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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평점 :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잡힐듯 하면서도 매끄르르 빠져나가는 두 단어의 연관성을 추적하면서 오래전 디자인 과제에 고심하던 추억을 떠올렸다. 한창 썸네일 스케치며 이런저런 기초들을 배우던 시절, 선생님은 아이디어 발상을 위한 과제를 내주셨는데 그것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를 선택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이것은 재미있게 들리지만 하는 입장에서도, 보는 입장에서도 매우 난감한 일이다. 스케치북 한 장에 썸네일 스케치 24개, 한 반에 15명...도합 360개의 이미지들 앞에 선 우리들은 모두 잠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엔 선택된 단어를 쉽게 알아맞출 수 있는 이미지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결과물만 봐서는 도대체 어떤 단어를 선택한 것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고, 이미지로 표현된 단어가 추상적일수록 근원을 찾아내는 일은 더욱 만만치 않았다.
제목에서의 예감이 적중한 듯 고전적 세계와 낭만적 세계로 대변되는 고도의 추상세계를 헤메며 제 3의 무엇, 즉 질(質, Quality)을 도출하는 과정은 두 단어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디자인에 비해 몇 배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하지만 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여행,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의 '야외강연'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깨어지라는 야릇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마치 새로운 이미지를 완성했을 때 스케치북을 보며 뿌듯했듯이 동일한 충족감을 맛보리라 믿으며...
모터사이클을 타고 먼지 범벅이 되가며 통과했던 세계는 실로 다양했다. 공학, 예술 사이를 누볐으며, 철학의 난코스를 탐험하기도 했고, 종교의 심오한 빛을 가로지르다가 신화의 세계를 선회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를 지나오면서 나는 왠지 사진작가 히로시 수지모토의 작품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가 포착한 수평선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음미하면서 주인공이 도달하고자 했던 분투의 흔적들을 돌이켜보고자 한다.
주인공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유령의 세계에 살고 있다. 바로 이 어두침침한 수평선 풍경처럼 말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령이란 아이들이 상상하는 끔직한 혼령의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유령이란 우리가 믿고있는 모든 체계와 법칙들,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여 결국 살아있는 자들을 그 손아귀 안에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관념들을 의미한다. 어쩌면 주인공은 우리의 일상이 기본적으로 만유인력의 유령 위에 유클리드 유령으로 지어진 빌딩 속에서 행해진다고 표현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그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너무나 어둠에 익숙해져 이것이 당연한 세상인양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파이드로스의 자아도 처음엔 이와 같았다. 그는 과거의 자신(파이드로스)과 단절되어 일상의 유령에 묶인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었고, 이는 냉랭하면서 의무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는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어둠속을 가만히 살펴보면 무언가가 보인다(실제 사진도 그렇다). 이것은 마치 천천히 더듬어 되찾아야 할 주인공의 자아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이 여행을 함께 떠날 독자들의 잠재된 파이드로스적 욕망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파이로드스를 통해 꾸준히 듣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고전적 세계와 낭만적 세계일 것이다. 여기서 고전적인 세계란 공학을 의미하고 낭만적인 세계는 예술(혹은 인문)을 의미하는데, 좀 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에 맞는 그의 표현을 빌면 '반듯하게 각져있는 것'과 '히피적인 것'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파이드로스는 스스로 '각져있는 사람'이라 칭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니, 그에 앞서 늘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지...그동안 우리는 서구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져왔다. 그렇기에 두개의 다른 체계가 서로 싸우고 갈등하는 당시 미국 사회에서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파이드로스가 묘사하는 질을 생각해보면 칙센트미하이가 말하고 있는 플로우(Flow)의 개념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저자(이 사람도 역시 파이드로스이다)가 이 글을 쓰던 당시와 비슷한 연대로 기계적 노동자에서 벗어나 자발적 삶을 추구하려는 선각자의 면모를 엿볼 수 볼 수 있다.
파이드로스는 이분법의 세계와 이를 견고히 지켜나가는데 기여하는 '이성의 교회(학교를 의미)'를 혐오하며 갈등하다가 결국 이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제 3의 것, 바로 질이라는 개념을 수립해낸다. 정의될 수 없는 질 혹은 정의되어서는 안되는 질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섬세하고도 치열한 작업이었다. 여기서는 철학에 종교의 개념들이 더해지며 점점 인문학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결국 파이드로스는 한국의 성벽과 도덕경을 통해 A와 B로 인해 생성되는 질이 아닌 질로 인해 생성되는 A와 B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질은 생성된 결과가 아니라 연역체계의 우두머리인 것이다.
난무하는 잿빛 안개가 이전의 이분법이 지배하던 수평선의 풍경을 뒤엎고 있다. 파이로스도 점점 기억을 되찾으며 잃어버렸던 자아를 회복해간다. 이 부분에서는 철학교수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플라톤까지 소환하여 공격을 벌이는데, 그들로부터 비롯된 교육의 중심 진(眞)이 파이드로스가 휘두르는 선(善,진에 대비되며 질에 상응하는 개념)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장면이 목도된다.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절대적인 힘의 근원이 고대 변증법 옹호자들의 독선과 우매함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니...만일 진(眞)을 추구했던 그들이 아닌 선(善)의 추구자 소피스트들이 주도권을 잡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고체계 속에서 살고 있을까? 현대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과거의 연구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이론들을 만들어내지만 파이드로스처럼 뿌리까지 뒤흔들어 예리한 칼로 도려내는 인물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이 소설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문학적 상상이 가미되었다해도 학문에 관한 부분만큼은 실제와 같으니 어쩌면 여기서의 충격은 온전한 소설 속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그것보다 몇 배 더 큰 것처럼 생생히 다가왔다.
하지만 파이드로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출발지에 서있던 '나'가 사라지고 '자아'를 회복한 마당에 그는 그대로 고대 희랍으로 내려가 선의 개념인 '아레테'를 쟁취해 오는데 성공을 거둔다. 마치 괴물을 물리치고 불새의 심장을 빼앗아오는 이야기속 왕자처럼...그리고 증명한다. 변증법 옹호자들이 진(眞)을 내세우기 이전, 선(善)을 중심에 두고 영위했던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고결했는지.
파이드로스가 자아를 회복하며 철학에 분석의 칼을 디밀어 난도질을 하는 동안 그와 아들과의 관계 또한 갈등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냉담이 고조되지 않고 갈등이 고조된다는 것은 회복의 신호. '나'와 아들, ''파이드로스'와 아들 사이에서의 대립은 오히려 그가 자아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간혹 등장하는 크리스의 행복한 모습, "우리가 해냈어요"라는 말들이 이후 화해가 올거라는 기분좋은 예감을 던져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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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명히 드러나는 신비한 세계를 보라. 이것이 파이드로스가 쟁취해 낸 선의 세계이다. 이전처럼 하늘과 바다, 수평선 뿐이지만 어둠이 물러가고 이분과 혼탁이 사라진 이 장면은 질이 세상을 비춰 온통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리고 그도 빛에 눈을 떠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아들과 화해하는 장면에서도 그랬다. 아들 크리스는 "아닌 줄 알았어요"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빠가 미친 것이 아닌 줄 믿었다'는 뜻으로 아빠에 대한 크리스의 변함없는 사랑을 뚜렷이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전달은 '나'가 병원에 갇혔던 꿈에 대해 알 수 없었던 것을 '파이드로스'가 생각해 내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병원(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문을 열려고 했던 그 사람...그가 누구인지 몰라 두려워했던 그 사람은 바로 아빠를 구하려 했던 아들이었던 것이다. 시종일관 두 부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지만 오히려 드문 대화 가운데 이런 사건들이 발견되니 오히려 감동이 애잔하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점은 제목에서 보이는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다. 사실 이야기 속에는 이 두가지에 대한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언급한 것이 있다면 선은 자신을 끊임없이 가다듬는 것이고 모터사이클 관리술은 마찬가지로 모터사이클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뜻하는데, 둘 다 꾸준한 노력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이야기는 결말 속에서 매우 희망적으로 연결된다. 파이드로스는 아들 크리스가 크면 모터사이클을 갖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승락하며 '관리'를 잘 해야한다는 조언을 한다. 이어 관리하는 것이 어렵냐는 아들의 질문에 올바른 자세만 갖는다면 어렵지 않다고 대답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가 묻는다.
"아빠?"
"응?"
"저도 올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럼." 내가 이렇게 말을 잇는다.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정신병으로 전기충격치료까지 받았던 파이드로스, 그리고 그의 병을 이어받아 간혹 증세를 보이는 아들 크리스. 그러나 파이드로스가 자신이 미치지 않았음을 스스로도, 아들을 통해서도 확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상의 사고체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신념이 미치지 않았음을 역설하는 의미일까? 그의 답변은 아무런 주저없이 명쾌한 긍정이다. 이것은 어쩌면 잃어버린 자아와 세상의 질을 되찾은 승리자의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대답은 아들 크리스에게도 그리고 내재된 파이드로스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은빛 가득한 희망의 메시지로 그대로 전달된다. 우리도 파이드로스라면 세상의 99%를 이기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비난받던 경구를 진지하게 실천해봄직도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