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소설을 두고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게 가장 중요한 책은 세 권이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기나긴 이별』. 『기나긴 이별』을 나는 최소 열두 번은 읽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보면 그 뒷맛이 참으로 씁쓸하곤 하였는데 그가 좋아하는 책들을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아직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나 역시도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이기에 왠지 하루키와 나의 공통점을 찾아서 반가웠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책 중 하나인 이 소설.

읽기 전 느낌이 벌써부터 씁쓸한 건 왜일까...


"내가 쓴 최고의 책은 『기나긴 이별』이다." -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내가 테리 레녹스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술에 취한 채 <댄서스>의 테라스 앞에 세워 둔 롤스로이드 실버레이스 안에 앉아 있었다. - page 7


얼굴은 젊어 보이는데 머리카락이 백골처럼 새하얀 백발의 만취한 남자, 테리 레녹스.

그 곁엔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 둘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남자를 두고 홀연히 사라져 버립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그를 부축한 나, 필립 말로.

그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옵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나도 꽤 냉정한 편인데 그 친구는 왠지 마음에 걸렸다.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백발이나 흉터 때문일까, 맑은 목소리와 예의범절 때문일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여자가 말했듯이 버림받은 개나 다름없는 신세가 아닌가. - page 14


하지만 이를 계기로 둘은 가끔 만나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됩니다.

만날 때마다 필립은 테리가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서 테리가 물어봅니다.


「이것 때문이겠지. 내 얼굴이 좀 불길해 보여서. 하지만 이건 명예로운 상처야. 어쨌든 원인은 명예로웠지.

「상처 때문이 아니야. 상처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으니까. 나는 사설탐정이야. 자네는 골칫거리지만, 굳이 내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는 없지. 어쨌든 골칫거리는 분명해. 직감이라고 해도 좋아. 더 듣기 좋게 사람 보는 눈이라고 불러도 좋고. 어쩌면 댄서스에서 본 여자도 단지 자네가 주정뱅이라서 버리고 가버린 건 아닐지도 몰라. 아마 무언가를 예감했겠지.」 - page 21


역시 탐정의 감이란...

한 달 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새벽 5시, 동이 틀 무렵 끈질기게 울려 대는 초인종 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러보니 가벼운 외투를 입고 목깃을 세웠는데도 떨고 있는 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손에는 권총을 들고.

바로 테리였습니다.


「호신용이야. 자네를 지켜 주려고. 나 말고.

「그럼 들어와.」내가 비켜 주자 그는 쓰러질 듯이 걸음을 옮겨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page 42


일주일째 잠을 설친 테리는 눈빛은 또렷한데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아내 실비아가 사랑채에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아침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 티후아나까지만 태워 달라고.

필립은 테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를 티후아나까지 데려다줍니다.


티후아나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

집에 도착하니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사들이 그에게 테리에 대해, 그리고 그를 수상히 여겨 참고인 아니 용의자로 같이 서로 가자고 합니다.


「참고인으로?」

「참고인 좋아하시네. 당신은 용의자요. 살인 사건의 사후종범 혐의. 용의자의 도주를 방조한 죄 말이오. 내 짐작이지만 당신은 용의자를 어디론가 빼돌렸소. 지금 당장은 그런 짐작만으로도 충분하지. 요즘 우리 반장님이 좀 독이 올랐거든. 규정을 뻔히 아는데도 물불을 못 가린단 말씀이야. 당신은 완전 재수 옴 붙었어. 이렇게든 저렇게든 우린 결국 당신 진술을 받아 낼 거요. 그게 힘들면 힘들수록 기필코 알아내야 한다는 뜻이겠지.」 - page 65


공권력을 행사하는 형사들.

그에 자신의 신념을 꿋꿋이 내세우며 맞서는 필립 말로.

결국 구치소에 감금되었다가 잡힐 때와 마찬가지로 영문 모른 채 풀려나게 됩니다.


「레녹스 사건이 종결됐기 때문이야. 이제 레녹스 사건은 없어. 오늘 오후에 자세한 자술서를 써놓고 권총으로 자살해버렸지. 아까 내가 말한 오타토클란에서.」 - page 100


누군가 이 사건을 빨리 종결시키고자 하는 느낌이 들지만...

더는 자신도 이 사건을 파헤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부인이 찾아옵니다.

웨이드 부인.


「남편이 사흘째 행방불명이에요.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 그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러 왔어요. ...」- page 157


그녀의 남편은 잘 나가는 작가 로저 웨이드로 술만 마시면 명랑하면서도 냉혹하고 잔인해지는,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쇠약해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다지 끌리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웨이드를 찾기 시작하고...

공통점으로 보이지 않았던 레녹스 사건이 조금씩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하나의 끈이 만들어지는데...


소설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이 이야기와도 닮은 듯하였습니다.


기나긴 이별은 결국 하나씩 잊히면서 나중엔 가슴속에서 죽어 가는 것일까...

소설이 마지막으로 향해갈수록 그 이별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힘들었다고 해야 할까...


사설탐정 필립 말로는 공권력에, 법체계에, 세상을 향해 냉소적이면서 신랄하게 맞서 싸우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이지만...



여느 탐정들과는 달리 그는 눈빛은 참으로 씁쓸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건을 '사건'보단 '사람'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그래서 그 사건의 끝엔 '기나긴 이별'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독하고도 우울했던 탐정.

오늘도 혼자서 쓸쓸히 길을 걸어갈 그의 뒷모습이 우리의 세상을 표현하는 건 아닐지...

그 뒷모습에 긴 그림자만이 그와 동행하는 듯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