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의 죽음과 복지'라는 제목의 연말 특집 프로에서 대담자로 나선 전 국회의원 장진과 최철환 프란치스코 신부.
신부는
"...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가 이미 많이 시행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소득층 노인들을 위해, 황혼의 마무리가 두렵지 않도록 관심과 사랑을 기울여달라는 겁니다. 그동안 힘들게 살았으니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도 평안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종의 미'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독일 신부님에게 들은 독일 속담에도 '엔데 구트, 알레스 구트'라는 말이 있답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뜻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끝이 좋으면 다 좋아》라는 희곡도 있습니다."
대담 중 개인적인 바람을 꺼내 보았고 이에 장의원이
"최면이라도 걸자는 말씀인가요? 내가 그동안 잘 살았다,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것도 괜찮은 방법 아닙니까? 비용도 적게 들고요."
비아냥조의 가벼운 농담을 던졌지만 최 신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장의원은 추진하게 됩니다.
'최면 복지 제도'.
정부는 행정안전부 산하에 공리주의에 근거한 공리청을 신설하여 병약하고 가난한 노인들에게 최면을 제공하는 복지를 시행하게 됩니다.
이만하면 괜찮은 삶을 살았으며 이루고 싶던 소망을 이루었다는 암시를 임종 직전에 떠올릴 수 있도록 해주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최면 복지를 수행하는, 고도로 숙련된 엘리트 최면술사는 마치 마법사처럼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조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최상위 엘리트로 분류되는 T 레벨 최면술사는 국가적으로 규모가 크고 중요한 지역에만 부임하게 되는데...
'T164-42ㅎㅅ' 아니, 그냥 'T'라 불리는 주인공은 읍 규모의 지역으로 돌발 부임하게 됩니다.
중앙 행정조직에서 멀리 떨어진, 독특한 지형과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마치 육지 안 깊숙이 자리 잡은 섬처럼 느껴지는 좁은 지역.
좀처럼 보기 힘든 T 레벨의 최면술사가 부임할 것 같지 않은 이곳으로의 부임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특유의 금욕과 충성심으로 묵묵히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T.
첫 번째 복지 피술자로 평소 최면의 기만적 행복을 믿지 않고 최면을 줄곧 거부해온 박련섬 할머니를 만나 폐지를 수거하며 신뢰를 쌓았습니다.
박련섬 할머니에게 차차 최면을 시술하던 즈음, 갑자기 할머니가 자살로 의심되는 사고를 당해 죽고 맙니다.
'알레스 구트'를 암시하는 행복한 표정으로...
하지만..
평소 할머니가 다니지 않는 먼 곳까지, 그것도 폐지를 산더미로 실은 리어카까지 끌고 온 이유는 뭘까? 하필 CCTV도 없는 이 육교까지. 단순한 우연이 연속된 걸까? - page49
T는 할머니에게 은혜를 입고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던 최면술사 지망생 금봉수, 사건에 의혹을 품은 형사 강창근과 함께 파헤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용의자로 의심되는 두 사람.
T가 부임하기 전에 박련섬 할머니를 담당했던 S레벨 최면술사 S802와 할머니의 재산을 노리는 할머니 남편의 배다른 형제 최득구.
이 둘의 행적을 좇아보는데...
또다시 마주하게 된 죽음.
평소 전열기를 신문에 겹겹이 쌓아 옷장 위에 두셨던 김옥이 할머니.
화재로 사망했기에 할머니의 사진은 신문에 올라오지 않았지만 공리청에서는 용케도 노출된 얼굴 근육과 치아로 알레스 구트를 달성했다고 판단합니다.
복지 성과로 치하하기에 급급한 공리청...
무의식에 절대 자살을 시도하지 못하는 최면 코드를 심어두었는데 연쇄 자살사건이라니...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한편 T는 공리청에서 자신을 최면술사의 길로 이끌어준 사무관Q의 소개로 지역 대저택에 사는 함구증에 걸린 소녀 오승애의 치료를 돕게 됩니다.
하지만 T는 스멀스멀 번지는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최면 상태의 승애와 T 사이의 연결 고리가 점점 손에서 미끄러져나가는 느낌...
그리고 승애를 둘러싼 승애의 외할머니, 아버지이자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자본가인 오승택, 승애의 친척들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이들은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일까...?!
'가면...... 내게도 최면이?'
낯설지 않은 장면들.
우리 역시도 점점 초고령화 시대를 마주하면서 어떻게 하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복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마련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끝이 좋으면 다 좋아' 라는 의미의 '알레스 구트'.
과연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게 맞을까?
「인생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아네스 뭐라고 하는 건 그냥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통스러워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 거야. 그걸 행복입네 불행입네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자네가 처음에 한 말처럼 나를 정말 돕겠다면, 내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
「... 자네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최면으로 거짓 행복을 얻기 싫네! 그건 나에겐 속임수나 같은 거니까. 그런 건 고향을 오래 떠난 사람들이 사후에 옛 시간, 옛 지인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할 때나 하는 말이라고. 제발 내 기억을 왜곡하지 말아주게나. 부탁함세!」 - page 124 ~ 125
알레스 구트는 허상일 뿐이다. 죽음은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는,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되는, 단지 삶의 종착점이다. 그 종착점을 인지하고 사는 것만이 삶을 의미 있게 해준다는 사실을 T는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 page 215
삶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되짚어 불 수 있게 해 주었던 이 소설.
어쩌면 마주할 현실일까 씁쓸함마저 남곤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