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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포타와토미족 출신의 식물학자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가 쓴 에세이다. 두툼한 페이지 가득 소수 토착 부족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그들이 대지에 대하는 태도, 토박이 지식과 과학, 자연과 인간의 호혜적 관계에 대해 고민해온 저자의 삶이 담겨있다. 딸들과의 옛 추억에 관한 부분을 읽을 땐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지만, 찢기고 부서진 자연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를 역설할 때면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인디언 여인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이지만 호혜성의 관계에 집중해서 책 이야기를 할까 한다. 아참! 그 전에 책 제목인 향모에 대해 궁금하실 분이 많을 것 같은데 향모는 식물의 이름이다. 원주민들 신화에 따르면 모든 식물 중에서 윙가슈크라고 하는 향모가 땅에서 가장 먼저 자랐다고 한다. 이들은 향모를 성스러운 풀로 여기며 우리가 댕기풀을 땋듯이 향모를 땋기도 하고 제의를 하면서 태우기도 한다.
향모 (Sweetgrass) 로빈 월 키머러
이 책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자연과 인간의 호혜성이다. 쉽게 말해 서로 주고받는다는 말이다. 조금 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럼 뭘 주고받는다는 말일까? 자연이나 대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생각하기가 어렵지 않다.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물, 공기, 식물, 동물 등 자연의 선물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자연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감사다. 감사는 인간만이 가지는 특별한 능력이다. 선물로써 받은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사랑과 존경을 담아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는 자연과의 감정적 유대관계를 강화시킨다. 여러 부족이 모인 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의 감사 연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의 학교에서는 한 주를 국기에 대한 맹세 대신 감사 연설로 시작한다. 대상은 자연의 모든 것이다. 어머니 대지, 물, 물고기, 작물, 약초, 나무, 동물, 새, 바람, 우레, 해, 달, 별, 조물주 등. 다음은 책에 언급된 물에 대한 감사 연설이다.
우리의 목마름을 달래고 모든 존재에게 힘과 원기를 주신 세상의 모든 물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는 물의 힘이 폭포와 비, 안개와 개울, 강과 바다, 눈과 얼음의 형태로 나타남을 압니다. 우리는 물이 아직 여기에 있으며 나머지 창조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물이 우리의 생명에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물에게 인사와 감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p165
하지만 감사 말고도 찾아보면 우리가 답할 수 있는 선물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알아내는 것이 교육이 목적이라고까지 저자는 말한다. 한가지는 자연이 주는 선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덜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는 재미있는 사례가 나온다. 바구니 장인들의 요청으로 저자의 학교 대학원생 로리는 수확 방법과 향모 개체의 감소와의 관련성에 대해 연구한다. 그녀는 향모를 수확하는 방법(밑동을 하나씩 뜯는지, 다발째 쥐어뜯는지)이 향모 생장에 차이를 줄 거라는 가정을 세운다. 교수위원회의 무시와 냉소 속에서 진행된 이 연구는 놀라운 결론을 도출한다. 수확 방식은 향모의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수확한 곳의 향모는 다시 잘 자라나 전보다 더 번성했고, 오히려 수확하지 않은 곳의 향모는 개체 수가 줄었다. 이는 식물 수확이 당연히 개체군에 피해를 입힐 거라는 위원회의 확신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었다. 향모의 감소는 과다 수확 때문이 아니라 과소 수확 때문이었던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발생시킨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식물의 수확이 어떤 식으로든 보상 생장을 자극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조상들이 들려준 이야기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식물을 섬기며 이용하면 우리 곁에 머물며 번성할 테지만, 무시하면 떠날 것이란다." 물론 다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절대로 절반 이상 취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식물이 다시 나눠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늘 그랬던 것처럼 취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호혜적 관계를 무시한 인간은 상품으로써 자연을 취하기만 하여 많은 부분 오염시켰다. 파괴되고 착취된 생태를 복원하고 보살피는 돌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연에 대한 호혜적 행위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가진 존재의 경계를 넘는 전통 지식, 즉 토박이 지식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한다. 책에서는 북아메리카의 오논다가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880년대에 흰연어로 명성이 높았던 오논다가호는 주변 공장의 지속적인 폐기물 탓에 수은의 농도가 높아져 급기야 1970년 고기잡이가 금지되기에 이른다. 많은 이들이 폐기물의 처리와 땅의 복원을 위해 애썼지만, 호수 정화의 책임이 있는 제조업체들의 수습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게다가 2010년 연방법원은 토착민의 오논다가호 소유권에 대한 소송을 기각했다. 하지만 노력을 멈출 순 없다. 저자는 말한다. 환경에 대한 절망은 오논다가로 바닥의 메틸수은 못지않은 독성이 있다고. 절망은 우리를 마비시키고 의욕을 앗아간다. 복원은 효과적인 절망의 해독제고 식물은 훌륭한 복원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식물을 통한 호수의 복원은 조금씩 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인간만이 가진 언어라는 선물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글쓰기의 행위는 우리가 생명 세계와 나누는 중요한 호혜적 행위라고 덧붙인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눈앞의 공간은 유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저자가 안내하는 향모가 자라는 들판, 참취와 미역취가 뒤섞인 공간, 단풍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밤새 끓이는 장면, 습지에서 제자들과 부들을 채취하는 모습 등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기회가 된다면 저자가 내미는 하늘거리는 향모 한 다발을 당신도 손을 내밀어 같이 땋기를 바란다.
참취와 미역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