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읽어본 바, 현대미술의 코드를 안내하는 책은 아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애하는 윌렘 드 쿠닝씨께

드 쿠닝씨,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그림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얼마 전 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 보니까 당신의 드로잉이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보다 더 안전한 자신이라는 놀라운 구절이 있더군요. 저는 미술작품을 살 만큼 큰 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 10년전 구입한 당신의 작품집을 가지고 있어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책의 속지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필 사인본이라면 당신의 드로잉만은 못해도 미래에 상당히 가치있는 고서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이런 이메일은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드 쿠닝 또한 읽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스펨메일함으로 클릭!).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불안이 계속되고 물가가 헬륨 풍선처럼 두둥실 솟아 내려앉을 줄 모르는 상황이라면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해봄직 하다. 게다가 가혹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고 심지어 화기애애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곳은 과연 경제를 떠난 무릉도원인가 싶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티 옥션은 경제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만불이 넘는 작품을 793점이나 팔았다고 한다. 반대로 경기가 호조되어 투자할 곳이 많아지면 미술계는 오히려 한산해진다. 이러한 동향은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계를 일반화하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미술 작품도 자산가치에 일조하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젠 미술계의 신은 비너스가 아니라 마이더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비너스는 마이더스에게 고용되 월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이야기만 빼놓고 그 나머지를 쫓아가는 이 여행은 5개국 6도시를 횡단하며 7가지의 이야기들을 채집한다. 모두 각계의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무척 생생하고 현장감이 있다. 정작 7일이라는 짧은 일정동안 장거리 여행을 소화한 저자는 의외로 여유있었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가뜩이나 생소한 미술계의 뒷 이야기를 듣는데다 미술을 대하는 다양한 시선들이 등장하고 있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알게 된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이것은 비록 예술로서의 미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은 깨어놓긴 하지만 미술계를 움직이는 역동성의 모습이기에 관람객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5개국 6도시 7가지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한다..........옥션 :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옥션이다. 가장 상업성이 짙은 미술계의 단면이며 미적인 안목 이외의 실력을 가진 대단한 프로들이 활약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회화, 조각, 사진 작품들은 재산, 자산, 품목으로 묘사된다. 좋은 바스키아 작품은 제작년도가 1982년인지 1983년인지 혹은 그림에 머리, 왕관, 빨간색이 들어가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좀 희안한 곳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작품을 보호하고 전문성에 의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찾아주는 일에는 매우 공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저 비싸게 팔고 톱뉴스를 만들어 내는데 혈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스튜디오 : 현대미술의 상업적인 측면들만 다룰 줄 알았는데 갑자기 LA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의 비평수업이 이어져 잠시 놀랐다. 옥션에서처럼 명품에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휘감은 프로들은 간데 없고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수업 도중 샌드위치나 쥬스를 마시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들,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업풍경을 엿볼 수 있다. 비평수업을 소개하는 의도는 미술 비즈니스의 기본 언어를 배우는 곳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크릿(Crits,비평)이 실제적으로 미술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가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학생들 중 미술계의 좁은 문을 통과해 주목받는 스타 아티스트가 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며 나머지는 비싼 학비를 갚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다는 현실에는 공감하지만..........아트페어 : 다시 옥션과 유사한 긴박감이 흐르는 장소이다. 그러나 장소는 저 멀리 스위스로 이동해 왔다. 억만장자, 백만장자들이 인파를 이루고 문일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구입경쟁의 장면. 바젤 공항보다 더 엄격한 통제. UN처럼 비상업적인 국제회의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엄청난 규모의 돈과 상품(작품)이 오가는 미술상업의 현장이다. 여기서는 신진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꽤나 각광을 받는다. "40개 정도, 좋은 작품을 건진 것 같아요." 세상에, 한꺼번에 미술작품들을 40점이나 사다니. 이곳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딜러들의 빠른 안목과 솜씨가 정말 놀라웠다. 아트페어에서의 교훈은? 막판 세일을 기다리지 마라..........미술 상 : 비행기를 타고 날아 런던 테이트 미술관으로 이동한다. 큐레이터들의 지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최신 미술계 기사를 장식하는 친숙한 이름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권위있는 터너상 답게 일정과 선정과정은 엄격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정된 작품은 경악을 자아낼 만큼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는 딱 2명이라는 점에서는 여타 남성위주의 미술 상과 다를 바 없는 결과이다. 또한 이 상의 후보작의 경우 작품값의 1/3이상, 수상작은 2배 이상 상승한다니, 미술 상의 권위가 미술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필요한데, 이에 관한 고민은 책 속에 자세히 나와 있다..........미술 잡지 : 쾌활하고 입심좋은 직원들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현장은 다시 미국 뉴욕에 위치한 잡지사 아트포럼이다. 전화소리도 간간히 들릴 듯 분주하다. 아트포럼은 우리나라의 월간미술 정도에 해당하는 잡지인데, 세계적으로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적은 고료에도 불구하고 글을 기고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수상 한 방으로 큰 돈을 버는 아티스트와 무척 대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물론 이것은 무명 학자와 유명 아티스트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술잡지의 기획기사 같은 것이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대표 소유주 토니 코너의 의지와 '한점의 오류도 없는' 기사에 집착하는 편집국장 제프 깁슨 같은 인물 덕에 오늘도 아트포럼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작가 스튜디오 : 이번에는 정말 멀리 갔다.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있는 도쿄까지 갔으니까 말이다. 무라카미는 <오벌 붓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여기에 쏟아 부은 주물은 물론이고 제작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잡동사니(주로 재료들)나 물감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조용하고 소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무라카미의 작업실은 고용된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같다. 기본적으로는 예술작품을 생산하지만 그 외에 디자인이나 패션 브랜드에 관련된 일도 한다. 알고 보니 작업실이 일본에 세 군데나 있다. 좀 기묘한 분위기의 작업실이었다. 이런 작업실이 미래 우리 미술가들에게도 트렌드(?)가 될까? 순수 예술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산업 전반에 관여하는 기업같은 작업실 말이다..........비엔날레 : 비엔날레는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하긴 하지만 진정한 비엔날레는 도시가 주체가 되어 국제적 차원에서 열리는 행사를 의미한다. 미술계의 비엔날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비엔날레는 바로 베니스 국제 비엔날레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며 국가별 부스로 운영된다. 사실 비엔날레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성대한 파티와 개성있는 각국의 전시관으로 붐벼 가장 화려했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명한 큐레이터가 던진 한 말씀은 기억에 남는다. "비에날레는 원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이는 이미 합의된 것, 검증된 것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불안정한 것을 제도권 내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긴 여행이 끝났다. 아니, 짧은 여행인데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걸작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 상업주의에 물든 미술계를 속속들이 파헤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미술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념이나 직업적 윤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미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모두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견해와 안목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더이상 구매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치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발굴하고 이슈화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미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작품의 구매를 최상류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귀족적 취향의 전유물로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들의 보급과 작품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관람객인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질 때 마이더스도 비너스를 착취하는 부당 권력이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어느덧 신간평가단 9기 활동이 끝나고 또 이렇게 마감 페이퍼를 씁니다. 정말 세월이 어찌 흐르는지 6개월이 순식간에 사라졌네요. 그동안 매달 5권씩 추천을 했고, 제 경우 12권 중 8권이나 원했던 책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추천한 책이 아니더라도 대체적으로 맘에 들어 더이상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은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입니다. 음악에 관한 책들은 상대적으로 적게 출간되고 간혹 마주치게 되더라도 클래식 입문서나 예술기행과 병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한 작곡가에 집중해서 좀 더 음악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말 잘 만들었더군요. 음악을 전공하신 분들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 대중인 저로서는 음악에 대해 이처럼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이끌어 주는 책은 처음 봅니다. 이건 이 책을 구상한 기획력이라 생각되는데요, 한 사람으로서의 차이콥스키, 한 음악가로서의 차이콥스키를 잘 보여주었고, 그의 음악적 궤적과 해석, 그리고 관련된 지식까지 두루두루 잘 갖춰 놓았습니다. 대체적으로 자신이 추천한 책이 아닌 경우 받아보고 감탄까지 하게 되는 경우는 드문데요, 이 책은 선례를 깨고 저의 사랑을 듬뿍 받은 책이랍니다. 한창 여름에 읽은 책이라 시원하게 냉방된 방에서 음악 틀고, 아이스크림까지 먹으며 무척 즐겁게 읽은 책이기도 합니다.




내맘대로 베스트는 정말 추려내기 힘들어요. 다들 좋은 책이었고, 감흥도 비슷비슷해서 순위 매기기가  참 그렇네요. 그래서 그냥 가나다 순으로 적어봅니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도 베스트에 들긴 하지만 위에 기억에 남는 책에 별도로 택했기에 더 많은 책을 꼽고 싶어 여기서는 뺐어요.

<민화,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에 대해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의 대표 민화를 소개하고 감상의 포인트나 관련 지식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민화나 우리나라 궁중화, 문인화와 비교해 가면서 설명해 준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민화속의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이 너무 순진하고 재밌어서 막 웃으며 그림을 보았던 기억도 나네요.


<사유속의 영화>
이 책은 처음 접하는 영화 이론에 대한 책이라 두 번 하고도 포스트잇을 찝어 놓은 것까지 합해 반쯤 더 읽었습니다. 가장 시간을 많이 들여 읽은 책이지요. 100%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영화에서 생명을 끄집어 내고 세포를 끊임없이 재생시켜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사진 철학의 풍경들>
마음이 참 고요해지는 책이었습니다. 암실에 들어가 어둠 속에서 필름을 감는 느낌, 더듬더듬 거리는 느낌인데 매우 아늑하더군요. 덕분에 사진함에 대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다시 돌이켜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분명 수업시간에 들었던 이야기들이 적지 않은데(물론 이것은 교양과목으로 들은 것입니다), 이렇게 철학과 함께 엮어 놓으니 문득 새롭고 더 묵직하게 들립니다.



<지혜로 지은 집, 한국 건축>
한국건축에 대한 책들은 주로 한옥이나 궁궐, 사찰에 대한 책인데 전공서적 아니면 지어지는 과정이나 세부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물론 이 책도 거의 전공서적에 가까운 내용이고 구성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학적인 축조방식에 대해 심도있게 설명해 주어서 정말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네요. 조금만 더 대중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엮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모더니즘편>
현대미술의 한계에 대해 배운 적은 있지만 이렇게 그 한계로부터 출발해 역으로 습격한 책은 처음입니다. 미학의 눈으로 보았다지만 의외로 작가나 작품, 역사적 배경이 꼼꼼하게 설명되어 있어 매우 드라마틱한 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습니다(그렇다고 미학적인 내용이 생각보다 덜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지막에 나가는 글에서 키치에 대한 운을 띄웠고 다음번에는 동시대 미술을 다룰 예정이라니, 다음 책도 기대가 됩니다.




이상, 신간평가단 마지막 페이퍼를 마치구요, 그동안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마감 날짜를 잘 못 지켰다는점...ㅠ.ㅠ 마지막에는 꼭 지키리라 안간힘을 썼는데 또 주말을 빌고 있네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명 화가들의 반란, 민화]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론, 책이란게 손보다는 발로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옛날 책이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볼 때가 그랬고, 그 맥을 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에서도 그랬으며, 널리 알려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몇 십년을, 혹은 평생을 바쳐가며 발로 찾고, 경험하고, 채집해 온 이야기들에는 지력과 상상력으로만은 엮어낼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다. 고매한 것으로 치면 영-혼-육의 순으로 나열된다는데, 이런 책에서 만큼은 육의 지극함이 영의 위치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도 발을 통해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지난 10여년간 우리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주저않고 발길을 재촉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화들을 모아 무명화가들의 얼을 이 책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격조 낮은 속화라고 알려져 있고 대표적인 작품 몇 점 외에는 접할 기회가 흔치 않지만 실상 옛 시대에는 그림 수요의 90%를 담당할 만큼 제작이 빈번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도 예상 밖으로 다양하고 수량도 많았다. 이처럼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담당했던 민화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민화가 가진 상상력과 추상성의 힘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필적할 만큼 대담한 추상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치는 민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며, 해외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민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동안 '격식', '품위', '고급'이라는 잣대로 폄하되었던 무명화가들의 설움이 드디어 위안을 얻고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궁중화나 문인화에 비해 민화가 가진 특성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민화가 갖는 특성이며, 우리 민화의 경우 보다 고요하고 내적인 충실성을 갖춘 것이 두드러진다. 같은 모란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화 속의 모란은 단아하고 고요한 자태를 가지고 있으며 향기 없는 모란 곁에 나비 한 쌍을 하늘거리게 하는 상상력과 수석의 깔끔한 기하학적 패턴이 돗보인다. 반면 우리나라 궁중화 속의 모란은 만개의 절정에 달해있는 모습이고 수석도 패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윤곽을 묘사했다. 또한 가급적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여백없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상상의 나비를 불러 오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민화의 모란을 보면 민화로서의 순진함이나 상상력은 돗보이지만 우리 민화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며 강렬한 색채와 패턴에 보다 집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화도 장식적이고 패턴에 집중된 작품들이 있지만 색채의 활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전달되 온다. 



민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책거리, 문자도, 까치와 호랑이, 용, 십장생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일반적으로 친근하고 익숙한 것은 책거리, 그리고 까치와 호랑이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너무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그동안 익숙하다 느꼈던 책거리, 까치와 호랑이라도 마냥 새롭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까치와 모든 호랑이를 모아놓은 듯 갖은 표정과 몸짓을 취하고 있는 까치와 호랑이도 인상깊었지만 가장 흥미롭고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은 책거리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양반들의 전유물인 책거리 그림이 어째서 민화일까?'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는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질문의 실마리가 될 상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양반도 아닌 민화 화가들이 책이 잔뜩 쌓여있는 책거리를 그리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주문에 의해서였다. 사실 책거리는 궁중에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된 적도 있으며, 양반집에서는 기복(과거 급제, 건강 등)과 장식을 위해 선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에 묘한 장난기가 섞이며 풍자와 해학이 가해져 책거리는 사랑받는 민화의 주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특히 책거리들 사이에 살포시 얹혀있는 여인의 옷은 얼핏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후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상당히 과감하고 해학적인 그림임에 틀림이 없다(대체 선비는 먹을 갈다 말고 여인과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은근한 에로티시즘의 극치이다). 현재 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민화는 책과 장식물이 럭셔리하게 가득 채워진 책거리 민화라는데, 그들이 수집하고자 하는 품위있는 책거리보다는 이 묘하기 짝이 없는 상상적인 책거리가 훨씬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에 실린 민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혹시 민화는 당시 만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에 독특한 점이 있다. 어떤 그림은 후세의 누군가가 민화에다 만화로 낙서해 놓은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들의 형태나 눈맵시에서는 현대의 만화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감정이 돗보이고, 스르르 사라질 듯한 용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상상력이 넘쳐난다(앨리스의 체셔 고양이 같지 않은가!). 또한 호랑이 그림은 부숭부숭한 털만 가지런히 정리한다면 박수동의 고인돌 만화에 삽입해도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처럼 그림의 단순화에 있어 파격적이고 예측불가했던 그림이 민화라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우리 민화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미술연구가들과 미술가들이 민화에 관한 찬사의 정의를 내려왔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 '자연의 꿈', '추상적 환상'. 어느 하나 우리 민화를 얘기하는데 손색없는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그런데 민화 전문가 김철순은 민화가 '누나의 자수'와 같다는 신선한 정의를 내리고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민화는 현재, 현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꿈은 이룰 수 없는, 바랄 수 없는 것에 걸어보는 기대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누나의 자수를 들여다보듯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본 어른들의 꿈이 바로 한국 민화의 꿈이었다. 그들의 인생과 자연 자체가 큰 꿈이고 예술이 바로 꿈이라고 믿고 있어서 사람과 인생 자체를 아름다운 꿈으로 표현했다."(p.26)

참 신기한 일이다. 비록 민화를 그린 화가가 무명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남자였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누나의 자수'와 같은 여성적인 물건과 비교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장식용이었던 민화가 갖는 평면적 패턴을 들어 설명하는데, 민화 느낌은 형태의 단순화와 패턴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자수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철순의 설명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바로 삶과 꿈과 예술이 잇닿는 아름다운 경지이다. 이것은 어떤 한계를 초월하여 그림에서 금시조가 날아오르는 득도(得道)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춤으로 치면 흥겨운 몸짓 하나가 악사들의 악기에 소리를 오르게 하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마침내는 커다란 무리가 공감하는 경지. 그 자유롭고도 강렬한 미의 본능이 바로 민화의 힘이자 민중의 힘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기억속의 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 기억 속의 색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청소년권장도서
미셸 파스투로 지음, 최정수 옮김 / 안그라픽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는 인간이 되어버린 천사, 다니엘의 이야기가 있다. 다니엘은 타락한 것도, 징계를 받은 것도 아니지만 한 여인을 사랑해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결심해버렸다. 그가 날개를 잃고 인간이 되던 첫 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색깔'이었다. 단조로운 흑백인줄만 알았던 세상이 난생 처음 보는 색깔들로 가득한 것이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천사로서의 영생이나 특권도 포기할만 했다. 이때 커다란 스크린에서도 흑백이 물러가고 아름다운 색깔들이 침범한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가 처음 경험했던 색깔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전달 받을 수 있으며 신기한 듯 세상을 둘러보는 다니엘의 맑은 눈동자를 통해 잠시나마 색깔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여기 또 다른 천사가 인간이 되었다. 그는 키도 작고 뚱뚱해 그다지 이상적인 천사의 형상은 아니지만 색깔을 향해 보내는 호기심 만큼은 다니엘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바로 이 책의 저자 미셸 파스투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서 기억하지도 감동받지도 않는 색을 특별한 것인양 시시콜콜 수집해 늘어놓는 그는 분명 전생에라도 천사였다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그가 색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독자는 막연하고 사소했던 색깔의 추억을 조금씩 조금씩 회복한다.

저자는 1950년대부터 약 60년간 색에 관해 보고, 경험하고, 느낀 것을 증언하고픈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역사적 변천을 되새기고 다양한 방면으로 비평이나 논평을 가하고 싶었다 고백한다. 그의 간절한 욕구를 실행하도록 도와준 것은 바로 프랑스 문단의 악동 조르주 페레크인데, 저자는 페레크의 <나는 기억한다>라는 작품처럼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p.15)을 환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문장이다. "나는 기억한다. 드 골 장군에게 앙드레라 불리던 형제가 있었던 것을. 그가 다갈색 머리를 가졌고 파리국제박람회의 부책임자였던 것을."(p.16)

사실 페레크의 책에 쓰여진 문장은 "나는 기억한다. 드 골에게 피에르라는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그는 파리국제박람회를 이끌었다."이다. 여기에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름과 색깔과 직위에 변화를 주어 묘한 뉘앙스(그의 표현에 따르면 '통속극')를 자아냈다. 말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평범하고 모두에게 공통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기억'에 상상과 은유를 보태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색깔 이야기를 만들어 간 것이다. 그렇기에 책 속의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 아닐 수도 있고 지극히 주관적일 수도 있으며 어떤 의도를 위해 부풀려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왜곡을 위한 왜곡이 아니라 색에 관한 기억을 보다 명료히 하기 위한 기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문학적 상상과 학문적 사실의 중간지대에서 더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다.

상상과 사실 간의 교묘한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 저자는 절대 색깔을 보여주지 않는다. 어릴적 그토록 원했던 초록색 자전거도, 서구의 상징인 인디고 청바지도, 프랑스의 삼색 국기도 모두 하얀 종이 위에 글자로만 표현될 뿐 사진 한 장 삽입된 글이 없다. 또한 가급적 색이 가진 고유이름도 사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색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여 세분화된 색이름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평범하게 빨간색, 초록색, 회색 등이며 간혹 눈에 띈다고 해도 '인디고'나 '머룬' 정도이다. 이처럼 파랑이라도 네이비 블루, 로얄블루, 인디고 블루와 같이 구체화하지 않고 그냥 뭉뚱그려 '파랑'이라고 한 것도, 그것을 떠올리는 개인의 상상력에 커다란 자유를 부여하며 평범한 일상의 일부로 누구라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다.

색에 관한 이야기가 저자의 유년시절을 매개로 펼쳐지는 것 또한 독자로 하여금 쉽게 추억 속으로 빠져들게하는 장치다. 그리고 색연구가로서 밝히는 사실적인 이야기에 상상과 함축의 여운을 남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장치때문이다. 프랑스인인 저자의 유년시절 이야기라 이국적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우리와 공통된 관념 또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빨강색이 가지고 있는 반항, 불온의 의미나 감색이 가지고 있는 무난함과 점잖음에 대해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초록색 신호등을 '파란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들이 보라색의 포도주를 '적포도주'라고 하는 것, 즉 '색의 상징성'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미테랑 베이지에 가서는 벽에 부딪힌다. 베이지는 베이지인데 '미테랑 베이지'라니? 그가 대체 어떤 베이지색의 옷을 입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색을 통한 저자의 정치적 견해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다양한 색을 묘사함에 있어 어떤 색에서는 고정관념을 풀어 자유를 주기도 하고, 어떤 색에서는 반발심을 표현하기도 하며 역사적인 서술뿐만 아니라 개인의 감정 또한 흥미롭게 반영해 내고 있다.

우리는 색이 갖는 다양한 상징성에 대해 사회적 관념이나 어떤 사건을 통해 습득해 나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색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지배한다기 보다는 결국 사회인으로서 오랜 기억을 통해 각인된 색에 우리 사고를 지배당할 수 있다. 때로 이것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런데 저자는 역사학자들을 비롯 많은 학자들이 이를 간과했다고 불평하며,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구분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매우 날카롭게 분석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서 조차 색이 빠져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대목을 보면 이 책은 단순히 색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과 향수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색을 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막 인간이 된) 천사의 눈으로 바라 본 색은 결국 (늘 인간이었던) 인간의 눈으로 바라 본 색과 마주치게 된다. 인간의 눈이란 역사의 현장을 목격해 왔던 눈들이다. 여기에는 금기와 고정관념을 형성하는 권력으로서의 색도 있고,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따스함을 일으키는 개인으로서의 색도 있으며,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기능을 수행하는 규범으로서의 색도 있다. 모두 너무나 익숙해져서 깨닫지 못했던 색깔들이며 어떤 면에서는 길들여져서 딱딱하게 굳어진 색깔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천사의 눈과 인간의 눈이 교차하는 시점, 상상과 사실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장에서 우리는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색들이 의미로 다가옴을 느낀다. 비로서 진정한 색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억 속의 색>은 진정한 색의 스펙트럼을 열어주는 지각의 빛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아마도 흰 종이와 검은 글씨라는 무채색의 효과가 커다란 힘을 발휘한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