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 - 두 시인이 한 예술가에게 보내는 편지
박연준.장석주 지음 / 난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연준 시인과 장석주 시인이

함께 길을 걸으며 서로의 삶을 나누고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2015)

책을 읽으며 서로를 마주보고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2017)

썼던 두 권의 산문집을 지나 이번 세 번째 산문집.

이미 세상을 떠난 열여덟 명의 예술가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이에게 쓴 편지이지만 사뭇 다른 두 시인의 편지.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도무지 죽지를 않는 사람들.

계속 태어나는 사람들.

새 예술가를 탄생하게 만드는 존재들."

박연준 시인과 장석주 시인이 예술가 18인에게 바치는 편지

계속 태어나는 당신에게



 


책은 앞표지와 뒤표지의 구분이 따로 없었습니다.

박연준 시인의 글과 장석주 시인의 글이 양쪽에서 독립적으로 시작되어 마치 서로 다른 두 책을 붙인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두 시인이 평생을 애정하고 존경해온 열여덟 명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에릭 사티, 프랑수아즈 사강, 바츨라프 니진스키, 김소월, 존 버거, 버지니아 울프, 빈센트 반 고흐, 알바 알토, 프란츠 카프카, 페르난두 페소아, 실비아 플라스, 권진규, 나혜석, 로맹 가리, 배호, 장국영,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박용래까지.

그들에게 자신의 내밀한 아픔과 외로움, 고독과 즐거움을 고백하는 두 시인의 편지는 읽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그 공간 속에 저도 함께하는 듯한 느낌을, 그리고 그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각자 다른 방에서 같은 이름을 부르던 시간은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취향도 생각도 열렬히 다른데

웬일인지 이 열여덟 명의 예술가 앞에서는 마음이 하나로 포개졌지요.

당신과 함께 그들을 추억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어요. - page 163, 박연준

'바츨라프 니진스키'에게 쓴 편지로부터 그를 알게 되었는데...

작은 키에 짧은 팔과 다리를 가졌지만 무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모습, 높이 비상하는 모습,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가 다시 도약할 땐 흡사 공처럼 힘차게 솟구쳐올라가는 그의 모습...

니진스키의 등장으로 발레리노는 발레리나를 돕는 역할에서 벗어나 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그.

하지만 발레단을 꾸려 유럽 순회 공연을 하던 당대 무용계의 권력자인 디아길레프와의 만남과 불화, '니진스키 발레단'을 창단해 유럽 무대에 선을 보이지만 실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스위스의 생모리츠로 피신......

이런 불행과 절망은 그의 삶을 속절없이 꺾인 꽃대처럼 쓰러뜨렸는데...

저는 당신을 느낍니다. 당신이 쓴 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당신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당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아내를 보며, 당신은 생각하지요. "그때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지만, 나를 느끼지는 못했던 것"이라고. 느낀다는 것은 이해보다 생각보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 앞선 것이었지요.

저는 당신의 춤을 보지 않고도 이미 압도당한 관객입니다. 당신을 느끼는 한 명의 사람입니다.

니진스키, 진짜 재능은 자신을 느끼는 거예요. 자기 안의 사랑을요! - from. 박연준

당신의 삶은 가난과 불운에 잠식당하고, 세기를 거칠게 윽박지르는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 걸쳐져 있지만 그런 재난이 무용에 대한 당신의 재능을 빼앗을 수는 없었어요. 마치 살 속에서 부러진 뼈가 튀어나오듯이 춤은 당신의 몸에서 붉은 동백꽃처럼 바깥으로 불거졌지요. 당신의 누이가 말했듯이 당신에게 무용은 신앙이요, 생명이요, 영혼이었지요. - from. 장석주

이 책과 결이 같았던 '존 버거'.

편지를 쓰는 동안 당신이 곁에 있다고 상상해봅니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서문에 당신이 이렇게 썼잖아요. "죽은 이들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건 여러분도 나만큼-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다면 망자들은 어떻게든 우리를 도와주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귀를 기울여야 하죠. 그렇지 않은가요? (겉으로야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죠.)" 단순히 '떠도는 영혼'으로서 죽은 이들을 말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아요. 당신이 제게 그렇듯 죽은 사람은 영영 사라진 사람이 아니죠. 종종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요. 그들이 우리를 돕죠. 그들과 때때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요. 저는 당신이 써놓은 이야기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합니다.

...

존, 당신의 말처럼 창작자는 관찰된 무언가를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자예요. 만약 제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엄마와 아이에 대해 써야 한다면 저는 두 사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려고 애쓸 거예요.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더듬더듬 만져보며, 목적지(글의 완성)에 다다를 때까지 "동행"할 거예요. 작가는 자기가 전하는 이야기와 끝까지 동행하는 자여야겠죠. 당신의 말대로 이야기꾼은 "듣는 사람"이어야 하고요. - from. 박연준

지금 여기의 시간은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미래입니다. 하지만 미래란 지금 이곳에 도래하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이미 와 있지만 그 성김으로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속에서 미래의 기척을 감지하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미래가 오늘에 스미고 섞인 내일의 성분들이라면 소수의 사람들은 제 예민한 직관으로 충분히 선취할 수 있는 시간인 겁니다. 밤하늘 가득한 별자리 아래서 쓴 이 편지는 미래가 과거에게 보내는 것이지요. - from. 장석주

각자의 길을 가는 도중에도 언제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던 두 시인.

당신과 내가 쓴 편지들이 야만의 세상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작은 파문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한 해 중 어둠이 가장 긴 동지의 깊은 곳 모란과 작약이 꽃망울을 피우려는 기척 속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 순간이 지나갑니다. - page 159, 장석주

정말 읽는 이의 마음에 자그마한 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0번관에 어서 오세요
카노 토모코 지음, 김진희 옮김 / 타나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절판


주로 추리 작품을 쓰는 작가지만 피가 난무하는 잔인한 살인 사건을 많이 다루지 않고 오히려 판타지풍의 작품을 포함하여 일상의 수수께끼를 풀어 가는 부드러운 소재를 선호하는 일상 미스터리의 명인 '카노 토모코'.

이번 소설은 원래 작가가 단편, 혹은 중편으로 기획했지만 어쩌면 스케일이 더 큰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편집자의 권유로 장편소설로 재탄생했다고 합니다.

"팍팍하게만 느껴지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위안거리가 필요하다.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처리할 일들로 머리가 복잡할 때, 산적한 문제들을 다 잊고 잠시나마 근심을 내려놓고 싶을 때...... 그런 순간에 가볍게 집어 들어 술술 읽고 개운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다."

슬슬 무더위로 지쳐가는 요즘.

잠시나마 이 소설을 읽으며 저도 개운한 기분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4인조가 남쪽의 외딴섬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210번관에 어서 오세요



어어 하는 사이에 나는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 page 5

순풍에 돛 단 듯까지는 아니어도 큰 실패 없이 그럭저럭 해나가던 인생을 살던 '나'.

그래서 취직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그까짓 거 하면 다 돼!

지극히도 철저하게 짧은 생각이었음을...

정보 공개와 동시에 메뚜기 떼처럼 밀려드는 구직자들.

이들을 촤륵 촤륵 체로 거르는 기업.

겨우 면접까지 가도 엄청난 압박 면접에 자존심이 너덜너덜해지고 그 끝은 '기원 메일' 한 통으로

"이번 당사에 지원해 주셔서"로 시작해서

"아쉽게도 이번에는"으로 이어져

"앞으로의 활약을 기원합니다."로 끝나는 그거...

주구장창 기원만 받는 것에 피폐해진 내가 도망친 곳은 인터넷 속의 가상 세계, 이른바 넷게임이었습니다.

인터넷 게임은 내 마음을 구원해 주었지만 발목을 잡은 것 또한 인터넷 게임이었으니...

이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남들처럼 평범하게, 무난하게 살면 특별히 큰 문제 없이 남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는데. - page 9

게임이 세상의 전부가 된 나.

영락없는 백수에, 인터넷 게임 폐인이었습니다.

한 통의 편지가 오기 전까지...

엄마가 진지한 얼굴로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나에게 왔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등기 우편.

내용은 돌아가신 큰외삼촌께서 나에게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외딴섬에 지어진 건물 하나를 통째로, 그와 관련해서 상속 절차를 밟아야 하니 변호사와 함께 현지로 가야 한다고 적혀 있었던 겁니다.

이건 굴러들어 온 행운이라 여긴 나.

신이 나 섬으로 내려갔지만 아직 그것이 부모님의 최후통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겁니다.

부모한테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힘으로 길을 개척하기 바란다...

느닷없이 시작된 강제 독립생활.

어떻게 해서든지 현금을 손에 넣지 않으면 순식간에 벼랑 끝에 몰릴 것이 뻔하기에 급한 대로 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숙인을 모집하기로 합니다.

나는 속으로 즉시 210번 계획을 세웠다. 2와 10, 그래서 니트(2와 10을 합쳐서 니토라고 발음할 수 있는데, 백수를 뜻하는 니트족과 발음이 같다). 시시한 말장난이다. 기세를 몰아 내 '건물'도 <210번관>이라고 명명한다. - page 43

목욕탕·화장실 공동, 소재지는 외딴섬, 인터넷 환경만 있음.

이런 건물에 들어와 줄 사람이 있다면 히키코모리 오타쿠나 백수 정도일텐데 역시나 210번관에

엄마 손에 떠밀려 섬으로 온 백수 히로

의사가 없는 섬에 꼭 필요한 전직 의사 백수 BJ씨

돈 많은 한량 카인 씨

가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게임 속 세상에서 조금씩 현실의 세계로 확장하기 시작하는데...

길을 잃었던 백수들의 조심스러운 첫발,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해나가는 이들의 행보를 같이 해 보는 건 어떨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가능한지 아닌지는 결국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시험 삼아 한번 와보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받은 메일마다 이렇게 답장을 보내리라...... 혹시 그런 일은 없겠지만, 모든 방이 다 차지 않는 한.

-210번관에 어서 오세요. 저희는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고. - page 334

어쩌면 뻔한 스토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면서 응원하게 되고 희망을 엿볼 수 있었고 간만에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 덕분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마냥 이들을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가, 우리의 시선을 우선 되짚어야 했습니다.

그전에 스스로를 다잡아야 함을.

나에게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고, 앞길을 가로막는 난문이 사방팔방에 널려 있다. 까놓고 말해서, 인생 꽝이다. 하지만......

어떤 험한 길도 거침없이 달리는 오프로드 차를 타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부러워해 봤자 소용없다. 나는 그걸 갖고 있지 않으니까. 이 빈약한 몸뚱이 하나로 앞길을 방해하는 돌들을 하나씩 치워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불안하고 보잘것없어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 page 230

'그렇게 초조해할 것 없어. 어차피 부족한 것투성이니까, 확실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면 돼.'

'한 걸음 한 걸음 조금씩이라도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돼. 멈춰 버리면 목적지는커녕 근처 편의점에도 못 가는 거야.'

그러니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혼자가 두렵다면 손을 내밀어 같이 나아가면 됨을.

-미래는 아직 아무도 플레이한 적 없는 게임 같은 거니까. 뉴비를 노리는 적도 출현할 것이다. 강한 최종 보스는 엄청나게 강하기도 하리라. 플레이어 중에는 나쁜 놈도 있고 짜증나는 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힘을 합쳐 미션을 완수했을 때의 쾌감도 분명히, 틀림없이, 특별한 것이다. - page 332

저도 210번관에 놀러 가고 싶었습니다.


        책키라웃과 타나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한 이름 -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
권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가가 들여다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 속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던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본다. - 김보라(영화감독)

여전히 까마득한 밤에 가리어진 그녀들.

그럼에도 그녀들의 남긴 예술 작품들은 오롯이 빛을 내었고 우리도 이제서야 그 빛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들의 '이름'을 외쳐보려 합니다.

지워진 이름을 대신해 '먼저 온 미래'라 불리던 여자들,

예술로 스스로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하다

완전한 이름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미술과 문화에 관한 글을 쓰는 '권근영'씨.

과거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는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점에 크게 의문을 갖지 않았지만 사회인으로 문화예술계를 취재하고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가 된 후 한쪽으로만 치우친 예술가들의 성별이 차츰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1. '<축제전>여는 규수화가 황주리 씨'

1984년 개인전을 소개한 이 기사 제목에, 당시 스물일곱의 작가 황주리는 속이 상해 잠을 못 이뤘다고 돌아봤다. '규수'라는 예스러운 말을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의 집 처녀를 정중히 이르는 말' 혹은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여자', 나쁜 뜻 하나 없지만 당사자가 질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야심만만한 신진 예술가를 '누구의 딸'이나 '젊은(어린) 여자'로만 봤기 때문이다.

#2. 대범하고 활달하게 휘두르는 붓질에는 '남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마치 남성 화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정직성의 기계추상은 짧은 시간 밀도 있게 그려야 하는 아기 엄마의 삶에서 나온 것이라는 반전이 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세 아이를 키우며, 작업에 전념할 수만은 없었던 주부의 삶...... 그런 와중에 붓을 휘둘러 우리 시대의 풍경을 그린 것이 경쾌한 추상화로 이어졌다.

학문으로 접하던 미술세계와는 전혀 달랐던 이들의 이야기.

그래서 저자는 더 여성 예술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 이름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부 「길을 떠나다」 에서는

100년 전 진보적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성별 불문 입학 조건을 내건 바우하우스가 결국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의 그늘 아래 놓이게 한 '흑역사'를 지적하며, 그럼에도 아동미술에 선구적 역할을 한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 여인의 삶을 기록한 '엘리자베스 키스'

현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 교수이자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림 철학자 '노은님'

소재와 매체를 확장하며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경쾌하고 세련되게 전하는 '정직성'

2부 「거울 앞에서」 에서는

인상파의 여성 멤버였고, 출산을 했던 한 해를 제외하고 인상파 전시회에 빠짐없이 출품했던 '베르트 모리조'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화가 자신이 되고자 분투한 '파울라 모더존베커'

가족을 추스르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예술적 발자취를 남긴 '버네사 벨'

한국의 현대미술가 '천경자', '박영숙'

3부 「되찾은 이름들」 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프란스 할스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유딧 레이스터르'

최초의 추상화가였으나 이름 대신 '먼저 온 미래'라 불린 '힐마 아프 클린트'

조선의 알파걸 '나혜석'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화가이자 스승으로서 일찍이 여성 연대를 꿈꿨던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바로크시대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까지 사회적 그늘 혹은 가문의 이름에 가려졌던 여성들이 어떻게 예술로 자신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했는지 그 당찬 행보를 되짚어가고 있었습니다.

저에겐 이 책에 나온 이들 중 위대했던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격동의 시대였던 그 시기에 프리들은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선전 포토몽타주 제작에 관여한 혐의로 1년 남짓 옥살이를 했고 이후 프라하로 이주, 빈 출신의 전쟁 피난민 아이들을 가르치며 프라하 정신분석학회와 교류하며 아동심리와 미술치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치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지만, 남편의 비자가 거절당하자 함께 남아 테레진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이곳에서 프리들은 아이들에게 드로잉을 통해 상상하고 표현하며 그림에 자기만의 느낌을 담도록 독려했습니다.

1944년 9월, 남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자 프리들은 다음 열차로 아우슈비츠행을 자청하고 도착 직후 가스실에서 살해됩니다.

이때 아이들의 그림 4500장을 두 개의 여행가방에 담아 감췄는데 훗날 프리들이 감췄던 여행 가방은 프라하 유대인박물관에 기증되는데...



홀로코스트 시기 최대의 아동 미술 컬렉션이다. 프리들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집, 꽃과 나비, 태양을 그리며 희망을 부여잡았다. 마르기트 코레초바의 「나비들」이 그렇다. 마르기트는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됐다. 그때 나이가 열한 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친 수용소 생활에서 그림은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으며 아이들을 치유했다. 살아남은 한 학생은 프리들의 수업에 대해 "모든 사람이 우리를 상자 안으로 밀어넣었지만, 그녀는 우리를 그 상자에서 꺼내주었다"고 돌아봤다. - page 25

그리고 '천경자'.

꽃과 여인으로 남다른 정한을 화폭에 풀어낸 한국 근현대 화단의 여걸 천경자.

의사가 되라는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겠다며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진학한 그녀.

화가로 이름을 알린 건 스물일곱 되던 1951년에 그린 초록 뱀, 빨간 뱀, 갈색 뱀 등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스멀스멀 뒤엉켜 있는 묘한 분위기의 그림 「생태」였는데...

어렵던 시절, 돌파구가 된 그림.

"그런 속에서 누이동생이 죽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의학을 공부 못한 까닭으로 오만 가지 저주를 받은 것이고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낸 나는 악이 받쳤던가, 꽃향기 찾아 스치는 뱀 두 마리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무더기 뱀을 그림으로써 살 용기와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천경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53세에 돌아본 스물두 살 때.

결혼 이듬해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첫째 딸이 태어나던 해.

비련의 신부, 결핍의 모성, 슬픈 마녀 같은 자화상.

보고 있노라면 넋두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1인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그에 따른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공감도 하게 되고 이렇기에 좋아하는구나! 관심이 없었던 저도 어느새 관심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크기도 작아 부담 없이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읽기 좋은 책.

마냥 가볍지 않아 더 좋은 책.

전부터 이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이제서야 결제와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믿고 읽는 '김신회' 작가님.

개인적으로 사계절 중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작가님의 '여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휴가, 수영, 낮술, 머슬 셔츠, 전 애인...

여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아무튼, 여름




그녀에게는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이 있었습니다.

여름옷을 꺼내 입으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는 내 몸에 대해 고민하고,

여름에 만나 사랑한 연인과 이별하면서 그동안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잃어버린 진짜 내 모습과 마주하며,

이 책을 계약한 날 백화점 과일 코너에서 산 샤인 머스캣을 먹으며 나한테 잘해주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하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예찬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애호하는 마음'과 그 마음이 가능케 한 작은 변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또 그러한 변화조차 기어이 여름의 공으로 돌리고야 마는 그녀의 지극한 '여름 사랑'은 저에게도 울림을 선사하였는데...

그 시절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여름만 되면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나,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나, 온갖 고민과 불안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그 계절만큼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겨울인 사람은 여름 나라에서도 겨울을 산다. 손 닿는 것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싸늘한 마음은 뜨거운 계절조차 차갑게 만들어버린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름을 완성하는 건 계절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그 어디서든 여름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다. - page 116

그녀의 위트도 엿볼 수 있었던 이야기.

수영을 배우고 싶지만 수영을 못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수영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

그 이름도 '수수수'.

언젠가 수영할 수 있게끔 서로를 응원하는 모임이 아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영을 배우지 않게끔 서로의 발목을 잡는 모임이라니...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저도 수영을 하고 싶지만 물이 두려운...

왠지 가입 가능하지 않을까?!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 같다는 허무함이 밀려들 때 그녀는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말 못 하는 생명이지만 물을 주고, 분갈이하고, 햇빛을 쏘여주면서 적어도 애들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는 그녀.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잎을 향해 가는 발걸음, 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 춥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는 마음. 그런 것들이 사람을 하루 더 살게 한다는 걸 우리 집 식물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있다. - page 92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

그 믿음이...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아."

그러니 그대도, 아니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니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함을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저에게 여름은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였는데 이렇게 여름의 순간들을 마주하니 뜨겁기만 했던 햇빛이 반짝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읽으며 여름의 찬란함을 느꼈었는데...

그 느낌이 이제 눈부심으로 저의 여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여름의 문턱에 마주한 요즘.

덕분에 이번 여름엔 나만의 여름을, 아니 여름의 나를 마주하려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컬러의 세계 - 우리가 사랑한 영화 속 컬러 팔레트
찰스 브라메스코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색에는 의도가 있다!"

이 문구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영화 속 컬러 팔레트.

그동안은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과 함께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작품에는

남다른 '컬러 한 끗'이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은 왜 분홍색과 보라색일까?

「박하사탕」의 영호는 왜 회색 양복을 입었을까?

「아멜리에」 주인공의 피부색에 숨겨진 비밀은?

컬러의 세계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영화 「타이타닉」의 '나무판자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잭이 로즈에게 매달린 채 얼음으로 뒤덮인 대서양에 잠겨 있는 장면.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영하의 기온을 표현하기 위해 남색 필터가 씌워져 있지만,

어떤 결과에서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조각 같은 외모를 살리기 위해 어두운 푸른색의 밝기가 한껏 높여져 있기도 하고,

잭이 입은 셔츠와 로즈가 걸친 구명조끼의 크림색을 강조하며 푸른색 필터를 완전히 걷어낸 이미지,

로즈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높은 채도로 강조되어, 마치 불가능한 로맨스가 가미된 동화 같은 느낌의 이미지

등 색의 재구성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화에서 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영화 속에 적용한 개념을 영화 평론가인 찰스 브라메스코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컬러영화의 태동기부터 디지털 아이맥스 영화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영화사를 관통하는 50편의 영화를 엄선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박하사탕」도 함께 실려 있어 한국 역시도 영화 산업에 족적을 남길 만큼의 수준임을 여실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첫 이야기부터 큰 인상을 남겼었습니다.

<흑백영화의 사후 색채화>

흑백영화의 진중한 무게감에 색채를 덧입힌다?

색상의 간섭 자체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있지만... 이미지의 진실성은...?!



컬러 영화가 등장하고부터는 선악을 묘사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스타워즈」에서 평화의 수호자 제다이의 라이트세이버는 파란색이나 녹색(내면이 평온하게 하나 됨을 의미)으로 빛나고, 테러리스트 시스의 것은 빨간색(분노와 충동, 불의 의미)으로 빛나지만

「해리 포터」에서는 소년 마법사 해리의 지팡이가 빨간색(용맹함을 지닌 고결한 귀족 혈통을 암시)을, 어둠의 군주 볼드모트의 지팡이가 녹색(뱀, 화려함, 독성을 암시)을

띠는 것으로

색에 대해 하나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색의 배치와 보색을 숙지하는 것은 장면의 요소를 구분하는 것부터 관객의 시선을 제어하기까지 영화 촬영의 팔레트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라 하였습니다.

책 표지에서도 맞이하였던 「중경삼림」.

이 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란콰이풍 지역의 산업화된 도시는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하고, 밤거리 포장마차의 희미한 불빛만이 거리를 비추는 듯 하지만 두 인물이 만나면 '햇살' '밝음', '사랑스러움'으로 묘사하는 색채를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만남의 밑바닥에 깔린 잔잔한 슬픔을 파랑, 보라, 초록의 색감으로 표현하는데...

거친 듯하면서도 세련된 이 영화.

다시 찾아서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기차의 기적소리를 뚫고 과거로 흘러갔던 이 영화 「박하사탕」.

이 영화는 색채 면에서는 다른 측면만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진 않고, 그저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고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의 색채를 보면

자살로 끝나는 소풍 장면은 낙엽이 무성하고 날씨가 흐린 반면, 회상 장면은 숲속을 물들이는 눈부신 태양 아래서 전개된다. 흐트러진 회색 양복을 입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영호의 볼품없는 외양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가치 없게 여기는지 암시한다. 그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입는 하늘색 티셔츠는 그의 슬픔이다. 회색 양복 안에 입은 파란색 와이셔츠는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 상처를 단단한 외피 속에 묻어두는 법을 가르쳐주었음을 나타낸다.

...

색이 바랜 금속 물질에 둘러싸여 보내는 시간은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나무의 희귀함을 강조한다. 자살을 결심한 영호는 마지막으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느꼈던 장소로 돌아가고, 왜 이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 확인한다. 스무 번의 겨울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초록빛 봄, 그 가장자리는 마치 다시 찾아 들어가는 요람의 벽처럼 느껴진다. - page 136

의미를 알고 다시 보니 그의 절규가 더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색을 사용해서 감정을 끌어내고 의미를 전달하였던 영화.

덕분에 영화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색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그 색상이 어떤 의미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색은 기쁨이자 에너지요, 삶 그 자체다. 적절한 도구와 화학물질, 그리고 약간의 영감만 있다면 영화는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가서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다. 마이클 파월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전쟁 판타지 영화 「천국으로 가는 계단」 속 이승과 저승의 안내자는 필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국에도 테크니컬러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있다." 천국에서조차 영화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한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테크니컬러가 주는 감동을 다시 한번 전하고자 끊임없이 애를 쓴다. 천국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이승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목마르다. 이 책은 잔치의 시작일 뿐이다. - page 15

이제 색들이 그려낸 향연 속으로 들어갈 차례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