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오밍주의 남동부 휘틀랜드 외곽에 있는 '노라의 휴게소 식당'.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월턴 보안관과 보비 데일 보안관보가 갓 구은 시나몬 애플파이를 먹기 위해 찾아옵니다.
이곳의 여름 폭우는 흔한 일이지만 유달리 심했던 오늘 아침.
오븐에서 갓 나온, 시나몬 향이 살짝 섞인 달콤한 파이 냄새가 실내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을 때,
월턴 보안관이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더니 돌연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젠장." 그는 숨을 내쉬며 스툴에서 뛰어내렸다. - page 13
전혀 제어가 되지 않아 보이는 픽업트럭이 식당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절망적인 비명과 혼돈에 점령당하던 그때.
쾅!
다행히 차는 식당을 단 몇 미터 앞에 두고 지면의 움푹 팬 구덩이에 부딪히며 왼쪽으로 방향을 급격히 틀었고 주차돼 있던 포드 토러스의 후미를 친 후 그대로 화장실과 창고가 있는 옆 건물을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사건 현장을 향해 가던 보안관과 보안관보.
그런데...
"모두 움직이지 마!" 그가 소리 질렀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오가며 총을 조준하는 손이 흔들렸다. "보안관님!" 보안관보가 불안정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셔서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page 16
트럭이 아닌 토드 토러스 트렁크 속에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고문의 흔적이 가득한 두 여성의 잘린 머리가 발견된 것입니다.
용의자는 즉시 체포돼 FBI에 구금됩니다.
하지만 구금된 상태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묵비권을 행사하는 용의자 '루시엔 폴터'.
그러다 딱 두 마디 말을 하였습니다.
"로버트 헌터, 난 그 사람한테만 말할 겁니다."
격무에 시달리다 겨우 휴가 일정을 얻어 하와이로 떠나려던 LA 경찰국(LAPD) 강력범죄수사대의 형사 '로버트 헌터'.
그의 상사와 FBI의 긴급 호출을 받고 용의자가 구류되어 있는 콴티코의 FBI 아카데미로 불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학교 시절 친구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이었던 루시엔 폴터를 마주하게 됩니다.
"제발 이미 안다거나 나를 그런 사람으로 믿지 않는다는 말 따윈 하지 말.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로버트. 나는 네가 알기를 원해. 정말로 알기를 원해. 그래서 네게 말하려는 거야. 네가 FBI건 아니건, 너라면 내가 하는 말이 진실이란 걸 확인해줄 테니까." - page 96
루시엔 폴터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만 미심쩍은 루시엔의 행동.
그가 알려준 자신의 은신처에 간 헌터는 그곳에서 경악스러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벽에 걸려 있는 액자는 모두 다섯 개였다.
헌터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바로 앞에 있는 액자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액자 속 그림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인간의 피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헌터를 얼어붙게 만든 것은, 지금 그가 보고 있는 액자 속 인간의 피부 위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아주 독특한 문신. 그 문신이 피부에 새겨지던 현장에 헌터가 있었기에, 그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 자리에는 루시엔도 있었다. 가시 돋친 줄기가 피 흘리는 심장을 교살하듯 감싼 빨간 장미 문신.
수전의 문신이었다. - page 127
한때 루시엔과 함께 삼각관계를 이뤘던 수전을 포함해 수많은 피해자의 문신한 피부를 '수집'했던 루시엔.
희생자들의 시신과 신언을 알아내 유족에게 알려주기 위해 로버트 헌터는 루시엔 폴터가 제안하는 두뇌 게임에 참여해야 했는데...
계속되는 심문과 치열하고 긴박한 수 싸움 속 자신의 악마성을 드러내는 루시엔.
이 잔인하고도 충격적인 게임의 끝은...
좁은 방 안에서 범죄자와 수사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심문은 그 어떤 것보다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범죄심리학자 수사관 vs 사이코패스 범죄심리학자'라는 구도는 일반적인 프로파일러가 사이코패스를 추적하는 서사를 벗어나 더없이 독자들을 몰입시키곤 하였습니다.
"경찰로서나 프로파일러로서, 또는 연방요원으로서 너희들은 항상 나 같은 사람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안 그래? 너희들은 항상 냉혹한 살인마의 정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내려고 해.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그렇게 경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나 같은 괴물이 될 수 있을까?" 루시엔은 모든 단어를 흔들림 없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전달했다. "글쎄, 한편으론 나 같은 괴물 역시 너희 같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싶어. 사회의 영웅들...... 최고 중의 최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사람들 말이야." 그는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너희는 날 이해하고 싶어 하고, 나는 너희를 이해하고 싶어 하지. 지극히 간단한 문제야, 테일러 요원. 프로이트의 말처럼 누군가의 정신을 깊이 파고들고 싶고 현재의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거든. 그렇지, 로버트?" - page 205
살인자의 머릿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알고 싶어 스스로 괴물이 되어 자신의 족적을 학문적으로 남기려 했던 루시엔의 모습.
"그 글은 그들을 도살한 다음날 쓰였어. 거기 쓰인 묘사와 단어들은 명확하고 간결해. 히스테리나 긴장한 기색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아. 감정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상태였다는 의미겠지. 자네가 말했듯이, 그의 글은 각 범행 전후와 범행하는 동안 악랄한 살인자의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구하고 기록한 것처럼 보이네.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이 '그'를 움직이는지 말이야. 로버트, 날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네. 나는 그 지식을 원해. 우리는 그 지식이 필요해. 그런 책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갖고 싶네." - page 296 ~ 297
그리고 살인마가 남긴 살인 일지 '백과사전'이 금서로서가 아닌 사법기관의 범죄와의 싸움을 판도부터 바꿔버릴 '성서'가 될 거라는 살인마의 주장에 동조하는 수사관들의 모습.
이들을 통해 선과 악의 경계의 딜레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읽으면서 책장을 멈추기 일쑤였습니다.
그 잔인함에, 이들의 두뇌싸움에 잠시의 쉼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느 소설에서 엿볼 수 없었던 경험이었기에 마지막까지 달려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로버트 헌터' 시리즈가 있다고 하니 조만간 또다시 로버트 헌터와의 만남을 기약하며...
그때까지는 순한 맛을 읽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