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Killing Of A Sacred Deer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한글무자막)(Blu-ray)
LIONSGATE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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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생뚱맞은 소리인가? 삶과 생활이라니? 같은 얘기 아닌가? 사전을 찾아봐도 별다른 차이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찬찬히 두 단어를 음미해보면 삶이나 생활을 바라보는 주체의 태도나 관점에 미묘한 차이가 보인다. 삶이란 단어에는 세계나 운명에 대한 수용과 인정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반면 생활이란 단어에는 그런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생활이란 단어에는 능동적, 계획적, 적극적, 이성적 이란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지고 이 세계를 모험하는 것이 생활이라면 우리의 의지나 의도가 아닌 부분들까지 수용하는 것이 삶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작가 푸시킨은 생활이 아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라고 노래했다.

<더 랍스터>로 유명해진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 <킬링 디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다. 줄거리는 이렇다. 외과 의사인 스티븐에게 마틴이라는 한 소년이 다가온다. 둘은 여러 차례 만나면서 서로의 집을 방문할 정도로 친해진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틴의 행동은 점점 더 집착으로 변한다. 사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잘해주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다. 과거 스티븐의 의료과실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티븐이 마틴과 거리를 두는 와중 갑자기 스티븐의 아들인 밥이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수많은 검사와 최고의 전문가들의 진료에도 병의 원인조차 알 수 없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는 필연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현재의 나의 삶은 과거의 생각과 행위의 연쇄반응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나의 영혼과 육체, 사고와 삶의 궤적은 과거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인과율의 실체는 없다.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이 세계는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설명해 보려고 하고 또 어느 정도 설명하기는 하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다. 영화에서 표현하는 수많은 과학적인 검사와 최고의 전문가로 상징되는 인과율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간다. 나아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는 신화와 믿음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 병원으로 찾아온 마틴은 스티븐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밥이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것은 스티븐이 마틴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며 균형을 맞추려면 스티븐의 가족 중 누군가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가 죽을지는 스티븐이 결정해야 하며 결정하지 않는다면 가족 모두가 죽을 거라고 덧붙인다. 당연히 스티븐은 이런 황당무계한 마틴의 말을 무시한다. 하지만 밥의 증상은 더 심해지고 심지어 합창단 연습 중 딸인 킴까지 쓰러지게 된다. 절망에 빠진 스티븐과 그의 아내 안나.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안나는 과거에 스티븐의 부주의로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의 잘못으로 본인과 자식이 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따지는 안나에게 마틴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공평한지는 모르겠으나 본인의 생각 중에 가장 정의에 가까운 일이라고 덤덤히 말한다.

안나의 질문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물음이다. 하지만 세계와 삶은 우연의 연속이며 인간은 항상 이해할 수 없이 닥쳐오는 우연에 좌절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려고 하고 때론 희생양을 만들어 퍼즐을 맞추기도 한다. 생활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반면 영화에서 두 아이의 태도는 어른들과 좀 다르다. 관조하는 태도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도 서서히 생활을 살려고 발버둥 치던 과거에서 벗어나 삶을 살려는 태도를 보인다. 충격적이지만 너무 작위적이어서 약간은 우스꽝스럽기도 했던 영화의 후반부는 변화된 부부의 삶의 태도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의 마틴의 모습에서 언제든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삶의 굴곡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생활이 아닌 삶을 살아야 한다.


<2018년8월8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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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 익스트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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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에 개봉한 영화 <멜랑콜리아>는 한 자매와 지구 종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자매를 중심으로 크게 두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동생 저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주를 이룬다. 시끌벅적한 결혼식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각자의 가치관과 욕망에 따라 스스럼없이 행동한다. 그들과 저스틴은 물과 기름처럼 전혀 섞이지 않는다. 이어 지구를 향해 접근해오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과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가 영화의 후반부를 차지한다. 여기서도 저스틴과 클레어 부부의 대비되는 행동은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현실인 듯 현실 아닌 현실 같은(?) 기묘하고 환상적인 장면과 작품 전체에 흐르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은 영화의 느낌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든다. 또한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쉬지 않고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은 끊임없는 존재의 불안을 나타내는 듯하다. 생각나는 몇 가지에 관해 두서 없이 적어 보았다.

1. 바그너와 쇼펜하우어
 영화를 보고 가장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음악이 주는 강렬함이다. 이 영화에서 절반 이상의 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단 한 곡의 배경 음악은, 고대 켈트족의 전설을 바탕으로 만든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이다. 이는 사랑의 묘약으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된 한 남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바그너 개인적인 경험과 고대 전설, 특히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이 주는 분위기도 영화와 무척 잘 어울리지만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바그너처럼 쇼펜하우어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세상 모든 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즉 생명을 추동하는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에너지이다. 이것은 욕망이나 욕구 등을 비롯해 식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 중력 따위의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힘을 뜻하며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럼 표상이란 무엇인가? 표상이란 이러한 의지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한다. 세계란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의지 내지 충동이 표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2. 저스틴과 결혼식
 인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생의 의지'이다.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생의 의지는 세상을 이루는 근거가 되며 인간의 행동은 의지가 객관화된 맹목적인 몸짓 일 뿐이다. 생물계에서 생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표현된 것이 바로 생식 충동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사랑은 종족보존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연(의지)의 기만 수단이며, 결혼 또한 이것을 위한 체계화된 사회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초반에 길게 나오는 결혼식 장면은 생의 의지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기 위함이다.
   
 조카가 늘 Steelbreaker aunt라고 부르는 저스틴은 의지의 초월을 열망하는 존재이다. (Steel은 강철같은 의지(?)로 봐도 되지 않을까?) 따라서 결혼식에서 충실한 의지의 꼭두각시인 사람들과 그녀는 도무지 어울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해 저스틴의 돌발적인 행동은 생의 의지를 부정하는 광기이며 종국에 그녀는 의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렇다면 결국 죽음뿐인가? 하지만 죽음은 한 개체의 소멸일 뿐, 의지 자체는 남기 때문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의지의 초월을 위해서는 완전한 세계의 소멸이 필요하다.

3. 클레어
 극중 클레어와 그의 남편은 통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아주 보통의 존재이며 충실한 의지의 개체이다. 그런데 행성과 지구의 충돌이 가까워지면서 의지의 소멸을 직감하듯 클레어의 불안감은 점점 커진다.  클레어의 남편은 이성과 합리주의의 도구를 가지고 현상을 분석한다. 허나 그러한 도구들은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없으며 희미한 위안만을 줄 뿐이다. 믿고 있던 세계관의 붕괴는 존재에 균열이 생기게 하고 그 기반마저 뒤흔들어 결국 남편은 자살하고 만다. 개체는 소멸되었지만 그럼에도 의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반면에 저스틴은 날이 갈수록 심리적 안정을 찾아간다. 고통스러운 의지의 삶을 끝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남은 날을 보내며 정말에 빠진 클레어를 일으키고 어린 조카와 함께 마법의 동굴을 만든다. 그렇게 결국 종말을 맞이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울하지 않다.  
 

<2018년6월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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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어스
마이크 카힐 감독, 브리트 말링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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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다. 늘 지난 일을 후회하며 살아간다. 과거에 내가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또는 했더라면 어땠을까? 대개는 전자에 대한 후회가 많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공상에 빠지다가 금세 잊고 다시 일상에 매몰되곤 한다. 하지만 때로는 쉽사리 잊기 힘든 기억들도 있는 법이다.

 주인공 로라는 과거에 용서받기 힘든 일을 저질렀고 그 죄책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법적인 처벌은 받았지만 인간적인 용서를 받은 것은 아니다. 피해자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죄책감이란 매 순간 소화되지 못한 삶이 겹겹이 쌓이고 뭉쳐져 한순간 울컥해서 토해내는 구토 같은, 좁은 우주선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리는 작은 소음 같은 그런 것이다. 눈과 귀를 닫아도 쉬이 떨쳐내기 힘들다. 예컨대 극중 로라의 동료는 사방에서 보이는 자기 모습(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두 눈과 귀를 멀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누가 절망에 빠진 나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나의 죄로 고통받는 타인? 물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것이 기본 전제임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렵게 받은 용서만으로 나 자신이 완전한 위로에 이르지는 못한다. 타인의 용서는 위대하지만 외부의 시선이다. 경우에 따라서 그런 대상이 되는 타인의 경계가 희미한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 '리'는 과연 누구한테 용서를 구해야 하겠는가? 따라서 내가 나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러한 용서와 위로를 표현하기 위해 내면의 자아를 외부로 형상화 시킨 것이 제2의 지구이다.

 우여곡절 끝에 존 버로스는 로라 대신 제2의 지구에 가게 되고 4개월 뒤 로라는 제2의 지구에서 온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 내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영화 초반에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 로라가 무언가에 홀린 듯 창밖 하늘 위 파란색 별, 즉 제2의 지구를 본 순간 제1의 지구와 제2의 지구의 동기화는 깨지게 된다. 아마 제2의 지구에서의 로라는 가까스로 사고를 피할 수 있었으리라. 이후 4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로라는 운명처럼 제1의 지구 여행 프로젝트에 응모했을 것이다.(그녀의 우주에 대한 사랑은 사고가 나기 전부터 지대했다) 아니면 제2의 지구에 도착한 존 버로스의 얘기를 듣고 참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긴 이야기를 들은 후 결심했을 것이다. 제1의 지구에 있는 나를 용서하고 위로하기 위해.

 어나더 어스는 SF를 가장한(?) 용서와 치유에 관한 영화이다. 그래서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오히려 한없는 위로가 된다.


<2018년5월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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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살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후쿠야마 마사하루 외 출연 / 인조인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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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세 번째 살인'을 보고 쓴 리뷰입니다. 몇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가 받은 느낌을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1. 텅 빈 그릇과 장님 코끼리 만지기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구절에 모두 담겨 있다. 빈 그릇이란 말은 먼저 30여 년 전 미스미의 첫 살인 사건에서 그를 체포한 옛 형사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당시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취조 때마다 말을 바꾸고 개인적인 원한이나 증오가 없어 보였던 그를 회상하며 노 형사는 미스미가 마치 '텅 빈 그릇' 같았다고 말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도 그릇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접견실 장면에서 시게모리는 미스미에게 "그럼 당신은 단순한 그릇이라고?"라며 묘한 표정으로 이 말을 내뱉는다.

 텅 빈 그릇은 실존적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어떤 것이 만들어진 목적에 부합하게 존재하는 것이 본질이라면 정해진 목적 없이 그냥 존재하는 것이 실존이다. 사물은 본질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타기 위해, 연필은 쓰기 위해 존재한다. 목적이 없는 사물은 없다. 하지만 인간은 결정된 목적 없이 실존으로 존재한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라며 실존적 존재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방식을 자유로이 선택하게끔 운명 지어졌다. 빈 그릇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 살인을 저지르고 죄책감 없이 감형을 위해서 라면 무엇이든 시키는 데로 하는 사이코패스를 담을 수도 있고, 말 못 할 아픔을 간직한 사키에 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아버지 같은 모습을 담을 수도 있으며, 부조리한 세상이나 법조계를 향한 분노를 담을 수도 있다. 이 모든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미스미라는 실존적 존재이다.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것은 어떤 것이 담긴 그릇을 본 순간 그것이 곧 타인을 인식하는 전부라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영화에서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코끼리를 처음 경험하는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은 자기가 만지는 것이 곧 코끼리의 진짜 모습이라고 서로 다투게 된다는 이야기다. 시게모리는 살인 사건을 조사하면서 점점 미스미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키에가 담긴 그릇에 깊이 빠져들고 마치 그것이 전부 인양 여긴다. 자신이 만지는 코끼리가 진짜 코끼리의 모습일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그러한 믿음은 일순간 산산조각 나게 되고 시게모리는 혼란에 빠진다. 

미스미는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가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의미로 시게모리의 아버지도 살인자는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된다고 했다. 만약 악인이라는 본질로 존재하는 인간이 있다면 미스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아서는 미스미를 붙잡아 세운 시게모리의 동료는 그런 사람은 없다며 일갈한다.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을 본다면 말이다. 


  2. 세 번째 살인

 영화에서 미스미가 저지른 살인은 30여 년 전 살인, 지금의 살인 두 번뿐이다. 나머지 세 번째 살인이란 본인에 대한 살인, 즉 죽기로 결심하여 자신에게 내린 심판, 판결을 의미한다. 사키에의 증언이면 감형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미스미는 돌변한다. 법정에서 지금까지의 증언을 뒤엎고 자신에게 불리한 말들을 쏟아낸다. 이전에 미스미는 본인과 가족들의 삶과 운명이 부당하게 누군가에 의해 심판당했다고 말했다. 타인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심판자를 늘 동경했던 그가 이번에는 자신을 심판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 심판은 사키에와는 아무 관련이 없으나 시게모리는 사키에에 대한 배려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확신한다. 

 피해자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피해자는 시게모리로 대표되는 사법제도에 의해서도 살인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 사법 제도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형사소송은 피해자 중심이 아니라 검사에 의해 지목되는 가해자 중심의 제도이다. 검사는 가해자의 범죄 혐의를 입증하고 변호사는 의뢰인의 무죄 혹은 감형을 위해 노력한다. 극 중 대사처럼 감형밖에 모르는 시게모리 같은 변호사 때문에 범인은 자신의 죄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방해받을지도 모른다. 이는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살인이 될 수 있다.

3. 마지막 접견
 
 영화의 압권은 마지막 접견 장면이다. 특히 두 사람의 얼굴이 겹칠 듯 말 듯 교묘히 편집된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다가가다 멀어지고 또 다가가다 멀어지는 모습은 마치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인식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이해, 그것은 결코 다다를 수 없지 않을까? 닿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지 모른다. 채사장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라는 책에서 과연 우리는 외부의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가라며 의심했다.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진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2018년3월30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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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프라이드
매튜 워처스 감독, 이멜다 스턴튼 외 출연 / 아트서비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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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프라이드는 1984년 영국에서 일어난 광부 노조의 파업과 그들을 지지한 레즈비언, 게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연민과 공감에서 시작된 지지는 다름에 대한 거부감을 녹이고 더 큰 연대의 힘을 발휘하게 된다.

얼마 전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한 진보 인사가 동성애에 대해 "동성애를 좋아 하지 않고 동성혼을 반대하지만,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은 반대한다"라고 했다.

흔히들 이렇게 얘기한다. 네가 동성애를 할 자유는 인정해. 또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는 것은 잘못 된거야. 반면에 나는 너희들을 싫어할 자유와 동성혼 합법화에 대해 반대할 자유가 있어 안그래?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간섭 해서는 안돼. 그 이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거나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계몽적이고 폭력적이야.

맞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에 관한 중요한 원칙 한 가지를 알 수 있다. 나의 자유는 타인에 의해 제한 되거나 간섭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존 롤즈는 정의의 제 1원칙에서 "각자는 모든 사람의 유사한 자유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각자는 모든 사람의 자유체계와 양립할수 있는" 에 해당하는 것이 앞서 얘기한 "서로 간섭 받지 않는 양립 가능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앞선 발언에서 간과한 자유의 중요한 원칙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다. "유사한 자유체계" 또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전체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가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각자는 평등한 자유가 보장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성소수자들이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와 비교해서 평등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혼인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서 차별 받아서는 안된다고 얘기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우리 각자는 타인과 양립가능한 최대한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려야 하는가? 존 롤즈의 위대한 아이디어를 하나 더 빌려보자.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둘다 그럴듯한 근거들이 있으며 어느 한쪽만 맞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획득된 형질이건 후천적 영향이건 중요한 것은 누구나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 속에서 어느 누가 사회 계약의 내용 안에 자유의 제약 및 차별을 둘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해당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각자 생각은 다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고 약자나 소수자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에 좀 더 관심을 갖는 것이 진보의 가치라면 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나 실제 1984년 영국에서 보여준 다름에서 기반한 연대의 모습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7년5월4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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