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동창 다섯이서 의료 스타트업 회사 '그랜마'를 창업하게 됩니다.
회사를 설립하고 회의가 끝나면 술을 마시러 나가거나, 술과 안주를 사와 술자리를 갖는 등 멤버들이 모였었지만 지난 몇 달 동안 모든 멤버가 모인 적이 한 번도 없게 되었습니다.
다들 바빠서 밖에 있거나 마감이 가까워졌거나 "그런 이야기를 할 바에야 1분이라도 더 자고 싶다"며 눈을 붙이는 등.
그런데 일주일 전쯤 그랜마의 CEO 다나카가 살벌해진 회사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4명의 창립 멤버들에게 제안을 하게 됩니다.
"가사 도우미를 부르려고."
...
"매일 부를 건 아니고 일주일에 사흘,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4시간 동안 주방과 욕실 청소, 저녁과 야식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거야." - page 19
그렇게 해서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게 됩니다.
광대뼈가 불거진 투박한 외모,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한, 여성스러운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그녀의 외양.
"오늘부터 일하게 된 가사 도우미 가케이 미노리입니다." - page 11
무뚝뚝한 중년의 가사 도우미 가케이는 직원들의 거친 마음에 스며드는 요리를 뚝딱 만들어 낼 뿐 아니라, 사무실 직원들이 가장 먼저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가 되는,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과거와 함께 곧 또 다른 사건이 모두를 기다리는데...
사실 저에겐 그녀의 첫 등장부터 강렬했습니다.
창업 멤버 중 '홍일점'이었던 고유키.
그래서일까.
'여자'라는 자격지심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하필 가사 도우미와 눈이 마주쳐 하는 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케이 쪽으로 갔더니,
"무슨 일이시죠?"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퉁명스레 물었다.
"야식, 만들어 놨거든." - page 42
그러면서 테이블 위의 큰 대접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워서 먹고... 그리고-"
"... 그거, 저한테 하라는 건가요?"
"어?" - page 46
"우습게 보지 말라고요."
"미안.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까 둘러보니까 아가씨한테서만 살기라고 할까... 각오라고 할까... 그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거든. 다른 사람들하고 달리. 하지만 그건 그냥 내 느낌이고 혼자만의 생각이니까 아니었다면 미안해."
각오...?
고유키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옆에 있던 의자에 힘없이 털썩 앉았다.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고? - page 48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한순간 터져 흐느끼게 된 고유키.
그런 고유키를 보고 가케이는 말없이 가방에서 사과를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사과를 든 비쩍 마른 중년의 여자.
동화 속 마녀 그 자체였던 가케이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껍질을 벗긴 뒤 사과를 굽는 것이었습니다.
"여직원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디저트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여자는 단 걸 좋아한다는 편견이나 차별이 무의식적으로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가케이는 혼잣말하듯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뿐이었어."
"감사합니다. 저도 너무 감정적으로 굴어서 죄송했어요."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사과한 건 오랜만이었다. 어쩐지 속이 시원해졌다.
"남자의 역할이나 여자의 입장 같은 건 너무 신경 쓰지 마."
가케이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건 이 일을 잘하고 좋아하기 때문이야." - page 54 ~ 55
줄곧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던 고유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이 몇 시간 와 줬다고 이렇게 가족처럼 밥을 먹고 있는 이 모습을 보게 되면서 고유키도 조금 마음을 놓게 됩니다.
자, 나도 일하러 가야지. 고유키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 page 59
그렇게 가케이는 구운 사과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인 디저트부터 도미 머리 밥까지 위로가 필요할 때, 응원이 필요할 때, 논의 상대가 필요할 때 그랜마 직원들 곁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케이 씨의 음식 중 인상적이었던 영양 밥.
쌀에는 거의 색이 배지 않았다. 흰쌀밥에 가까운 밥에 잘게 다진 고명을 섞어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깊은 맛이 났다. 입에 넣으면 육수 향이 코를 지나 빠져나갔다. 쓱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진득하게 흔적을 남기고 빠져나갔다.
평소에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 다나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녀가 말한 대로 적은 조미료만 가지고 이렇게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씹을 때마다 그 맛은 밥의 단맛과 어우러져 더욱 깊어졌다.
쌀과 육수는 왜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마음과 몸에 서서히 온기가 돌았다. 그날 이후로 싸늘하게 식어 있던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 같다고 다나카는 생각했다.
"맛있다."
한숨처럼 감탄이 터져 나왔다. - page 343 ~ 344
심플하지만 복잡하면서 다정한 맛.
그 속에 담겨 있었던 조심스러운 속사정까지.
다 같이 둘러앉아 먹으며 어느새 한 식구가 되어갔고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또다시 '식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만큼이나 저도 위로를 받은 느낌이랄까.
마음 한 켠에서부터 따스함이 퍼져나가면서 끝내는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가케이씨가 매 음식마다 외치던 이 한 마디.
"자, 우선 이것부터 먹어 봐."
그 어떤 말보다 다정했던 이 한 마디를 제 가슴속에도 새겨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