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지적 거인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장편 소설. 성전 기사단, 헤르메스 주의(고대의 영적, 철학적, 종교적 믿음), 연금술, 주술, 오컬트, 카발라(유대교 신비주의) 등과 관련된 압도적인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희미하게 주제 의식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중세 시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학자와 철학자들은 어떤 시도를 했을까?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할까? 아니면 믿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까?
중세를 연 대표적인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알기 위해서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시도한 신(진리)의 증명은 ‘조명설’로 이해된다. 우리는 먼저 믿음을 통해 신의 무한한 빛을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한 이성의 눈으로 역시 신의 피조물인 대상을 비춰볼 때 진리를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안셀무스(1033~1109) 또한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거기에 맞춰 신의 존재론적 증명을 했다. 요지는 신은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려면 ‘존재’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가 불가능하다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믿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 증명은 ‘부동의 원동자’로 설명된다.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모든 운동은 원인이 된 선행 운동이 있다. 이를 무한히 소급하다 보면 최초의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신이라 불렀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음모론자 역시 앞서 말한 두 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그들은 맨 처음 미약한 증거들을 모아 하나의 작은 이론을 만든다. 마치 믿기 위해 알려고 노력하듯이. 점점 살이 붙은 이론은 손쓸 수 없을 정도의 거대 이론이 되고 이제는 이 이론에 대한 믿음이 이해를 위한 노력을 넘어서게 된다. 이제부터 나오는 모든 증거는 이론의 살이 되고 반론들은 무참히 버려지거나 왜곡된다. 걷잡을 수 없는 이론의 홍수에 무참히 휩쓸리고 만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를 적나라하게 잘 보여준다.
이론은 말 그대로 이론이다. 실재나 진리가 아니다. 무한히 흩어져 있는 재료(개념)들 중 우리의 욕구에 의해 취한 것을 가지고 요리한 것이 이론이다. 흔히 ‘사실 있는 그대로’나 ‘객관적’이라는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 하지만 각자 욕망에 의해 취한 것을 실재한다고 믿는 인간들 사이에 사실이나 객관이라는 것은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움베르트 에코는 이러한 맹목적인 믿음에 대한 경고와 모든 가설과 이론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닐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중간에 살짝 지루하다는 점?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두 권 정도 줄였으면 가독성이 훨씬 좋을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