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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 일 년 만에 글을 쓴다. 혹 그동안 엄청나게 바빴다거나 신변에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아 늘 읽었지만, 글은 하루 이틀 안 쓰다 보니 내성(?)이 생겨 이 지경까지 왔다. 한마디로 귀찮아서 안 썼다는 말이지만 사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긴 하다.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는 딜레마다. 아니 글쓰기를 하는 순간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 글은 자아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낸다.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적든, 어떤 사안에 대한 생각이나 주장을 담든 그 글은 나를 선명히 부각시킨다. 본 것, 들은 것, 느끼고 생각한 것, 행위를 한 것 등 나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경험한 모든 일을 풀어쓰는 것이 글쓰기다. 이런 작업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하고, 자아감에 더 도취해 살아간다. 때로는 거기서 어떤 위로를 얻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존재의 이유를 구하거나 구원까지 얻기도 한다. 사실 내가 원하는 삶은 이런 것과는 좀 거리가 있다. 쉽게 설명하긴 어렵지만 반대로 자아를 흐릿하게 하여 진정으로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이 없음을 증득하고 싶다. 그래서 글쓰기를 딜레마라고 한 것이다.


 거창하고 쓸데없는 변명을 길게도 썼지만, 거짓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아를 흐리게 하는 글쓰기도 있을까? 글쎄, 계속 고민 중이다.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연기의 관점에서 글쓰기를 바라보면 또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어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에 또 그냥 그렇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무슨 개소리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틈틈이 글을 쓰면서 고민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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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같이 2주일마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린다. 오래전부터 해온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둘 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인데 취향은 정 반대다. 사진에서 보이는 책 등 하단 숫자 8은 한국 십진분류법에 의하면 문학으로 대부분 아내가 고른 책이다. 나도 문학을 싫어하진 않지만 가져온 책을 보면 주로 비문학이 많다. (학창시절엔 문학소년 이었...)

1.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이 무슨 그로테스크한 제목이란 말인가! 고양이와 결혼한 쥐라니... 혹시 나를 두고 하는 소리? 농담입니다... 그림책인데 아내가 고른 책이다. 아내는 그림책 공부를 꽤 오랫동안 했고 관심도 많다. 무식한 얘기지만 그림책은 유치하고 애들만 보는 거로 생각했는데 옆에서 권해주는 걸 하나둘 보다보니 생각보다 재미있고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텐데 요즘은 가능한 읽으려고 노력한다.

2. <있는 그대로>
 위대한 영혼의 스승 스리 라마나 마하리시에 관한 책이다. 참자아를 깨닫기 위한 스승의 가르침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내가 고른 책인데 개인적으로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종교(특히 불교), 명상, 신비주의 등에 관한 책을 자주 빌리는 편인데 이런 책을 고르고 있으면 아내는 혀를 차며 안타까운 눈으로 보곤 한다(극현실주의자^^;). 한번은 기독교, 불교, 힌두교 관련 책을 동시에 보고 있는데 가지가지 한다며 한 가지만 고르라는 자상한 충고를 하기도 했다...

3.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네. 제가 빌린 겁니다. 글밥이 많아 보여서 패스하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 가게를 못 지나치듯...

4. <대치동>
 아내의 선택. 대치동에서 오랜 기간 논술강사로 일했던 저자가 쓴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지 대치동에 관한 이야기. 난 별 관심 없는데 이미 절반 이상 읽은 아내의 말에 의하면 상당히 재미있다는 귀띔. 돼지맘이란 용어를 처음 알았네요.

5. <활활발발> 
 Wife's pick. 글쓰기 모임을 통한 사람과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 활활발발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없는 단어다. 추측건데 글방에서 때로는 성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지만, 늘 '발발(생기있고 활기차다)"함을 잃지 말자는 말인듯하다. 시간 되면 읽어야지.

6. <헬프 미 시스터>
 아내는 황정은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책읽아웃> 애청자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책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는다. 이 책도 여기서 알게 된 것. 이서수 작가의 장편소설인데 플랫폼 노동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다 읽은 거 같은데 무척 재미있다는 평이다. 마침 전기가오리(서양철학 공부모임)에서 보내준 배달 플랫폼 노동에 대한 자료가 있어 건네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사실 나도 아직 안 읽었다. 다 읽으면 짧게 요약해 달라 해야지.

7. <나의 덴마크 선생님> 
 지리산 대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저자가 덴마크 세계시민학교에 들어가서 배운 인생 공부를 담은 책. 내가 고른 책인데 거의 다 읽었다. 이전부터 덴마크 교육시스템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찾아 읽었는데 이 책도 괜찮았다. 

8. <더 셜리 클럽>
9.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둘 다 박서련 작가의 책인데 역시나 <책읽아웃>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박서련 작가는 카드캡터 체리나 세일러문을 좋아했던 만화광이었는데 황정은 작가가 그 보다 더한 덕후스러움을 보이자 이내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근데 웃긴건 난 카드캡터 체리를 한 편도 본 적이 없는데 주제가는 무척 좋아했었다. 노래가 좋아~

10.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 
 이것도 역시 <책읽아웃> 소개로 아내가 빌린 건데 나도 알고 있던 책이다. 배우 손수현과 뮤지션 신승은이 쓴 지속 가능을 위한 비거니즘 에세이. 비거니즘 또한 주된 관심사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시간이 허락하면 꼭 읽어 볼 예정.

마지막으로 추억을 소환해준 카드캡터 체리 주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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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6-04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제목만으로 이미 홍보 효과 100! 입니다^^ 바로 지역 도서관 소장 여부 검색하러 갑니다

noomy 2022-06-07 12:35   좋아요 1 | URL
찾으셨어요?^^ 전 며칠전에 읽었는데 와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보통 책이 아니네요. 페미니즘에 관한 내용인데 시덥잖은 책 10권보다 훨 좋네요.

얄라알라 2022-06-16 01:48   좋아요 0 | URL
noomy님 덕분에 가정폭력을 다룬 이 그림책 심각하게 잘 읽었습니다. 휴우....말씀그대로 굉장한 작품이네요

noomy 2022-06-16 14:47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보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얄라알라 2022-06-0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요^^ 상호대차 기다리고 있어요. ˝오후의 소묘˝라는 출판사 최근 기억에 담아두었는데 그 출판사더라고요

han22598 2022-06-17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이제 이해가 되네요. 누미님의 책 취향은 다양한 이유가...와이프였네요 ㅎㅎㅎ

noomy 2022-06-18 09:41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건 아니고 저만 영향을 받네요 ㅋㅋㅋ
 

 

 

로랑 셰페르 <퀀텀>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책이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에 관한 책인데 만화래, 게다가 썰렁하지만 한 번씩 웃게 되는 유머 코드까지. 상대성 이론에서는 구를 묘사하여 시간 속의 속도와 공간 속의 속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부분이 괜찮았다. 양자 역학 부문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특히 관찰에 의해 입자의 성질이 파동에서 입자로 바뀌는 부분이나 양자 얽힘(얽혀 있는 두 양자에서 하나의 양자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나머지 양자의 상태가 대칭적으로 결정되는 것), 시간의 흐름이나 인과의 방향이 역전되는 경우 등은 지금 글을 쓰면서도 신기하다. 이 모든 곳에서 '관찰'의 역할은 지대하다. 책에서도 '존재하는 유일한 것은 관찰된 입자'라든가, '너는 관찰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며 존재와 관찰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어라? 존재와 관찰이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철학사에서 영국 경험론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타불라 라사(빈 서판)로 유명한 존 로크, 회의주의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 귀납추리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 데이비드 흄,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까지.



 George Berkeley(1685~1753)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세 편의 대화>          

  


 이전 세대인 존 로크처럼 조지 버클리도 인간 지식의 주된 원천을 경험으로 꼽았다. 하지만 로크가 데카르트의 이원론(정신+물질)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버클리는 두 종류의 실체 중 하나만을 인정했다. 그는 정신적 실체만을 인정한 '비물질적 관념론'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세계는 정신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 유아론이라고도 한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이는 버클리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예를 들어 눈앞에 있는 컴퓨터는 나의 지각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방을 나가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각되지 않은 이 방의 모든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가? 설마? 이 대목에서 버클리는 데카르트처럼 신을 끌어들인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신이 이 방을 지각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물건은 안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약간 맥빠지는 결론일지 모르지만, 세계는 항상 신에게 지각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신의 실존을 지지하는 또 하나의 논증이다. 참고로 들뢰즈는 이러한 신의 위치에 타자를 대입한다. 그에 따르면 상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 인식의 유한성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관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무는 쓰러질 수 있을까? 있다! 

세계는 늘 신에 의해 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인식의 유한성은 신에 의해 보완된다.



 한때 나는 누가 뭐래도 유물론자였다. 의식이든 정신이든 물질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혼이니 신이니 하는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물질은 쪼개고 쪼개 현재 표준 모형에서 12개의 기본 입자와 보손(입자들 사이에서 힘을 매개하는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기본 입자는 부피가 없고 질량만 가지는 점 입자다. 그 외 대부분은 말 그대로 텅 빈 공간이다. (물론 형태를 가지거나 우리가 벽을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전자기력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게다가 그나마 있는 입자들도 미시적으로 볼 때 확률적으로 존재하다가 관찰이라는 행위를 하게 되면 위치가 정해진다니(파동함수의 붕괴)...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더 나가면 다소 황당하긴 하지만 '인류 원리'에서는 인류라는 의식적 존재가 없다면 우주도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양자 역학을 다른 분야와 섞어서 얘기하는 책들은 대단히 많다. 철학, 불교, 의식, 신비 등 여러 카테고리에서 양자 역학을 끌어들인다. 인간이 가지는 인식의 한계, 해석의 불확실성이 이런 결과를 낳았으리라. 너무 무리한 끼워 맞추기식 설명은 지양해야겠지만 다양한 해석을 열린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의식의 지평선이 조금이나마 확장될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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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23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페이퍼 너무 좋아요 ^^ 전 과학 좋아하는데, 고등학교때 물리 선생님이 너무 별로이셔서, 그 이후로 영 관심이 안가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과학과 철학을 연결짓는 개념들. (예전에도 많았겠지만) 요즘 무척이나 눈과 귀를 뜨게 만드는 것 같아요. 누미님이 올려주신 책들은 어려워 보이지만, 장바구니에 넣어둘게요 ^^

noomy 2021-02-23 12:11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대부분의 물리 선생님들은 그렇군요 ^^;; 저도 기본적으로 이과형 인간이에요. 과학을 엄청 좋아하죠. 그런데 어쩌다보니 철학도 좋아하게 됐어요 물론 입문서 수준이지만요 ㅋㅋ 요즘엔 문학 책도 많이 읽을려고 노력해요. 특히 알라딘에는 문학 고수들이 정말 많은거 같아요.

noomy 2021-02-23 12:12   좋아요 1 | URL
아~ 퀀텀 저 책은 진짜 강추에요. 만화라서 쉽고(?) 재미있어요^^

han22598 2021-02-25 07:47   좋아요 0 | URL
앗! 만화책이라면 바로 구입입니다. ㅎ (Thanks To 저 해본적 거의 없는데, 이 책 누미님에게 땡수투 합니다. 누미님에게 혜택이 있는거죠? 책 구입때 크레딧처럼 사용하는거겠죠?)

noomy 2021-02-25 13:49   좋아요 1 | URL
그런거 같아요. 적립금이 쌓이는듯. 저도 잘은 몰라요 받아본 적이 없어서요 ^^;; 감사합니다~

han22598 2021-03-23 22:04   좋아요 0 | URL
이 책 샀는데....누니님에게..적립금이 언제 들어가는 걸까요? ㅎㅎ 서로 처음이라..ㅋㅋ

noomy 2021-03-25 14:46   좋아요 0 | URL
오~! 적립금 받았어요 180원~ 감사합니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사냥꾼, 목동, 비평가>

 

 

 이 책은 독일의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앞으로 추구할 방향과 그에 따른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철학적으로 때론 경제, 환경,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기술한 책이다. 무리인 줄 알지만 세 문장으로 간추려 보겠다.

 

1. 기술의 혁신, 자동화, 디지털화는 인간의 생업 노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다.

2. 그리하여 미래의 우리는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또는 될 수 있을 것이다).

3. 이를 위해서는 기본 소득의 도입, 개인 정보의 자기 결정권 보장, 디지털 기간 사업의 제공 등이 필요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일단 저자는 디지털화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아니 낙관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대부분 학자들이 미래의 노동환경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는데 동의한다. 수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고 어떤 직업들은 유지되고 또 어떤 직업들은 새로 생겨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이 생업 노동 시간의 단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먹고 살기 위한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는 말이다. 이러한 환경이 인간적인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고 본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시간은 재편된다. 직업인으로 사냥꾼, 목동, 비평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아침에는 사냥을 하고, 낮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한다. (중의적인 의미로 사냥은 생업 노동을, 목동은 주변인들의 돌봄을, 비평은 창의적인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삶의 충만함이란 생업 노동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에 스스로 취향과 자율성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형상화할 때 이룰 수 있다. 지루하고 고되고 단조로운 생업 노동은 결코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이쯤에서 태클을 걸고 싶다. 노동의 본질 및 의미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폴 라파르그나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하여 생업 노동의 의미를 축소하고 비판하지만, 마르크스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며 노동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아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둘 다 그럴듯하다. 관련된 책을 좀 더 읽고 생각을 정리해 봐야겠다.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오스카 와일드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리차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토마스 바셰크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저자가 노동에 대해 합의해야 할 가치 외에 현실적으로 국가나 정치에 가장 강력히 요구하는 조건인 기본 소득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봐야겠다. 현재 여러 정치인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핫한 아이템이 기본 소득인 만큼 이참에 공부하는 것도 좋을듯싶다. 참고로 책에서는 기본 소득의 재원을 금융 거래에 의한 과세로 확보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 최소 1,500유로 이상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콤 토리 <왜 우리에겐 기본소득이 필요할까>

필리프 판 파레이스 <21세기 기본소득>

김종철 <기본소득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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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1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잊지말아야하는 것은, 자동화, 디지털화는 노동시장만 변화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의 여가활동을 포함한 전반적인 삶에 모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단순히 기술발전으로 인해서 노동시간만 단축되었다고 바라보는 것은 단편적인 생각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산술적인 잉여시간이 남는다고 해도, 그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선택과 결정도 한 흐름을 따르게 될 거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이 분야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 그냥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봤어요.

noomy 2021-02-18 17:4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보기에도 좀 무리가 있는 주장인데 어쨌든 생각할 거리를 줘서 괜찮게 읽었어요~ 노동에 대한 생각도 좀 더 정리할수도 있었고요. 관련 책을 많이 읽어봐야 할듯요. 늘 애정어린 댓글 감사합니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타인의 환대로 사회 안에서 장소를 갖게 되고 사람이 된다.

2. 사람이 되면 환대의 권리(환대할 권리, 환대받을 권리)를 가진다.

3. 절대적 환대(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는 사회가 구성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4. 사람의 지위가 박탈됨은(사회에서 배제되려면) 환대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다. 단 한 명이라도 환대한다면 성원권은 유지될 수 있다.


 다음은 낙태의 합법화에 대한 본문 내용의 일부분이다.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인간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낙태의 합법화는 이 원리를-위반하기는커녕-다시 한번 확인한다.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엄마뿐이기 때문에, 태아를 환대할 권리 역시 엄마에게만 있다. 사회가 엄마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아를 환대하기로 결정하고 엄마에게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셈이 된다. 즉 엄마의 사람 자격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절대적 환대의 원리를 일관성 있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태아가 아직 사회 바깥에 있으며, 태아를 사회 안으로 들여보내는 것은 엄마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말해야 한다.

-259쪽


 


 태아가 사람의 자격을 갖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절대적 환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태아에게 장소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뿐이기 때문에, 타인이나 사회의 환대와 관계없이 엄마만이 환대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앞서 사람이 가지는 환대의 권리에는 어떤 차등이나 차별이 없었는데 태아의 경우에만 예외적인 경우를 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타적인 환대의 독점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독점된 환대는 왜곡되어 태아나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간주할 수 있다. 너를 환대해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은 곧 내가 없으면 너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나아가 자녀와 동반 자살하는 부모의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태아를 환대할 권리가 엄마에게만 있지 않다면 환대의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생긴 태아의 경우 엄마는 이 태아를 환대하지 않지만, 사회(법적으로 낙태가 불가한 경우)나 타인은 환대할 수 있다. 이런 충돌이 발생할 경우 환대의 결정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대에도 우선권이 있는가? 절대적 환대의 원리(장소의 제공 여부에 관계없이)에 의하면 엄마는 태아에 대한 환대를 거부할 수 없다. 이 또한 부당해 보인다.

 

 이런 모순의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환대를 인정한 데 있다. 사람이 아닌 어떤 이가 당당히 환대를 요구할 수 있게끔, 그래서 사회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당위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가정을 끌어들인 결과가 아닌가 싶다. 사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어떠한 조건도 없는 절대적 환대는 불가능한 이상이다. 또한 태아와 같은 예외를 하나둘 인정하다 보면 결국 절대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몇 해 전 예멘 난민이 제주도로 몰렸을 때 여론은 어떠했는가? 무지와 두려움으로 잉태된 수많은 뉴스들과 정보들에 우리는 쉽게 휩싸일 수밖에 없다(거기에는 사실도 거짓도 섞여 뭐가 진실인지 알기 힘들다. 또한 지나친 팩트에 대한 집착도 망상과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환대의 충돌이 발생한다. 어느 쪽이 소수고 어느 쪽이 다수든 환대의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다. 절대적이 아닌, 때에 따라서 누군가는 배제될 수 밖에 없는 상대적인 환대 말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환대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배제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환대의 조율에 어떤 합의된 원칙이 있느냐다. 당연히 다수에 의한 폭력적인 횡포도, 입김이 강한 소수에 의한 그들만의 원칙도 거부해야 한다. 좀 더 인류 보편적인, 나아가 좀 더 생명 보편적인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우면서 환대를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회피하거나 두려워 하면 안된다(7장에서 저자가 비판한 피터 싱어와 존 해리스의 여러 공리주의적 주장도 이러한 환대의 조율에 어떤 원칙을 세우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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