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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글.사진 / 문예중앙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은 변하지 않았다. 탄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다. 사진이 거짓말을 했다면 사진을 다룬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진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사실로 받아들여달라고 한 적도 없다. '사실 그대로만 말한다'고 선언한 적도 없다.(p.34-35)


별다른 생각 없이 책을 읽어 나가다가 문득 이 한 장의 사진과 엮인 문장에서 덜컥 가슴이 멈췄다. 일종의 항변과도 같이 '사진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말하는 것에 새삼 감동이 와 닿았던 까닭이다. 왜 그랬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하이브리드적 기교와 변형으로 포화된 작품들에 익숙해져 사진의 '사실이 아님'을 너무 당연시 해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사진가의 예술적 영감과 솜씨로 진행된 작업이었기에 카메라 자체에도 '변형'이라는 본연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지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낱 기계에 불과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의 묘사요, 그것을 사실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암암리에 동의했었다.

이 부분에서 멈춰서며 혹시 지나온 글에도 내가 무심코 넘겨버린 글귀가 있을까 되돌려 보다가 책의 첫머리와 다시 만난다. 거기에는 어둠에 둘러싸인 낡은 마루바닥의 사진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었고 한 귀퉁이에는 작은 글씨로 '당신의 눈이 카메라의 눈이 될 때'라고 적혀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참으로 잊기 쉬운 말이기도 했다. 카메라의 눈이 된다는 것은 사진가가 나의 눈을 주장하지 않고 카메라의 눈을 존중한다는 겸허한 자세가 담겨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보면 어느새 (안 찍다보면 더더군다나) 내가 카메라를 부리는 양 착각에 빠질때가 있다. 익숙하다보면 기본적인 것들을 잊고 타성에 젖거나 자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가장 기본적인 '카메라의 눈'을 '인식의 풍경'의 출발점으로 삼고 점차 독자와 한 대의 카메라가 혼연일체인듯 어둠 속에서 철학의 빛을 조금씩 흡수케 하며 종국에는 '사진이라는 것'에 대한 각자의 의미를 한 장의 사진으로 인화해 내게 한다.

카메라에는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밝은 방)'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어두운 방)'가 있다. 그러나 '카메라 루시다'가 최초 카메라의 원형임에도 '카메라 옵스큐라'를 택하고 발전시킨 것을 보면 사진은 본질적으로 어둠의 속성과 더 친밀한 듯 하다. 사진은 '지나간 시간의 상처', 사진은 '하찮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사진은 '욕망의 음화들'이라고 말하는 글귀들과 수많은 철학자들이 사진에 관해 남겨 놓은 이야기에는 공통적으로 슬픔이 흐른다. 이성적이고 냉철할 것 같은 것이 철학적 사유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감성을 자극한다. 이에 더해 수록된 대다수의 사진들은 어둠이 강조된 흑백사진들이다. 간혹 컬러가 있다해도 어둠 가운데 깊이 잠겨있다. 모두 사라져갈 시간들이고 존재들이기에 어둠으로 애도하는 듯 흑백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진리는 오히려 스러져가는 초라한 오브제에서 더 쉽게 발견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그랬다. 그는 고흐의 <구두 한 컬레>를 보기 전까지 예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낡고 닳아빠진 구두 그림에서 존재의 시간을 바라보게 하는 진리를 발견하고는 그의 후기철학을 크게 변화시킬만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진을 통해 미의 진리에 다가서려는 사진가. 그런 사진가만이 삶을 지시하고 존재와 시간이 표명하는 예술의 근원 속에 자리할 수 있다. 고흐가 가시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내재적 성질(존재와 시간)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처럼. 평범하지만 진리로 이끄는 성질과 본래의 자리로 돌려주는 환원의 힘을 보았던 것처럼, 미적 대상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p.236)


하이데거로부터 예술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면 이번에는 예술의 선(善)을 이야기하는 수전 손택의 철학을 들어보자. 손택은 이미지 사냥꾼처럼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헤메는 '사진의 폭력성'을 비난하며 이에 대한 사진가의 자세로 피사체를 향한 부단한 성찰과 반성, 아름다움으로 가장한 위선을 벗겨내는 이성적 자각을 꼽았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탐닉하고 유희하는 현실에서 사진이 선(善)의 예술이 될 수 있는 길도 답변해 준다.

일단 세상 저쪽을 볼 줄 아는 시선, 카메라에 찍힌 그 너머(은폐된 것)를 볼 줄 아는 시선이다. 또 삶의 안쪽을 볼 줄 아는 시선이고, 시간으로부터, 시간 속에서, 시간에 기대어 참을 인식하는 올곧은 시선이다.(p.305)

이밖에도 이 책에는 존 버거, 롤랑 바르트, 발터 벤야민, 질 들뢰즈, 헤겔, 푸코, 칸트를 비롯해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사유를 발췌해 저자만의 새로운 고리로 연결시켜 나갔으므로 사진 이론의 느낌 보다는 (예술)철학 에세이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푼크툼, 미메시스, 판타스마고리아, 시뮬라크르와 같은 전문 용어들이 종종 등장하고 실재, 시간, 우연성, 오브제 등 빠질 수 없는 모호한 사진의 개념들이 이어지지만 '사진함(photographing)'에 있어 한번쯤 생각해 볼 것들을 표방하는 고로, 사진가 선배에게서 들을 수 있는 친근하고 섬세한 조언들 또한 곳곳에 스며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든, 혹은 영화를 하는 사람이든, 첫 출발을 할 때 기억했던 것들을 간혹 잊는 경우가 있다. 아니, 어쩌면 기본적인 것들을 꼼꼼히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앞으로만 내달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철학의 풍경들>은 사진함에 있어 기본이 되는 사유들과 마음의 자세를 챙겨보기에 무척 훌륭한 책이다. 이 어둡고 깜깜한 책 속에 들어가 인식, 사유, 표현, 감상, 마음이라는 5가지의 풍경을 마음 속에 각인시킨다면 보다 본질에 다가가는 사진을 만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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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Andy Goldsworthy, <WALL> 中 

 

단단하고 차가운 가슴에도

희망은,
노란
빛으로 속살거리고
 





 


<명작을 읽을 권리>
아주 오래전 유명한 음악가들의 잘 알려진 졸작과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잘 알려진 음악이면 당연히 명작이라고 생각했던 어린시절, 그 글은 상당히 신선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숨어있는 명작을 찾아내거나 이 작품이 왜 명작으로 불리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는 소개글에서 다시금 그때의 신선한 충격을 기대하게 된다. 저자는 자신만의 독법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갔다고 하지만 작품, 작가, 사회, 독자라는 4가지 키워드는 여느 감상자에게도 중요한 항목인 바, 이 책을 통해 '명작을 읽을 권리'를 누리는 안목을 얻고 싶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저자는 10여년간 민화를 찾아 이곳저곳을 다녔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한껏 감상하기 힘든 것이 민화인데, 누군가의 노고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화들이 얼마나 있을까 상당히 궁금해지고 민화가 가지고 있는 힘이란 어떤 것인지 확인해보고 싶다. 뿐만아니라 이 책은 시리즈로, 저자의 발걸음 만큼이나 정성스레 한 작품 한 작품을 살펴나가고 있어 한 권에 모든 작품을 소개할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우리의 주거양식에 있어 일반적인 화두는 항상 아파트였다. 아마도 아파트 동수만큼이나 많고 층수만큼이나 다양했던 것이 아파트에 대한 연구였고 담론이었던 것 같다. 반면 주택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빈약했으며 어느덧 주거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변방으로 밀려난 듯하다. 그런데 이 책은 양식주택의 형성기부터 현대 다세대 주택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의 변천사를 살펴보고 전통을 계승한 미래 주거문화에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어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 책을 통해 아파트에 몰두하느라 잊고 있던 주택의 소중한 장점들과 가능성들을 발견해 보고 싶다.


 

<존 러스킨의 드로잉>
존 러스킨은 아트앤크래프트운동을 주도했던 윌리엄 모리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모든 아름다운 미술 작품은 의도적이든 우연적이든 자연의 형태를 닮아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자연을 마주하는 인간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돗보이며 그림을 '그리는 법'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법'에 촛점을 맞춘 것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이전 8기 평가단에서 선정되었던 로버트 헨리의 <예술의 정신>을 떠올리게 하는데, 사소한 드로잉 테크닉부터 예술철학에 이르는 대스승의 조언은 비단 예술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우리 기억 속의 색>
책을 통해 종종 언급되는 자연의 색이나 잘 팔리는 색이 아닌 '기억속의 색'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다만 여기서 '기억속의 색'이란 한 개인의 심리적 경험을 통한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색이 아니라 개인의 삶이 속했던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풀어나간 색인듯 하다. 저자가 프랑스인인 관계로 우리가 가진 색에 대한 관념과 취향에 이런저런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시각적 이미지가 전혀 없는 가운데 상상으로만 색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는 호기심이 먼저 앞서는 책이다.






이달에는 도서 선정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 관심도가 비슷한 책들이 많다보니 무엇을 택해야 마지막 추천 페이퍼로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까 꽤나 고민했던 탓이다. 역시 '마지막'이란 것의 힘은 사람의 마음에 어떤 형태로든 의미를 남기나보다.

끝까지 리스트에 올릴까 고민했던 책 중 안타깝게 내려놓은 책은 먼저, <디자인의 진실>이다. 이 책은 권력과 디자인의 관계라는 매우 흥미롭고 흔하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 눈에 띄였는데, 인문분야가 상위 카테고리로 표기되어 있음에도 추천하고 싶었다. 다음으로 <검은 미술관>은 인간 심리의 어둡고 추악한 면을 다뤘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전에 읽었던 <무서운 그림>과 유사한 맥락일 것 같아 제외했고, <This is Art>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1,100점의 도판뿐만 아니라 감상의 포인트까지 제시되어있는 점이 유혹의 포인트, 그러나 이번에는 유혹을 넘겨버리련다. <좋은 시나리오의 법칙>도 시나리오를 살펴보는 가운데 영화를 비평하는 관점을 배울 수 있어 좋은 책이었지만 <명작을 읽을 권리>가 좀 더 광범위하게 영화작품들을 다룰 것 같아 전자를 포기했다. 끝으로 (헉, 진짜 많은 책이 후보였구나...) <의자의 재발견>은 멋진 의자의 시각적 감상뿐 아니라 제작과정이나 인체공학에 대한 설명이 있어 즐거운 잡학다식의 세계가 예상되지만 그저 5권의 한계 때문에 할 수 없이...ㅠ.ㅠ










8기, 9기를 합해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해 왔던 시간이 어느덧 1년이 다 되간다. 9기를 신청하면서 딱 1년만 하자고 결심했기에 여기서 이제 그만..해야겠지만 독서의 계절을 타겟으로 출간된 멋진 책들을 보니 또 맘이 설레기도 하고...하지만 역시, 그 책들 만큼이나 무더기로 쌓여있는 나만의 관심도서들을 보면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1년간 책을 찾고, 고르고, 어떤 책이 선정됐나 궁금해 했던 추억들이 참 소중하고, 좋은 신간을 받아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린 것에 감사하다.


 

참으로 길을 왔고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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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y Goldsworthy, <WALL>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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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
안도 다다오 지음, 이기웅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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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쇼핑을 즐기거나 레스토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 그리고 가끔 마주치기도 하는 도시를 방황하는 사람들. 도시를 방황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 거리를 서성이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들, 집을 나와 정처없이 걷는 사람들, 그리고 도시를 탐색하는 사람들.

도시를 탐색하는 사람들 가운데 안도 다다오가 보인다. 물론 대한민국 도시 한복판에서 그와 마주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정신없이 도시속에 몰두해 있는 그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래서 때로는 인생을, 때로는 예술을, 때로는 자연을 들려주는 다다오의 중심에는 언제나 도시와 도시 속의 건축이 자리하고 있다. 모든 사색들은 건축으로 귀결되며 다시 건축으로부터 새로운 인생과 예술과 자연의 의미들이 돋아난다. 또한 청년 시절 방문했던 도시들을 건축가로서 다시 방문하고 또 방문하는 경우도 있어 한 도시에 관한 그의 관점과 생각들이 확장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다오가 부단함으로 세계 도시를 여행하게 된 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 순전히 르 코르뷔지에 탓이다. 다다오는 그가 흠모하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책에서 '젊은 날의 여행은 깊은 의의를 갖는다'라는 구절을 읽었는데, 글귀 하나로 무모한 도전을 선뜻 결심한 그가 외람되지만 엉뚱하고 귀엽기까지 하다. 하필이면 다소 건조하고 비판적인 그 책, 근대 건축의 이상을 역설한 그 책 <건축을 향하여>에서 '여행'이라는 단어를 짚어냈을까? 아마도 이것은 '건축'하면 서구의 건축을 의미했던 당시 관념과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건축적 열망이 합작해낸 위대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만일 이 책을 읽는 건축학도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의 여행벽에 전염되리만큼 다다오의 절박함은 강하게 전달되어 오며 동시에 열정을 공유하고픈 마음을 선동질한다.

다다오에게 있어 여행을 통해 홀로 건축을 배워나가는 습관은 청년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권투선수를 하다가 독학으로 건축을 터득한 그가 오늘날 세계 건축계의 거장이 된 이면에는 이처럼 지치치 않고 낯선 도시에 무수한 발자국을 찍는 성실함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독특하게 접혀있는 이 책의 표지가 궁금해 그것을 다 펼쳐보았는데, 그러다보니 반투명 마일라지(紙)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던 그의 이력을 또렷한 붉은 글씨로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건축 사무소를 설립한 것은 1969년. 그로부터 이렇다 할 경력으로 꼽힌 일본 건축학회상을 받은 것은 1979년.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묵묵하게 초라한 사무실을 지켜나갔던 10년의 시간이 역력히 읽혀지는 순간이었다. 뿐만아니라 이후 2005년까지 변함없이 주요한 업적을 남겨왔다는 점도 지치지 않는 그의 열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 요즘들어 달인, 달인하며 개그맨 김병만의 성공 스토리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다다오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달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그가 건축을 결심하면서부터 쏟아부은 노력들, 여행을 통해 온 몸으로 느끼고, 종이에 그리고, 가슴으로 사유한 결과물들은 오롯이 콘크리트에 담겨 그와 함께 양생되고, 견고해지고, 공간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안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은 단순히 다다오의 건축 여행기라기 보다는 콘크리트에 사유를 담아갔던 한 달인의 숙련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헌책방에서 건축서적을 뒤지고, 불편한 숙소에서 잠을 청하고, 때론 한달 동안 발이 묶이기도 하며, 그러면서도 또 다른 여행을 위해 애써 모은 돈을 모두 투자했던 그의 청춘이 이 책에서 유독 빛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이 책은 다다오의 건축적 사유가 더 두드러지는 책이다. 폐허에서 느낀 아름다움으로부터 시작해 롱샹성당에서 배운 르 코르뷔지에의 빛, 톰블리의 작품에서 떠올렸던 '과정의 건축', 폴락의 드리핑 페인팅을 보고 시작된 '건축의 앵포르멜'에 대한 사색, 일본 경제의 탐욕스런 소비문화에 대항하고자 했던 '나카노시마 프로젝트' 이야기 등 무엇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울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러한 건축적 사유들은 그의 인간적인 갈등과 방황의 흔적때문에 더욱 고귀하게 전달되오는 것 같다. 뿐만아니라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다다오의 도시방황을 심심치 않게 해주는 요소가 된다. 흔히 건축가의 여행, 혹은 건축기행이라고 하면 해외의 건축 명물을 답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겠지만 이 책만큼은 예술작품과 건축, 혹은 건축물 사이에서 만날 수 있는 사색을 통해 그의 건축관과 도시관을 더욱 많이 담아냈고 젊은 시절의 방황,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건축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그의 건축세계를 이해하는데 묘한 친밀감마저 전달되어 온다.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시에' 살지 않고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나'라는 주체를 '도시에' 방치하지 않고 '도시를' 목적어로 껴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로 안도 다다오처럼. 만일 물성 가득한 회색빛 도시에서 공간을 느끼고 내면의 예술적 사유를 불러내고픈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다다오에게서 영감을 얻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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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 7
제러미 시프먼 지음, 김형수 옮김 / 포노(PHONO)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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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는 19세기 대표적 낭만주의 음악가로 대중적으로는 발레 음악에 의해 더욱 친숙하다. 특히 <백조의 호수>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멜로디는 너무도 유명해서 음악에 문외한이라 할지라도 따라 읊조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발레에서는 이 멜로디가 명성에 걸맞는 주요 솔로나 빠드되(Pas de deux, 남녀 2인무)에 사용되지 않고 지극히 서술적인 장면(지그프리드 왕자와 사냥꾼 무리들이 호수를 둘러보는 장면)에서 흐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니, <백조의 호수>는 발레 음악이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발레 공연과 함께 감상해야 겠다고 작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이처럼 클래식 음악은 우리에게 친숙한 면이 있다고 해도 대체로 피상적이거나 협소한 범주에 머물 뿐 음악가 한 사람의 세계, 악곡 하나의 세계에 몰입하는 친숙함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감상자만의 책임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기 위해 이런 저런 음악회에도 가보고 입문서를 읽어보기도 하지만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남다르지 않는 이상 혼자만의 힘으로 그 세계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특히 대중을 위한 클래식 입문서들은 '어떻게 감상을 하는가' 보다 '이런 것들을 감상해 보라'는 방식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많아 감상자들은 여전히 홀로 남겨진다.

<차이콥스키, 그 삶과 음악>은 조금 독특한 성격을 가진 책이다. 이 책은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가 시리즈'의 7번째 책으로 차이콥스키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세계, 음악 해설 등까지 아우르고 있어 전기이면서도 평전의 성격이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차이콥스키의 초기 작품들과 음악적 성장 및 변화를 찬찬히 짚어갈 수 있어 더없이 소중한 체험이 된다. 또한 이 책은 두 가지의 이야기가 병행되는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큰 틀은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음악 이야기를 자연스레 엮어가고 중간 중간 삽입된 '간주곡'에서는 음악을 중심으로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의 세계에 집중하고 있어 좀 더 깊이 그의 음악에 다가갈 수 있다. 뿐만아니라 실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제공된 2장의 CD에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없었던 차이콥스키의 곡들이 의외로 많이 담겨있었고, 그가 살던 19세기의 전반적 배경, 러시아의 문화적 배경, 관련 인물 설명, 각 악곡의 해설 및 비평 등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어 커다란 차이콥스키 선물세트를 받은 것처럼 풍성했다(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면 차이코프스키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음악까지 들어볼 수 있다). 사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조금 촌스럽다 내지는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는 과연 '그 삶과 음악'이라 할만하다는데 한 표 던진다. 이쯤되면 클래식 음악의 초보도, 조금 익숙한 사람도 무난히 차이콥스키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름아닌 그의 내면의 세계이기에 더욱 신비롭다(악곡마다 그의 내면을 설명해주는 부분들이 무척 인상적이다).

차이콥스키의 생애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동성연애자였으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한 차례의 이혼을 겪었으며, 후원자를 자처했던 폰 메크 여사와의 묘연한 관계, 어린 시절부터 따라다녔던 각종 신경증세, 자살 의혹에 이르기까지 꽤나 고단한 인생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어릴적부터 유난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한 아이였으며, 상당히 감성 중심의 인물이었다. 사진 속의 그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냉철하고 근엄해 보이지만 사실 매우 수줍음을 많이 타고 온화했으며, (저자도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라 밝혔지만)사람 만나기를 힘들어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사교성이 풍부했다. 한편으로는 상당히 정중하고 자기성찰이 두드러지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감이 지나친 탓인지 브람스, 바흐, 베토벤 같은 음악의 거장들에 대해 치기 어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예술가 기질'이 농후한 다채로운 내면 세계의 인간이었다. 이러한 내면 세계는 동생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들, 자신이 적어 놓은 글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며 그가 가진 고뇌이건 가식이건 열정이건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서신 속에 자신의 생각을 담았던 인물로는 고흐를 쉽게 떠올릴 수 있겠는데, 차이콥스키 역시 못지 않게 많은 글을 남겨 지금도 그의 가슴을 읽어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동스럽기도 하다.

다양하면서도 강렬했던 차이콥스키의 내면 세계는 그를 항상 반듯하고 고매한 길로 인도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에서 만큼은 무척 정직하고 순수하게 자신의 색채를 만들도록 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가 발레를 비롯 극음악에 뛰어났던 것도 그의 극도로 섬세한 감수성에 비춰보았을 때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서 차고도 넘치는 감정들은 극음악의 인물들을 통해 표출되어야만 진정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다른 음악에서도 극음악과 같은 느낌이 흐른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이것은 음악을 들어봐도 확실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좀 '풍만하다'는 느낌이라면 모를까 초보로서 선뜻 공감하란 쉽지 않다. 하지만 <피아노 로만스 바단조 Op.5>에서 나타나는 쇼팽 풍과 동양적인 느낌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고, 전반적으로 차이콥스키가 추구했던 러시아적 음악에 대해서도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악곡의 해설과 나의 느낌을 대조해 보며 다소 생소한 곡들(물론, 익숙한 곡들도 있다)을 감상해보는 시간은 무척이나 즐거웠다. 특히 그의 10대, 20대 시절의 초기 곡들과 소품, 가곡 등 처럼 그의 음악 세계의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곡들로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나는 발레를 참 좋아했기에 자연스레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다. 한때는 그의 3대 발레곡을 전막이 담긴 CD로 구해 들으며 그와 무척 친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다. 이제서야 나는 이 책을 통해 차이콥스키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반갑게 손을 내밀며 앞으로 좀 더 친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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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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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즐거운 탐색이었다면, 2권은 본격적인 행군입니다. 좀 더 장정일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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