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샤베트
백희나 글.그림 / Storybowl(스토리보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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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바라본 여름밤 아파트의 풍경은 푹푹찌는 더위보다 더 숨통 막히는 광경이다. 더운 공기와 맞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모두 창문을 꼭꼭 닫은 모습이나 그 안에서 알록달록한 반소매 차림으로 쾌적한 휴식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마치 과일, 야채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잘 밀폐해 놓은 유리 냉장고같다. 꼭꼭 닫힌 무관심, 차갑게 냉방된 이기심...결국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며 밖으로 내몬 더운공기는 온전히 어둠속에 홀로 남은 달의 몫이 되버렸다. 그리고 드디어, 불쌍하게도 더위에 지친 달에게 문제가 생긴다. 똑.똑.똑...녹아 내리는 달방울은 마치 달이 흘리는 눈물인 것마냥 슬프다.

앗! 그런데 심상치 않은 달의 상태를 눈치채고 달려온 누군가가 있으니, 바로 늑대 반장 할머니다. 달이 뜨는 밤이면 '아우~~~'하고 한 곡조 뽑으시던 친분때문일까? 가여운 달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만 보지 않고 얼른 커다란 대야로 감싸 받는다. 여기서 참으로 놀라운 점은 현명함을 발휘하는 주인공이 바로 '늑대'라는 점이다. 사실 늑대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무섭고 흉악한 역할을 맡기에 아이들은 늑대를 나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저런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하게 '달'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모아 이야기를 구성한데다 할머니의 인자함까지 덧붙여 오히려 늑대를 달과 친한 동물, 달빛 아래 노래하던 동물로 새로이 바라보도록 한다.


대야에 담긴 달 국물은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빛이 난다. 왠지 마법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느낌. 그만큼 책 속의 달빛은 독특하게, 진짜 살아있는 달빛처럼 빛나며 이 빛 때문에 이야기는 더욱 신비로워진다. 또한 달국물의 마법을 펼쳐나가는 늑대 할머니의 발상도 어린아이 같이 순진하고 즉흥적이어서 어른들이 발휘하는 창의력과는 또 다른 차원이다. 세상에, 달로 샤베트를 만들어 먹고 시원하게 잠이 들다니! 그래서 책 제목이 '달 샤베트'인 거였구나...궁금증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그 순진함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달이 녹은 것은 찜통 더위에 시달리는 아파트 주민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달을 집으로 삼고 살던 옥토끼들도 이제 갈 곳이 없어져 지구별 늑대 할머니의 집으로 찾아 온 것이다. 똑.똑.똑...토끼들은 늦은 밤 할머니를 다시 깨운다. 그런데, '똑.똑.똑'은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다. 책 속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똑.똑.똑'은 처음에 달이 녹아내릴 때도 등장했던 의성어이다. 덕분에 아이는 같은 '똑.똑.똑'이라도 쓰임새가 다름을 알 수 있고, 어렴풋이 우리말의 묘미 또한 느낄수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책에는 달과 관련된 모든 것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꾸려간다. 처음에는 늑대, 그 다음에는 달나라 옥토끼,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은 토끼들을 다시 집으로 보내 줄 숨겨진 비법, 달맞이 꽃이다. 달국물을 먹고 쑥쑥 자라는 달맞이 꽃, 달맞이 꽃의 환한 빛으로 쑥쑥 자라는 새 달. 문제는 마법을 부린듯 눈깜짝할 사이에 해결되지만 자연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회복력과 아름다움에 한참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들여다 본다.


<달 샤베트>는 환경에 관한 매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기발하고 신비로운 이야기 속에 교훈들을 은밀히 숨기고 있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에너지를 아끼는 착한 아이가 등장하지 않아도, 이렇게 해야지 가르쳐주는 엄마가 등장하지 않아도, 녹아 내리는 달이나 집 잃은 토끼, 달 샤베트와 달맞이 꽃의 놀라운 위력에서 아이들은 마음으로 느끼며 환경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어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평온한 가운데 잠든 늑대 할머니를 보면서 오늘 밤은 에어컨을 끄고 자자는 기특한 녀석이 있을지도...


<본 이미지의 저작권은 해당 출판사에 속해 있으며 무단도용이나 상업적 목적의 사용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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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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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전 출간된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지난 달 뒤늦게야 읽고 진실을 만나는 일에는 늑장을 부리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그가 신자유주의의 헛점을 밝히며 풀어놓던 경제사는 나 역시도 속해있던 과거의 장면들이었는데, 경제에 해박한 지식은 커녕 무심한 편인 나는 의심없이 대세의 목소리에 휩쓸려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정말 주저하지 않고 선택해 읽어본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한마디로 자본주의 입체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고정관념으로 바라봤던 한쪽면의 자본주의에 대해 그 이면을 밝혀본다는 '뒤집기'의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다각적인 측면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23면체 돌려보기라 하면 적당할까?). 또한 23가지의 진실들은 서민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중심으로 재조합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경제지식이 학문적 논박에만 머무르지 않고 살림살이에 직결되는 유용한 지식으로 와닿도록 하는 좋은 시도라 생각된다. 물론 장하준의 전문분야라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꼬집기'도 여전히 등장하지만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답습하는 내용은 아니다. 굳이 비교해 보자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신자유주의의 헛점에 집중해 정사(正史)를 토대로 깊게 파내려갔고, 이 책은 자본주의라는 큰 테두리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을 비롯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며 넓게 펼쳐나가고 있다. 따라서 전작에서 언급했던 내용이라 할지라도 '자본주의의 진실' 안에서 재편되고 확대되면서 새롭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장하준이 드러내 놓은 23가지의 진실은 크게 자유시장, 기업과 정부, 분배문제에 대한 내용으로 나눠볼 수 있다. 자유시장은 말그대로 자유가 아닌 피아노줄처럼 보이지 않는 규제가 가득한 곳으로, 요점은 규제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규제 이면에 이득을 위한 정치적 개입이 존재한다는 것이며 이로인해 객관적 자유시장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함을 깨우쳐준다. 더불어 시장도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시장에 대한 정부규제의 필요성을 말하며 국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 넌지시 제시하는 듯하다. 기업과 정부 부분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큰정부를 전면적으로 부각시켰다는 점과 부정적 기업사례에 미국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인데, 계층갈등을 일으키는 미국 경영자들의 유독 높은 보수, GM의 몰락 사례, 미국이 경제 1위 국가가 아님을 조목조목 짚고 있어 우리에게 자유무역과 정부규제 축소(민영화)를 강요해 왔던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돌이켜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분배문제에서는 '받아 마땅한' 만큼 보수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이채롭다. 여기서는 자국의 경제시스템의 문제뿐만 아니라 부유국가의 이민 억제 정책이라는 거시적 관점까지 포괄한 점이 무척 흥미로우며, 소득 불균형의 문제를 세계 노동자들의 임금 비교를 통해 살펴보는 가운데 동등한 출발점이 진정한 평등이라 주장하는 그의 의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밖에도 탈산업화의 문제점을 고발하며 장하준 교수가 늘 강조하는 제조업의 중요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조명한 부분과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인터넷 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의 4번째 진실, 오히려 빠른 성장을 우려하며 금융부문과 실물 부문 사이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금융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의 22번째 진실도 눈여겨볼만 하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왔던 부분은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향상되고 고급인력이 많을수록 경제가 성장한다고 믿으며 개인들도도 고급교육과 높은 연봉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여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는 '경제적 관점'으로 교육을 바라보며 우리가 받는 교육이 노동자의 생산성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실상을 드러낸다. 이것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생각했기에 이해와 수긍은 가지만 선뜻 동의하기는 힘든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현저히 낮은 스위스가 생선성 높은 경제성과를 이룬 사례를 읽다보면 좀 더 타탕성이 뚜렷해지고 생산성보다는 노동자의 지위를 차별하는데 더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현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장하준 교수에 따르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경제 입문서만큼 쉽지만 고급 경제학에서도 당연시 받아들여지는 경제 이론과 실증 자료들에 대한 반박이니만큼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다고 한다(그리고 읽어본 바, 진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오늘날의 금융위기와 불확실성의 세상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서민들'이 서구 선진국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 안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자본주의 바깥에서 전체의 모습을 조감하며 그것을 우리 방식대로 길들여 가는데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도일 것이다. 따라서 더 나은 살림을 위해 오늘도 재테크 서적을 읽고, 뉴스를 열심히 보는 (자칭) 서민들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고 무심코 받아들여왔던 경제의 진실에 관해 새로이 눈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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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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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잡힐듯 하면서도 매끄르르 빠져나가는 두 단어의 연관성을 추적하면서 오래전 디자인 과제에 고심하던 추억을 떠올렸다. 한창 썸네일 스케치며 이런저런 기초들을 배우던 시절, 선생님은 아이디어 발상을 위한 과제를 내주셨는데 그것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선택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재미있게 들리지만 하는 입장에서도, 보는 입장에서도 매우 난감한 일이다. 스케치북 한 장에 썸네일 스케치 24개, 한 반에 15명...도합 360개의 이미지들 앞에 선 우리들은 모두 잠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엔 선택된 단어를 쉽게 알아맞출 수 있는 이미지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결과물만 봐서는 도대체 어떤 단어를 선택한 것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이미지로 표현된 단어가 추상적일수록 근원을 찾아내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제목에서의 예감이 적중한 듯 고전적 세계와 낭만적 세계로 대변되는 고도의 추상세계를 헤메며 제 3의 무엇, 즉 질(質, Quality)을 도출하는 과정은 두 단어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디자인에 비해 몇 배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여행,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의 '야외강연'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깨어지라는 야릇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마치 새로운 이미지를 완성했을 때 스케치북을 보며 뿌듯했듯이 동일한 충족감을 맛보리라 믿으며...

모터사이클을 타고 먼지 범벅이 되가며 통과했던 세계는 실로 다양했다. 공학, 예술 사이를 누볐으며, 철학의 난코스를 탐험하기도 했고, 종교의 심오한 빛을 가로지르다가 신화의 세계를 선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를 지나오면서 나는 왠지 사진작가 히로시 수지모토의 작품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포착한 수평선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음미하면서 주인공이 도달하고자 했던 분투의 흔적들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주인공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유령의 세계에 살고 있다. 바로 이 어두침침한 수평선 풍경처럼 말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령이란 아이들이 상상하는 끔직한 혼령의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유령이란 우리가 믿고있는 모든 체계와 법칙들,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여 결국 살아있는 자들을 그 손아귀 안에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관념들을 의미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우리의 일상이 기본적으로 만유인력의 유령 위에 유클리드 유령으로 지어진 빌딩 속에서 행해진다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그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너무나 어둠에 익숙해져 이것이 당연한 세상인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파이드로스의 자아도 처음엔 이와 같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파이드로스)과 단절되어 일상의 유령에 묶인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고, 이는 냉랭하면서 의무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어둠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언가가 보인다(실제 사진도 그렇다). 이것은 마치 천천히 더듬어 되찾아야 할 주인공의 자아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이 여행을 함께 떠날 독자들의 잠재된 파이드로스적 욕망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파이로드스를 통해 꾸준히 듣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고전적 세계와 낭만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고전적인 세계란 공학을 의미하고 낭만적인 세계는 예술(혹은 인문)을 의미하는데, 좀 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에 맞는 그의 표현을 빌면 '반듯하게 각져있는 것'과 '히피적인 것'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파이드로스는 스스로 '각져있는 사람'이라 칭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니, 그에 앞서 늘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그동안 우리는 서구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져왔다. 그렇기에 두개의 다른 체계가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파이드로스가 묘사하는 질을 생각해보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고 있는 플로우(Flow)의 개념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저자(이 사람도 역시 파이드로스이다)가 이 글을 쓰던 당시와 비슷한 연대로 기계적 노동자에서 벗어나 자발적 삶을 추구하려는 선각자의 면모를 엿볼 수 볼 수 있다.

파이드로스는 이분법의 세계와 이를 견고히 지켜나가는데 기여하는 '이성의 교회(학교를 의미)'를 혐오하며 갈등하다가 결국 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제 3의 것, 바로 질이라는 개념을 수립해낸다. 정의될 수 없는 질 혹은 정의되어서는 안되는 질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도 치열한 작업이었다. 여기서는 철학에 종교의 개념들이 더해지며 점점 인문학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결국 파이드로스는 한국의 성벽과 도덕경을 통해 A와 B로 인해 생성되는 질이 아닌 질로 인해 생성되는 A와 B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질은 생성된 결과가 아니라 연역체계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난무하는 잿빛 안개가 이전의 이분법이 지배하던 수평선의 풍경을 뒤엎고 있다. 파이로스도 점점 기억을 되찾으며 잃어버렸던 자아를 회복해간다. 이 부분에서는 철학교수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라톤까지 소환하여 공격을 벌이는데, 그들로부터 비롯된 교육의 중심 진(眞)이 파이드로스가 휘두르는 선(善,진에 대비되며 질에 상응하는 개념)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이 목도된다.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 고대 변증법 옹호자들의 독선과 우매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니...만일 진(眞)을 추구했던 그들이 아닌 선(善)의 추구자 소피스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고체계 속에서 살고 있을까? 현대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과거의 연구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내지만 파이드로스처럼 뿌리까지 뒤흔들어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인물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문학적 상상이 가미되었다해도 학문에 관한 부분만큼은 실제와 같으니 어쩌면 여기서의 충격은 온전한 소설 속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그것보다 몇 배 더 큰 것처럼 생생히 다가왔다.

하지만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출발지에 서있던 '나'가 사라지고 '자아'를 회복한 마당에 그는 그대로 고대 희랍으로 내려가 선의 개념인 '아레테'를 쟁취해 오는데 성공을 거둔다. 마치 괴물을 물리치고 불새의 심장을 빼앗아오는 이야기속 왕자처럼...그리고 증명한다. 변증법 옹호자들이 진(眞)을 내세우기 이전, 선(善)을 중심에 두고 영위했던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고결했는지.

파이드로스가 자아를 회복하며 철학에 분석의 칼을 디밀어 난도질을 하는 동안 그와 아들과의 관계 또한 갈등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냉담이 고조되지 않고 갈등이 고조된다는 것은 회복의 신호. '나'와 아들, ''파이드로스'와 아들 사이에서의 대립은 오히려 그가 자아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크리스의 행복한 모습, "우리가 해냈어요"라는 말들이 이후 화해가 올거라는 기분좋은 예감을 던져주기도 했다.



극명히 드러나는 신비한 세계를 보라. 이것이 파이드로스가 쟁취해 낸 선의 세계이다. 이전처럼 하늘과 바다, 수평선 뿐이지만 어둠이 물러가고 이분과 혼탁이 사라진 이 장면은 질이 세상을 비춰 온통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도 빛에 눈을 떠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에서도 그랬다. 아들 크리스는 "아닌 줄 알았어요"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빠가 미친 것이 아닌 줄 믿었다'는 뜻으로 아빠에 대한 크리스의 변함없는 사랑을 뚜렷이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전달은 '나'가 병원에 갇혔던 꿈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것을 '파이드로스'가 생각해 내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병원(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문을 열려고 했던 그 사람...그가 누구인지 몰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바로 아빠를 구하려 했던 아들이었던 것이다. 시종일관 두 부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오히려 드문 대화 가운데 이런 사건들이 발견되니 오히려 감동이 애잔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제목에서 보이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다. 사실 이야기 속에는 이 두가지에 대한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언급한 것이 있다면 선은 자신을 끊임없이 가다듬는 것이고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마찬가지로 모터사이클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데, 둘 다 꾸준한 노력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야기는 결말 속에서 매우 희망적으로 연결된다. 파이드로스는 아들 크리스가 크면 모터사이클을 갖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승락하며 '관리'를 잘 해야한다는 조언을 한다. 이어 관리하는 것이 어렵냐는 아들의 질문에 올바른 자세만 갖는다면 어렵지 않다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가 묻는다.


"아빠?"
"응?"
"저도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정신병으로 전기충격치료까지 받았던 파이드로스, 그리고 그의 병을 이어받아 간혹 증세를 보이는 아들 크리스. 그러나 파이드로스가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스스로도, 아들을 통해서도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사고체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신념이 미치지 않았음을 역설하는 의미일까? 그의 답변은 아무런 주저없이 명쾌한 긍정이다. 이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아와 세상의 질을 되찾은 승리자의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대답은 아들 크리스에게도 그리고 내재된 파이드로스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은빛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그대로 전달된다. 우리도 파이드로스라면 세상의 99%를 이기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비난받던 경구를 진지하게 실천해봄직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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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어느덧 트리와 술을 준비할 때가 돌아왔다. 좀 더 분주해지기 전에 빨리 예술 동네 한바퀴를 둘러봐야지! 어디보자...그런데 의외로 조금은 잠잠한 편이다. 마지막 달이라 그런가? 각 분야의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미술 분야에 신간이 조금 편중되어 있는 듯하고, 사진과 건축은 주로 작품집, 디자인 분야는 거의 전멸, 그리고 영화와 음악에서 묵직한 책 한 권씩이 눈에 띄였다는게 전반적 소감. 결국 선정한 책들은 대부분 미술분야가 되고 말았다.


독특하게도 인문학, 특히 철학분야를 고집해 온 출판사 그린비에서 이번엔 묵직한 예술책을 내 놓았다. 그것도 슬라보예 지젝의 추천평과 함께. 이 책은 그동안 객체로 인식되었던 그림을 주체로 보고, 그림을 살아있는 욕망의 존재로 새롭게 인식했다는 설명이 마음에 드는데, 제목에서의 '그림'이란 '이미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우리의 시각문화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미래 예술에 대한 통찰 부분이 매우 기대된다./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고 보고 꿈꾸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미지는 우리의 기억과 상상력을 재기능하게 하면서 새로운 기준과 새로운 욕망을 세상에 들여온다"(p.139)
 

  
표지에 그려진 기묘한 파파스머프때문에 눈에 띄었다. 이보다 더 친숙한 대중문화가 또 있던가! '랄랄라 랄랄라~'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 책은 스머프 뿐만아니라 해리포터, 섹스앤더시티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대중문화 속에 숨겨진 엄청난 음모를 파헤쳤다고 한다. 대체 그 '엄청난' 음모가 어떤 것인지 '엄청나게' 궁금해지는 책. 더불어 소설가 장정일이 그의 <독서 일기>에서 호평했다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져간다. 

 

 

머리아픈 현대 미술의 세계를 짧은 페이지 안에 서술했지만 그 내용은 매우 풍성하고, 미술가와 비평가의 인용문을 많이 실어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흔히 현대미술이라고 하면 비디오 아트나 난해한 이미지가 등장하는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에서는 보다 근대의 작품들까지 포괄하며, 피카소에서 뒤샹, 워홀 그리고 인터랙티브 아트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보여주자 했던 의도를 사회적 맥락 속에 소개하고 있다. 이정도면 현대미술을 위한 진통제가 되어주지 않을까?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차세대 주자들로부터 자신의 작품세계를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미술관에서 낯설음과 난해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보다는 이렇게 책으로 만나 속시원히 이야기와 비평을 함께 나눌 수 있다니 즐거운 일 아닐까? 책에 실린 이미지들을 보니 많이 생소한 작가들이 아니라 더욱 궁금해진다. 참고로 소개된 작품들은 텔레비전12에서 열린 기획전 <Tele.bridge>에 참여한 열 한명의 작가와 주목받는 현대 작가 4명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단편소설이다. 하지만 단순한 소설이 아닌 미술과 소설을 더한 책으로, 화가들과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더했다고 한다. 항상 '미술 도서'하면 그림 감상법이나 예술론, 미학 등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소설을 통해 미술을 바라본다면 새로운 느낌으로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모험적인 도전을 시도해 본다. 물론, 소설의 소재가 된 그림들은 실려있다. 그리고 모딜리아니는 왜 번번이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았는지에 대한 기발한 답변도 준비되어 있다.

 
어느덧 신간평가단 8기 추천 페이퍼도 3회째다. 조금씩 더 익숙해져 가는 느낌...
이제 지난 11월 도서들의 리뷰만 다 쓰고 나면 한 잔을 올려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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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가을의 끝자락이지만 아직도 포근한 비가 내린다.
창문을 열고 글을 쓰는 이 늦은 시간도 전혀 춥지않은...참 묘한 날씨.
올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으려나보다.

2010년을 한 달 남겨놓은 오늘 현재, 6권만 더 읽으면 하반기 30권을 달성한다.
그리고 6권 중 2권은 이미 읽은 상태이니 다음 달은 조금 수월하겠지?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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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은 작년 이맘때쯤 제목에 유혹되어 찜해두었던 책이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이라니...뭔가 대단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몇몇 리뷰에 악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어보았는데, 내용이 엉터리라기보다는 그냥 가벼운 입문서였다. 아마 악평을 했던 분들은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나보다(사실 나도 기대했잖아?). 결론, 이 책은 <세계사 콘서트>라고 이름 붙이면 딱 맞을 것고, 제목이 수준에 적절했다면 그리 욕먹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오래전에 세계사를 배워 생각나는 것이 없다면 기억력 회복 차원에서 한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생각버리기 연습>은 휴식삼아 읽어보았다. 이 책도 내용이 깊다기 보다는 자신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도움이 된 것 같다. 특히 저자의 글 스타일이 나직나직한 편이라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이 책이 베스트 셀러까지 될만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아직 베스트 셀러의 정체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이 책을 계기로 베스트 셀러와 일본 저자의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길게 쓰지 않고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정말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잘 가려 읽어야 겠다고 결심한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은 더이상 말할 것이 없다. 너무 좋은 책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이 달에 이 책 한 권만 읽었어도 뿌듯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책 가격 때문인지 양장이 아니라는 점, (사실 양장이 아닌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지만) 내부 디자인을 조금만 신경써 줬다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책에 실린 사진들은 완전 컬러로, 큼직큼직하고 좋다. 레이아웃이 뭔가 잘못되었거나 미비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왠지 더 디자인을 잘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요즘 너무 디자인에 공들인 책들을 보아서인가? 암튼, 내용에 비해 뭔가 시각적인 면이 1% 부족한 느낌이다.

<영화는 역사다>는 처음 읽어 본 영화관련 책이다. 처음에 책을 받아들었을 때는 근현대사가 잔뜩 등장하고 영화로 간을 맞춘 책이 아닐까 지레 겁(?)을 먹었었는데, 읽어보니 참 괜찮다. 저자의 의도가 뚜렷하고, 역사적 배경이나 역사영화의 관점 변화가 매우 정연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뜻밖에 건진 책' 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서평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맨 마지막장이 '임권택 감독'이다. 우리 영화계에서 40년 이상을 한 우물만 판 거장인데, 생각해보니 그의 일대기나 작품에 관한 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아님, 나만 모르던가...) 그래서, 임권택 감독의 작품들을 연대별로 돌이켜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는 버트런드 러셀의 책이다. 아직 그의 <서양 철학사>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사 놓고도 읽지 못했는데, 이 책부터 읽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집결한 책이라고 회고했다니, 주 저서를 읽지 못하고 먼저 읽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 이 책은 그의 정치철학에 관한 내용이다. 어쩌면 서구 근대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협동조합과 생디칼리즘의 믹스, 그것을 실현하는 길드가 좀 생소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재건에 대한 그의 열띤 강연은 인상적이었다.


이제 이달의 베스트를 꼽을 시간.
다섯권 읽었는데, 유난히 한 권이 뛰어났다.
그 책은 물론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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