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사냥꾼, 목동, 비평가>

 

 

 이 책은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앞으로 추구할 방향과 그에 따른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철학적으로 때론 경제, 환경,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기술한 책이다. 무리인 줄 알지만 세 문장으로 간추려 보겠다.

 

1. 기술의 혁신, 자동화, 디지털화는 인간의 생업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2. 그리하여 미래의 우리는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또는 될 수 있을 것이다).

3. 이를 위해서는 기본 소득의 도입, 개인 정보의 자기 결정권 보장, 디지털 기간 사업의 제공 등이 필요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일단 저자는 디지털화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아니 낙관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대부분 학자들이 미래의 노동환경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수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고 어떤 직업들은 유지되고 또 어떤 직업들은 새로 생겨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이 생업 노동 시간의 단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먹고 살기 위한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러한 환경이 인간적인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고 본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시간은 재편된다. 직업인으로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한다. (중의적인 의미로 사냥은 생업 노동을, 목동은 주변인들의 돌봄을, 비평은 창의적인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충만함이란 생업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에 스스로 취향과 자율성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형상화할 때 이룰 수 있다. 지루하고 고되고 단조로운 생업 노동은 결코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쯤에서 태클을 걸고 싶다. 노동의 본질 및 의미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폴 라파르그나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여 생업 노동의 의미를 축소하고 비판하지만, 마르크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며 노동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아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둘 다 그럴듯하다. 관련된 책을 좀 더 읽고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오스카 와일드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리차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토마스 바셰크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저자가 노동에 대해 합의해야 할 가치 외에 현실적으로 국가나 정치에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조건인 기본 소득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봐야겠다. 현재 여러 정치인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핫한 아이템이 기본 소득인 만큼 이참에 공부하는 것도 좋을듯싶다. 참고로 책에서는 기본 소득의 재원을 금융 거래에 의한 과세로 확보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최소 1,500유로 이상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콤 토리 <왜 우리에겐 기본소득이 필요할까>

필리프 판 파레이스 <21세기 기본소득>

김종철 <기본소득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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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1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잊지말아야하는 것은, 자동화, 디지털화는 노동시장만 변화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의 여가활동을 포함한 전반적인 삶에 모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단순히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노동시간만 단축되었다고 바라보는 것은 단편적인 생각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산술적인 잉여시간이 남는다고 해도, 그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선택과 결정도 한 흐름을 따르게 될 거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 그냥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봤어요.

noomy 2021-02-18 17:4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는 주장인데 어쨌든 생각할 거리를 줘서 괜찮게 읽었어요~ 노동에 대한 생각도 좀 더 정리할수도 있었고요. 관련 책을 많이 읽어봐야 할듯요. 늘 애정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브로콜리 너마저 - 1집 보편적인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 / 루오바뮤직(Luova Music)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풋풋한 덕원의 기타와

나른한 계피의 목소리가 좋았다.

아니,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마치 오래전부터 헤어짐을 준비한 듯

이쯤 되면 남자는 본능적으로 안다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을 ^^;; 

그런 목소리를 가졌다 계피는


각설하고 다 같이 차를 마시자~ 봄날을 위해~ 



브로콜리 너마저 <유자차>


바닥에 남은 차가운 껍질에 뜨거운 눈물을 부어

그만큼 달콤하지는 않지만 울지 않을 수 있어

온기가 필요했잖아 이제는 지친 마음을 쉬어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우리 좋았던 날들의 기억을 설탕에 켜켜이 묻어
언젠가 문득 너무 힘들 때면 꺼내어 볼 수 있게
그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이 차를 다 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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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타인의 환대로 사회 안에서 장소를 갖게 되고 사람이 된다.

2. 사람이 되면 환대의 권리(환대할 권리, 환대받을 권리)를 가진다.

3. 절대적 환대(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는 사회가 구성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4. 사람의 지위가 박탈됨은(사회에서 배제되려면) 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단 한 명이라도 환대한다면 성원권은 유지될 수 있다.


 다음은 낙태의 합법화에 대한 본문 내용의 일부분이다.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낙태의 합법화는 이 원리를-위반하기는커녕-다시 한번 확인한다.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때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259쪽


 


 태아가 사람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절대적 환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기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의 환대와 관계없이 엄마만이 환대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앞서 사람이 가지는 환대의 권리에는 어떤 차등이나 차별이 없었는데 태아의 경우에만 예외적인 경우를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타적인 환대의 독점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독점된 환대는 왜곡되어 태아나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간주할 수 있다. 너를 환대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은 곧 내가 없으면 너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나아가 자녀와 동반 자살하는 부모의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태아를 환대할 권리가 엄마에게만 있지 않다면 환대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생긴 태아의 경우 엄마는 이 태아를 환대하지 않지만, 사회(법적으로 낙태가 불가한 경우)나 타인은 환대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이 발생할 경우 환대의 결정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대에도 우선권이 있는가? 절대적 환대의 원리(장소의 제공 여부에 관계없이)에 의하면 엄마는 태아에 대한 환대를 거부할 수 없다. 이 또한 부당해 보인다.

 

 이런 모순의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환대를 인정한 데 있다. 사람이 아닌 어떤 이가 당당히 환대를 요구할 수 있게끔, 그래서 사회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당위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가정을 끌어들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사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어떠한 조건도 없는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또한 태아와 같은 예외를 하나둘 인정하다 보면 결국 절대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몇 해 전 예멘 난민이 제주도로 몰렸을 때 여론은 어떠했는가? 무지와 두려움으로 잉태된 수많은 뉴스들과 정보들에 우리는 쉽게 휩싸일 수밖에 없다(거기에는 사실도 거짓도 섞여 뭐가 진실인지 알기 힘들다. 또한 지나친 팩트에 대한 집착도 망상과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환대의 충돌이 발생한다. 어느 쪽이 소수고 어느 쪽이 다수든 환대의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절대적이 아닌, 때에 따라서 누군가는 배제될 수 밖에 없는 상대적인 환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환대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환대의 조율에 어떤 합의된 원칙이 있느냐다. 당연히 다수에 의한 폭력적인 횡포도, 입김이 강한 소수에 의한 그들만의 원칙도 거부해야 한다. 좀 더 인류 보편적인, 나아가 좀 더 생명 보편적인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환대를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회피하거나 두려워 하면 안된다(7장에서 저자가 비판한 피터 싱어와 존 해리스의 여러 공리주의적 주장도 이러한 환대의 조율에 어떤 원칙을 세우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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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극락왕생 1~2 - 전2권
고사리박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불교의 세계관을 빌려온 만화. 걍 재미있다. 3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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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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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남아 있는 읽고 쓰는 종족들을 위한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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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09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고....저는 오랜만에 보는 단어네요. 그런데. 단어 왠지 귀엽네요 ㅎ

noomy 2021-02-09 11:43   좋아요 0 | URL
너무 예스러운 단어죠? ^^;; 저는 이 단어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