 외침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아닌 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도구로 악용되기도 한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교회에서 찬양과 봉사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은 행위의 공로로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하는 자들 중에도 알곡도 있고 가라지도 있으며 이는 심판대에서 갈릴 것이다.
예배 중에 이러한 역사가 일어난다면 누구는 천국에 올라갈지라도 옆에 있던 누구는 남겨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람이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올바른 믿음으로 구원받았는지 여부(자신이 이단신앙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는 스스로 항상 점검해야 하며 많은 인간적인 논란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구원받은 자는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 믿음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만약 믿는 자의 겉모양을 가졌던 자가 그 모양을 잃었다고 해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던 자가 믿음을 잃어 그 구원이 취소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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