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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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두고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은 세 권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기나긴 이별』. 『기나긴 이별』을 나는 최소 열두 번은 읽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보면 그 뒷맛이 참으로 씁쓸하곤 하였는데 그가 좋아하는 책들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아직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나 역시도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이기에 왠지 하루키와 나의 공통점을 찾아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책 중 하나인 이 소설.

읽기 전 느낌이 벌써부터 씁쓸한 건 왜일까...


"내가 쓴 최고의 책은 『기나긴 이별』이다." -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내가 테리 레녹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술에 취한 채 <댄서스>의 테라스 앞에 세워 둔 롤스로이드 실버레이스 안에 앉아 있었다. - page 7


얼굴은 젊어 보이는데 머리카락이 백골처럼 새하얀 백발의 만취한 남자, 테리 레녹스.

그 곁엔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둘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남자를 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그를 부축한 나, 필립 말로.

그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나도 꽤 냉정한 편인데 그 친구는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백발이나 흉터 때문일까, 맑은 목소리와 예의범절 때문일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여자가 말했듯이 버림받은 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 page 14


하지만 이를 계기로 둘은 가끔 만나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됩니다.

만날 때마다 필립은 테리가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서 테리가 물어봅니다.


「이것 때문이겠지. 내 얼굴이 좀 불길해 보여서. 하지만 이건 명예로운 상처야. 어쨌든 원인은 명예로웠지.

「상처 때문이 아니야.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으니까. 나는 사설탐정이야. 자네는 골칫거리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골칫거리는 분명해. 직감이라고 해도 좋아. 더 듣기 좋게 사람 보는 눈이라고 불러도 좋고. 어쩌면 댄서스에서 본 여자도 단지 자네가 주정뱅이라서 버리고 가버린 건 아닐지도 몰라. 아마 무언가를 예감했겠지.」 - page 21


역시 탐정의 감이란...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새벽 5시, 동이 틀 무렵 끈질기게 울려 대는 초인종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러보니 가벼운 외투를 입고 목깃을 세웠는데도 떨고 있는 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바로 테리였습니다.


「호신용이야. 자네를 지켜 주려고. 나 말고.

「그럼 들어와.」내가 비켜 주자 그는 쓰러질 듯이 걸음을 옮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page 42


일주일째 잠을 설친 테리는 눈빛은 또렷한데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아내 실비아가 사랑채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티후아나까지만 태워 달라고.

필립은 테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를 티후아나까지 데려다줍니다.


티후아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

집에 도착하니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사들이 그에게 테리에 대해, 그리고 그를 수상히 여겨 참고인 아니 용의자로 같이 서로 가자고 합니다.


「참고인으로?」

「참고인 좋아하시네. 당신은 용의자요. 살인 사건의 사후종범 혐의. 용의자의 도주를 방조한 죄 말이오. 내 짐작이지만 당신은 용의자를 어디론가 빼돌렸소. 지금 당장은 그런 짐작만으로도 충분하지. 요즘 우리 반장님이 좀 독이 올랐거든. 규정을 뻔히 아는데도 물불을 못 가린단 말씀이야. 당신은 완전 재수 옴 붙었어. 이렇게든 저렇게든 우린 결국 당신 진술을 받아 낼 거요. 그게 힘들면 힘들수록 기필코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겠지.」 - page 65


공권력을 행사하는 형사들.

그에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내세우며 맞서는 필립 말로.

결국 구치소에 감금되었다가 잡힐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 모른 채 풀려나게 됩니다.


「레녹스 사건이 종결됐기 때문이야. 이제 레녹스 사건은 없어. 오늘 오후에 자세한 자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지. 아까 내가 말한 오타토클란에서.」 - page 100


누군가 이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고자 하는 느낌이 들지만...

더는 자신도 이 사건을 파헤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부인이 찾아옵니다.

웨이드 부인.


「남편이 사흘째 행방불명이에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러 왔어요. ...」- page 157


그녀의 남편은 잘 나가는 작가 로저 웨이드로 술만 마시면 명랑하면서도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쇠약해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다지 끌리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웨이드를 찾기 시작하고...

공통점으로 보이지 않았던 레녹스 사건이 조금씩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하나의 끈이 만들어지는데...


소설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이 이야기와도 닮은 듯하였습니다.


기나긴 이별은 결국 하나씩 잊히면서 나중엔 가슴속에서 죽어 가는 것일까...

소설이 마지막으로 향해갈수록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


사설탐정 필립 말로는 공권력에, 법체계에, 세상을 향해 냉소적이면서 신랄하게 맞서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지만...



여느 탐정들과는 달리 그는 눈빛은 참으로 씁쓸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건을 '사건'보단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그래서 그 사건의 끝엔 '기나긴 이별'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하고도 우울했던 탐정.

오늘도 혼자서 쓸쓸히 길을 걸어갈 그의 뒷모습이 우리의 세상을 표현하는 건 아닐지...

그 뒷모습에 긴 그림자만이 그와 동행하는 듯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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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거기 있니?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64
카트린 피네흐 지음, 이순영 옮김 / 북극곰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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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저리 가, 알프레드!』를 읽었기에 친숙한 우리의 알프레드.

그땐 작은 의자만 겨우 챙겨서 머물 곳을 찾아헤매던 그 모습이 아이보단 제가 더 잊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종 제가 꺼내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에 소니아를 만나 따스한 커피를 나누던 모습.

이 그림책을 읽기 전 다시 『저리 가, 알프레드!』를 꺼내읽었습니다.


이번엔 알프레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이도 조금은 걱정스러워합니다.

"엄마! 왜 알프레드의 모습이 아니라 친구의 모습만 보여?

빨리 알프레드 만나고 싶어!"

아이와 함께 우리의 친구 알프레드를 찾으러 갑니다.


알프레드, 거기 있니?

 


날이 밝았습니다.

우리 아이도 외칩니다.

"아침이에요! 일어나세요!"


소니아는 일어났는데...

집안이 조용합니다.

 


혹시 쪽지를 남기고 나갔을까?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잠시 일이 있어서 밖에 나갔을까?...

기다려보지만 알프레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 소니아.


알프레드를 찾으러 직접 나서게 됩니다.

집 근처엔 없었나 봅니다.

걷다 보니...

장벽 가까이에 도달하게 됩니다.

 


낯선 이들이 하나 둘 지나갑니다.

그런데 아이가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엄마! 근데 다들 알프레드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은데..."

사실 눈썰미가 있는 아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음... 우리 조금만 더 읽어보자!"

 


알프레드를 찾기 위해 장벽을 따라 걷다 보니 저~기!

우리의 친구 알프레드가 있었습니다.


"너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아다녔어.

근데 뭐 하고 있었어? 여긴 위험한 곳이잖아."


"장벽을 넘어오는 친구들을 도와줬어."

알프레드가 말했어요.


그렇게 소니아와 알프레드는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따스한 커피를 마시게 됩니다.

 


아직 아이가 '장벽'의 개념을 모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위험하게 벽을 넘는 거야?"

"그러게. 장벽이 없었다면 안전하게 왔을텐데..."

라고 말하면서 순간 찡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 장벽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장벽은 언제쯤 사라질지...


전편과 더불어 이번에도 '난민'에 대한, 그리고 '편견'을 지닌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순수하고도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준 알프레드 앞에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지...

'거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를 알프레드에게서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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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요슈 선집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사이토 모키치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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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일본 드라마를 보면 '만요슈'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느낌으론 우리나라의 '향가'와도 비슷한 듯한...

간결하지만 뭔가 심오한 내용이 담겨있는 듯한 '만요슈'가 알고보니 일본에서 가장 소중히 여겨지는 가집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책 20권에 시가 약 4516수 정도가 있다고 하니 그 많은 내용을 접하기엔 너무나도 벅찼었고 이번에 이 책을 통해 그 느낌만이라도 알고 싶었습니다.


만인을 위해 걸작선 형태로 뽑아내어 사람들이 꼭 알아두었으면 하는 것을 최대한 담아낸 이 책.


만요슈 선집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기에, 일본인만의 고유의 성격도 몰랐기에 읽으면서도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글을 해석하는 방식에도 한 가지가 아닌 그 숨은 뜻까지 파악해야 했기에 한 문장으로 표현되었지만 마치 한 권의 책과도 같은 느낌마저 들었기에 편히 읽을 수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일본'을 알게 되었단 느낌은 들었습니다.

아니, 일본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 역시도 이 책을 읽을 때 독자에게 '만요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요컨대 작품에 대한 감상이 핵심이며 비평과 주석은 두 번째 문제다. 그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에 각각의 작품을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감상에 방점을 두었으면 한다. 만약 작품의 전반적인 의미를 파악했다면 잠시 필자의 비평이나 주석의 내용에서 벗어나 작품 그 자체를 충분히 음미해보길 바란다. - page 4

'만요슈'를 머리보단 가슴으로 이해하라는 그 말.

그 후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을 때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들을 읽다 보면 먹먹함이, 그 서글픔이, 애틋함이 느껴지곤 하였습니다.

이 한 구절.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내 눈물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 사이에 아내가 생전에 즐겨 보았던 뜨락의 멀구슬나무 꽃잎도 지게 되겠지'라는 뜻을 지닌 이 노래.

세월의 흐름이 너무도 빠름을 탄식하며 먼저 간 아내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고 있는 그의 심정이 이해하기 쉽고 억지스럽지 않으면서도 감정의 자연스러움을 간직해, 특히 저 역시도 읽으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인상적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노래는 종래의 『만요슈』안에서도 굴지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니 어려운 노래보단 이렇게 쉬운 노래가 더없이 좋다는 것을,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 역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냥 음미했을 땐 연인을 보내는 석별의 아쉬움 같지만 이 노래는 역사적 사실과 관련시켜가면서도 음미할 수 있는 노래였습니다.

'사랑하는 이'는 남동생을 표현하였고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아쉽지만 돌려보내 준다는 의지가 담긴 이야기라고 하니 그 의미를 헤아려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한 번 읽기엔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한 구절을 읽고 잠시 내가 느낀 감정을 정리한 뒤 주석을 따라 다시 읽고...

적어도 세 번 정도 구절을 되뇌어보니 비로소 '만요슈'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넘어 사랑받는 만요슈.

요즘처럼 깊어가는 가을밤 한 구절씩 읊어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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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절하고 위험한 친구들
그리어 헨드릭스.세라 페카넨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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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익명의 소녀』로 작가를 만났었습니다.

흡입력 있는 전개와 거듭된 반전으로 한순간도 긴장을 끈을 놓치 못하게 하는, 아주 매혹적인 심리 스릴러를 선사했기에 꽤 인상깊었습니다.


이번 작품 역시도 추천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2020년 최고의 여성 작가 소설" _<마리끌레르>

"추리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책장을 미친 듯이 넘길 것이다! _<커커스리뷰>


이번에도 '여성'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책장을 펼쳐봅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죠."


나의 친절하고 위험한 친구들

 


커피 테이블에 놓여 있는 와인 잔 두 개, 낭만적인 밤의 증거. 나는 잔을 치우며 그 아래 고인 루비 빛깔의 얼룩을 닦아낸다. 커피를 내리고 있어서 다크로스트 원두 향이 작은 부엌에 진동한다. 18개월 전 머리힐의 이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션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커피다. - page 11


뉴욕에 사는 서른한 살의 '셰이 밀러'.

그녀는 오늘도 룸메이트 션과 그의 여자친구 조디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며 최대한 그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자 아침부터 길거리로 나서게 됩니다.


숫자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2 더하기 1은...... 너무 많다. - page 13


통계 수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버릇인 그녀의 최근 통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이에 사귀는 사람 없고 인원 감축으로 인한 해고를 통보받았기에 느릇느릇 도는 소용돌이 속에 갇힌 기분이었습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33번가의 지하철역으로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방금 놓친 열차가 역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본 후 다음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남자는 왜 방금 떠난 열차를 안 탔을까? - page 15


염소수염을 기른 남자가 일요일 아침 한산한 지하철 플랫폼에서 백팩을 메고 빈둥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왠지 신경 쓰이기 시작합니다.

셰이는 탈출구를 확인하며 남자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흰 도트 무늬 녹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 쪽으로 더 가까이 움직였습니다.

아마도 과잉 반응이겠지...

스스로를 꾸짖는 것도 잠시.

플랫폼의 칙칙한 콘크리트에서 뭔가가 반짝이고 있어 허리를 굽혀 주워보니, 활활 타오르는 태양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금목걸이였습니다.

혹시 저 여자가 떨어뜨렸을까? 하며 그녀에게 막 물어보려던 찰나.

그녀가 플랫폼 가장자리로 다가갑니다.


나는 손을 뻗으며 그녀에게 뭐라고 외친다. "안 돼요!" 혹은 "그러지 말아요!" ...... 하지만 너무 늦었다.

우리의 눈이 마주친다. 터널 입구에 열차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녀가 뛰어내린다.

찰나의 순간, 그녀는 무용수처럼 두 팔을 머리 위로 쳐든 채 얼어붙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page 17


'어맨다 에빙거'.

스물아홉 살. 싱글. 자녀 없음.

시립병원에서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느라 동료들과 친분을 쌓을 여유가 없었던 어맨다는 완벽한 후보처럼 보였지만 스스로 지하철 바퀴 밑으로 몸을 내던졌습니다.

어멘다가 죽고 이틀이 지난 밤.

커샌드라 무어와 제인 무어는 추도식을 계획합니다.


자신의 눈 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셰이는 쉽게 죽은 이의 마지막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결국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고 죽은 여성이 자신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 셰이는 추도식에 참석하게 됩니다.

셰이에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커샌드라와 제인 무어 자매가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어맨다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셨죠?"

그녀에게 사실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다. 멜라니처럼 그녀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헛기침을 한 뒤 정신없이 방을 둘러본다. 두 가지가 눈에 띈다. 첫째, 단 두 명의 남자를 제외하곤 전부 여자고, 거의 모두가 내 또래다.

둘째, 포스터 크기의 사진 속에서 어맨다가 삼색털 고양이를 안고 있다.

"같은 동물병원에 다녔어요." 불쑥 말이 나와버린다. "우리 둘 다 고양이를 키웠거든요."

커샌드라가 내 손을 풀어준다. "어머, 그랬군요."

거짓말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곧장 밀려든다. 왜 그냥 같은 동네에 살았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 page 51


이후 셰이와 커샌드라와 제인 무어 자매의 친절함에 급속히 친해지게 되고 그녀들 곁에 있는 밸러리, 베스, 스테이시, 대프니 그룹의 일원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어맨다의 죽음엔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 죽음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셰이는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거짓말'이 만들어낸 '눈덩이 효과'.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 또다시 거짓말을 반복해야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진실은 점점 멀어지고 겉잡을 수 없는 거짓말은 자신 스스로 만든 덫이 되어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고통받는 피해자는 자꾸만 숨게 되고 가해자는 당당히 세상을 돌아다니는지...

어디든 피해자만 비참해지는 세상이 더없이 잔혹하기만 하였습니다.


자매에겐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매 사이는 훨씬 더 끈끈했고 자신들을 지키기위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며 서로를 두둔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지켜주었습니다.

그리고 만든 그들만의 세상 속에 비슷한 처지의 여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명분을 쌓는 모습이 더없이 초라해보였습니다.


너무나도 외로웠기에 쉽게 다른 사람의 친절에 넘어간 것일까...

댓가 없는 친절이 외로움보다 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모습이 잔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소설을 읽고나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여운이 남아 차마 마지막 책장을 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진정한 복수가 무엇인지, 복수 뒤에 쾌감보다 허무뿐이니...

그리고 남겨진 셰이가 불쌍했습니다.

외로웠기에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던 셰이.

상처받은 그 마음을 위로해 줄 진정한 친구들이 나타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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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예요 -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응켱 지음 / 필름(Feelm)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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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명절이 찾아오는 이맘 때엔 어김없이 '에세이'를 읽곤 합니다.

누가 뭐라한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고...

누군가와 공감하며 위로받고 싶은 심정이랄까...


이번에 읽게 된 이 책은 표지부터가 뭔가 신나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문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짧은 인생, 재밌게 살아~"


철모르고 사는 즐거움을 일러주겠다는 작가의 신나는 일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철없는 게 아니라 낭만적인 거예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 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 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 강산에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어릴 적엔 마냥 어른만 되면 정해진 길에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줄만 알았습니다.

남들처럼 대학 나와서 회사에 취직하고 아침마다 지옥철을 타면서 그렇게 사는 게 맞는 길인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곤 합니다.

'넌 행복하니?'

'네 삶에 만족하니?'


만족한다고, 행복하다고 스스로에게 다짐 아닌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고 제 지인들도 그랬으니...


이런 생각은 대개 서른 이후에 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이기에 회사 생활에 대한 회의감, 어쩌면 도전할 수 있는 기회도 조금이라도 어린 나이이기에 그런가 봅니다.


저자 역시도 이런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내가 쓰는 총비용(시간, 체력 및 정신적 비용) 대비 세후 월급이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시점이 오니, 결국 이 직장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여러모로 나를 낮추고, 감추고, 억눌러야 하는 상황에 억울함의 감정이 넘실거렸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나란 존재를 겸손히 여겨야 하는 것인가(아마도 저 지구 핵까지). - page 19


아무튼 생각한 대로 살고자 하는 삶에 대한 절실함으로 퇴사를 결심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일에 대한 만족과 자신감 부족은 결국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되었다. 어쩌면 연차가 제법 쌓인 이후의 직장 생활은 매 순간이 '교여 있음'이 주는 안정과 그것에 대한 싫음 사이의 투쟁과 같았다. 아이러니한 건, '고여 있음'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야 비로소 미련 없이 사직서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자 반성의 결론이었나 보다. '고여 있음' 역시 치열한 인내와 무수한 결정이 수반되는 대견한 순간들의 연속이자, 그 안에서도 개인은 기꺼이 성장과 행복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그 생각에 다다라서야 나는 비로소 진짜 떠나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 page 36


퇴사 후 귀향은 이상만큼 마냥 즐겁고 행복하진 않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입니다.

책임감이 없다며, 철이 없는 행동이라며, 아직도 마냥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고.

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용기, 나라는 존재를 앎으로써 보다 세상을 살아갈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할 수 있기에 한 번뿐인 인생,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오늘의 날씨>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잠깐이지만 대낮에 산책을 다니던 그녀.

동료와 날씨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던 그 시절.

 


그땐 몰랐지만 날씨로 인해 일상에 소소한 활력을 나눌 수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그녀로부터 저도 문득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구름 한 점없는 맑은 가을 하늘.

가볍게 스치는 바람.

제 안에도 무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저 그날그날의 볕과 바람, 매일이 다른 하늘의 풍경, 흙과 풀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감각 정도라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 거였을까. 오늘의 날씨를 나눈다는 게.

날씨를 느끼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일. 그렇게 일상에서 채울 수 있는 소소한 활력을 나누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다. - page 97


저도 한때는 '열심히'하면 뭐든지 될 줄 알았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에 열심히.

하지만 나중에 제게 주어진 건 활활 타고 남은 재뿐이었습니다.


결국 열심은 양면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의지와 활력을 가지고 산다는 점에서는 분명 좋은 태도였지만, 힘을 빼고 적당히 부유하는 법은 모르는 듯하니 위태로운 방식 같기도 했다. 힘이 들어간 상태로 헤엄을 치면, 멀리 나아가기 힘든 이치가 아니었을까. 금방 가라앉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곤 했다. - page 193


참으로 미련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유독 와닿았습니다.

제 엄마도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기에...

 


저자의 삶이 더욱 빛나 보였던 건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하지 않아도 충분히 낭만적인 삶을 위해 나아가는 저자의 모습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또 하나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잘못을 인정하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결코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저자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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