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집 소파다. - page 11
15년째 같은 회사에 다니는 서른일곱 살 '에이코'.
취미다운 취미도 없고 통장 잔고엔 늘 얄팍하고 대출이 남아있는 그녀에게 유일한 안식을 주는 건 작은 아파트 거실 소파였습니다.
소파 위에 있을 때면 에이코는 선명한 행복감을 느끼곤 합니다.
다만 그 행복감에는 우울이라는 베일이 늘 덧씌워져 있지만...
사랑하는 소파에서 한동안 뒹굴뒹굴하다가 벌떡 일어난 에이코.
가라앉는 기분을 털어내자는 마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봄바람을 맞으며 동네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가게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얀색 단독 건물에 '카페 루즈'라는 간판을 단 작은 가게.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여기서 조금 쉬었다 갈까 하며 들어갔더니
"나라 씨? 나라 씨 맞지요?" - page 22
6년 전 에이코의 회사에서 잠시 일한 '마도카 구즈이'가 있었습니다.
토끼처럼 튀어나온 앞니에 말수 적고, 동료들과도 거의 어울리지 않았지만 에이코에게는 마지막까지 살가웠던 그녀.
그런 그녀가 에이코에게 사표를 내며 카페를 하고 싶다고 고백했을 때 충고 아닌 충고를 건넸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린 친구에게 왜 그리도 무정하게 말했을까...
'카페 루즈'는 매월 1일부터 8일이 휴무라고 하였습니다.
영업은 9일부터 말일까지.
휴가 기간에 마도카는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맛본 디저트나 음료를 이 카페에서 재현해 메뉴로 내놓는다고 하였습니다.
"어쩐지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이야."
이름도 존재도 모르던 외국 음료와 만났다.
마도카는 환하게 웃었다.
"우리 카페, 그런 콘셉트의 가게예요.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카페. 저도 자주 여행을 가서 쉬고요, 대신 손님도 여기에서 여행을 느끼고요." - page 25
'지금 이곳'을 사는 이들이 '낯선 그곳'을 미각과 촉각, 시각과 후각으로 대리 체험하는, 꿈같은 공간인 '카페 루즈'.
이곳으로부터 딸기수프, 추프쿠헨, 도보스 토르타, 원앙차, 세라두라, 바클라바 등 낯선 음식과 함께 그동안 마음을 옥죄던 강박의 굴레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마술 같은 체험을 하게 되는데...
마도카가 내어주는 신기한 디저트와 음식들 사이로 그려진 각양각색의 인생사.
아슬아슬하고, 쓸쓸하고, 애틋하고, 미스터리한 열 개의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페라는 곳은 신기한 장소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비밀을 나누기도 하고 상담을 받기도 한다. 옆자리에 앉은 손님이나 점원들이 듣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는 흐르는 음악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흘려들을지언정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 page 131
읽으면서 마치 '카페 루즈'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눈 뒤 개운할 듯 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는 듯한 느낌...
아마도 그건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고 깨달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큰 바람이 생겼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 공감하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있지요. 반드시 여행을 가겠다고 작정하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또 이것저것 놓치는 일들도 생기는 것 같아서, 정해진 규칙으로 삼지는 않았어요." - page 119
정해버리면,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의 의미.
그 말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원앙차'로부터 '도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커피와 홍차가 원앙 부부라니,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다.
"그러니까 도전해 보지도 않은 채 미리 무서워하지는 않았으면 해. 이 세상에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니까."
유키는 원앙차가 든 잔을 끌어당기며 웃었다.
"맞아요. 이 차가 커피와 홍차 블렌딩이라는 말을 먼저 들었으면 안 마셨을지도 몰라."
그렇다.
해보지 않으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 - page 166
마치 저에게 건넨 위로 같아서일까...
책을 다 읽고 식어버린 차를 바라보며 한동안은 멍해졌었습니다.
툭, 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돌아온 일상.
왠지 오늘은 저도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카페를 한 번 찾아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