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생뚱맞은 소리인가? 삶과 생활이라니? 같은 얘기 아닌가? 사전을 찾아봐도 별다른 차이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찬찬히 두 단어를 음미해보면 삶이나 생활을 바라보는 주체의 태도나 관점에 미묘한 차이가 보인다. 삶이란 단어에는 세계나 운명에 대한 수용과 인정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반면 생활이란 단어에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생활이란 단어에는 능동적, 계획적, 적극적, 이성적 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지고 이 세계를 모험하는 것이 생활이라면 우리의 의지나 의도가 아닌 부분들까지 수용하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작가 푸시킨은 생활이 아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고 노래했다.
<더 랍스터>로 유명해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킬링 디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다. 외과 의사인 스티븐에게 마틴이라는 한 소년이 다가온다. 둘은 여러 차례 만나면서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틴의 행동은 점점 더 집착으로 변한다. 사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잘해주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다. 과거 스티븐의 의료과실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티븐이 마틴과 거리를 두는 와중 갑자기 스티븐의 아들인 밥이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수많은 검사와 최고의 전문가들의 진료에도 병의 원인조차 알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현재의 나의 삶은 과거의 생각과 행위의 연쇄반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나의 영혼과 육체, 사고와 삶의 궤적은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인과율의 실체는 없다.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설명해 보려고 하고 또 어느 정도 설명하기는 하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수많은 과학적인 검사와 최고의 전문가로 상징되는 인과율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간다. 나아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신화와 믿음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 병원으로 찾아온 마틴은 스티븐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밥이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것은 스티븐이 마틴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며 균형을 맞추려면 스티븐의 가족 중 누군가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가 죽을지는 스티븐이 결정해야 하며 결정하지 않는다면 가족 모두가 죽을 거라고 덧붙인다. 당연히 스티븐은 이런 황당무계한 마틴의 말을 무시한다. 하지만 밥의 증상은 더 심해지고 심지어 합창단 연습 중 딸인 킴까지 쓰러지게 된다. 절망에 빠진 스티븐과 그의 아내 안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안나는 과거에 스티븐의 부주의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의 잘못으로 본인과 자식이 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따지는 안나에게 마틴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공평한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의 생각 중에 가장 정의에 가까운 일이라고 덤덤히 말한다.
안나의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물음이다. 하지만 세계와 삶은 우연의 연속이며 인간은 항상 이해할 수 없이 닥쳐오는 우연에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려고 하고 때론 희생양을 만들어 퍼즐을 맞추기도 한다. 생활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영화에서 두 아이의 태도는 어른들과 좀 다르다. 관조하는 태도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도 서서히 생활을 살려고 발버둥 치던 과거에서 벗어나 삶을 살려는 태도를 보인다. 충격적이지만 너무 작위적이어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영화의 후반부는 변화된 부부의 삶의 태도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마틴의 모습에서 언제든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삶의 굴곡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생활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한다.
<2018년8월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