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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작의 뒷모습 - 옥션에서 비엔날레까지 7개 현장에서 만난 현대미술의 은밀한 삶
세라 손튼 지음, 이대형.배수희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9월
평점 :
친애하는 윌렘 드 쿠닝씨께
드 쿠닝씨,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그림을 눈여겨 보았던 사람입니다. 제가 얼마 전 세라 손튼의 <걸작의 뒷모습>이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거기 보니까 당신의 드로잉이 리먼 브라더스의 주식보다 더 안전한 자신이라는 놀라운 구절이 있더군요. 저는 미술작품을 살 만큼 큰 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약 10년전 구입한 당신의 작품집을 가지고 있어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책의 속지에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필 사인본이라면 당신의 드로잉만은 못해도 미래에 상당히 가치있는 고서적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도움을 주실 수 있을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이런 이메일은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드 쿠닝 또한 읽어 보지도 않을 것이다(스펨메일함으로 클릭!). 하지만 요즘처럼 경제불안이 계속되고 물가가 헬륨 풍선처럼 두둥실 솟아 내려앉을 줄 모르는 상황이라면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해봄직 하다. 게다가 가혹한 경제상황에도 불구하고 미술계는 태풍의 눈처럼 조용하고 심지어 화기애애해 보이기까지 하니, 이곳은 과연 경제를 떠난 무릉도원인가 싶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2007년 크리스티 옥션은 경제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만불이 넘는 작품을 793점이나 팔았다고 한다. 반대로 경기가 호조되어 투자할 곳이 많아지면 미술계는 오히려 한산해진다. 이러한 동향은 불투명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계를 일반화하기에 아직 부족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미술 작품도 자산가치에 일조하는 '상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이젠 미술계의 신은 비너스가 아니라 마이더스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비너스는 마이더스에게 고용되 월급을 받는지도 모르겠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이야기만 빼놓고 그 나머지를 쫓아가는 이 여행은 5개국 6도시를 횡단하며 7가지의 이야기들을 채집한다. 모두 각계의 전문가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 무척 생생하고 현장감이 있다. 정작 7일이라는 짧은 일정동안 장거리 여행을 소화한 저자는 의외로 여유있었다고 말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는 가뜩이나 생소한 미술계의 뒷 이야기를 듣는데다 미술을 대하는 다양한 시선들이 등장하고 있어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알게 된다. 미술계에서 미적인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것을. 이것은 비록 예술로서의 미술에 대한 환상을 조금은 깨어놓긴 하지만 미술계를 움직이는 역동성의 모습이기에 관람객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5개국 6도시 7가지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한다..........옥션 :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옥션이다. 가장 상업성이 짙은 미술계의 단면이며 미적인 안목 이외의 실력을 가진 대단한 프로들이 활약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회화, 조각, 사진 작품들은 재산, 자산, 품목으로 묘사된다. 좋은 바스키아 작품은 제작년도가 1982년인지 1983년인지 혹은 그림에 머리, 왕관, 빨간색이 들어가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좀 희안한 곳이 아닌가?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아티스트들과 그들이 작품을 보호하고 전문성에 의해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주인을 찾아주는 일에는 매우 공정한 모습을 보인다. 그저 비싸게 팔고 톱뉴스를 만들어 내는데 혈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닌 것이다..........스튜디오 : 현대미술의 상업적인 측면들만 다룰 줄 알았는데 갑자기 LA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Arts)의 비평수업이 이어져 잠시 놀랐다. 옥션에서처럼 명품에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휘감은 프로들은 간데 없고 헐렁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수업 도중 샌드위치나 쥬스를 마시거나 토론에 참여하는 학생들, 자유로운 분위기의 수업풍경을 엿볼 수 있다. 비평수업을 소개하는 의도는 미술 비즈니스의 기본 언어를 배우는 곳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크릿(Crits,비평)이 실제적으로 미술 비즈니스를 염두에 두고 진행되는가에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기 힘들었다. 물론, 이 학생들 중 미술계의 좁은 문을 통과해 주목받는 스타 아티스트가 되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며 나머지는 비싼 학비를 갚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다는 현실에는 공감하지만..........아트페어 : 다시 옥션과 유사한 긴박감이 흐르는 장소이다. 그러나 장소는 저 멀리 스위스로 이동해 왔다. 억만장자, 백만장자들이 인파를 이루고 문일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구입경쟁의 장면. 바젤 공항보다 더 엄격한 통제. UN처럼 비상업적인 국제회의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 엄청난 규모의 돈과 상품(작품)이 오가는 미술상업의 현장이다. 여기서는 신진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꽤나 각광을 받는다. "40개 정도, 좋은 작품을 건진 것 같아요." 세상에, 한꺼번에 미술작품들을 40점이나 사다니. 이곳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딜러들의 빠른 안목과 솜씨가 정말 놀라웠다. 아트페어에서의 교훈은? 막판 세일을 기다리지 마라..........미술 상 : 비행기를 타고 날아 런던 테이트 미술관으로 이동한다. 큐레이터들의 지적인 냄새가 물씬 풍겨오고 최신 미술계 기사를 장식하는 친숙한 이름들이 종종 눈에 뜨인다. 권위있는 터너상 답게 일정과 선정과정은 엄격하지만 결과적으로 선정된 작품은 경악을 자아낼 만큼 도발적이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상을 받은 여성 아티스트는 딱 2명이라는 점에서는 여타 남성위주의 미술 상과 다를 바 없는 결과이다. 또한 이 상의 후보작의 경우 작품값의 1/3이상, 수상작은 2배 이상 상승한다니, 미술 상의 권위가 미술 비즈니스에 미치는 영향 또한 대단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정한 심사가 필요한데, 이에 관한 고민은 책 속에 자세히 나와 있다..........미술 잡지 : 쾌활하고 입심좋은 직원들이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현장은 다시 미국 뉴욕에 위치한 잡지사 아트포럼이다. 전화소리도 간간히 들릴 듯 분주하다. 아트포럼은 우리나라의 월간미술 정도에 해당하는 잡지인데, 세계적으로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적은 고료에도 불구하고 글을 기고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수상 한 방으로 큰 돈을 버는 아티스트와 무척 대조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물론 이것은 무명 학자와 유명 아티스트를 비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미술잡지의 기획기사 같은 것이 난해하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대표 소유주 토니 코너의 의지와 '한점의 오류도 없는' 기사에 집착하는 편집국장 제프 깁슨 같은 인물 덕에 오늘도 아트포럼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작가 스튜디오 : 이번에는 정말 멀리 갔다. 무라카미 다카시라는 일본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있는 도쿄까지 갔으니까 말이다. 무라카미는 <오벌 붓다>라는 작품으로 유명한데 여기에 쏟아 부은 주물은 물론이고 제작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티스트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잡동사니(주로 재료들)나 물감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고 조용하고 소박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무라카미의 작업실은 고용된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같다. 기본적으로는 예술작품을 생산하지만 그 외에 디자인이나 패션 브랜드에 관련된 일도 한다. 알고 보니 작업실이 일본에 세 군데나 있다. 좀 기묘한 분위기의 작업실이었다. 이런 작업실이 미래 우리 미술가들에게도 트렌드(?)가 될까? 순수 예술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디자인 산업 전반에 관여하는 기업같은 작업실 말이다..........비엔날레 : 비엔날레는 유명 미술관에서 개최하긴 하지만 진정한 비엔날레는 도시가 주체가 되어 국제적 차원에서 열리는 행사를 의미한다. 미술계의 비엔날레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비엔날레는 바로 베니스 국제 비엔날레이다. 여기에는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하며 국가별 부스로 운영된다. 사실 비엔날레에서는 예상했던 대로 성대한 파티와 개성있는 각국의 전시관으로 붐벼 가장 화려했음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미술관과 비엔날레의 경계가 갈수록 모호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명한 큐레이터가 던진 한 말씀은 기억에 남는다. "비에날레는 원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해요. 이는 이미 합의된 것, 검증된 것을 되풀이할 게 아니라 불안정한 것을 제도권 내에 가져오는 것을 의미해요."
긴 여행이 끝났다. 아니, 짧은 여행인데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걸작의 '뒷모습'이라고 하기에 상업주의에 물든 미술계를 속속들이 파헤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그들이 미술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신념이나 직업적 윤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미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모두 미적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확고한 견해와 안목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제 '명화'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더이상 구매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가치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발굴하고 이슈화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남겨진 미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미술작품의 구매를 최상류층이나 향유할 수 있는 귀족적 취향의 전유물로 볼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들의 보급과 작품대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작업에 관람객인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질 때 마이더스도 비너스를 착취하는 부당 권력이 아니라 문화적 풍요로움을 관장하는 훌륭한 일꾼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