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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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p.16)

 

 

 

 

<아치와 씨팍>은 적나라한 욕설과 폭력, 그리고 그로테스크함이 난무하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었지만광기 어린 자본주의의 속성을 솜씨있게 반영한 수작(秀作)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묘하게도 엑스트라급에 해당되는 보자기 갱단이 허겁지겁 하드를 먹는 장면이었는데, 이 모습은 마치 욕망과 물신주의에 마비된 현대인의 초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야기의 하드는 권력에의 종속, 중독적 탐닉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 신체와 지능이 퇴화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보자기 갱단은 하드에 중독돼 퇴화된 자들이다. 이들에게서는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하드에 중독된 자로, 동일한 것을 추구하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자기 갱단들이 아침에 깨어날 때에는 그저 단 하나의 세상, ‘하드의 세상이 시작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개인의 세계는 어떠할까? 이에 저자는 몇 백만 개의 세계가 아침마다 깨어난다는 프루스트의 문장과 대조해 잃어버린 자기만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관습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p.16)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그래서, 주체를 잃고 우매한 대중으로 한데 섞여버린 고귀한 개인의 가치를 불러들이라고 말한다. 권력이나 자본, 그리고 관습이라는 것에 저항해 자신이 느낀대로 올바른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책 속에 소개된 시인과 철학자들도 자기 고유의 목소리로 사회의 강요에 저항해 온 사람들이었다. 흐르는 물결에 쓸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꿋꿋하게 버틴다는 것은 힘겹고 괴로운 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시냇가의 물소리가 시원하고 아름다운 것은 작은 돌멩이 하나하나가 제자리를 지켜 존재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니, 순리에 따른 아름다움이 이러하다면 우리도 돌멩이가 되어 봄직하다. 다만, 시인과 철학자들의 생각을 신봉하지 말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 기억해야 할 저자의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의 시를 만나면 우러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편에서 나는 어떤 시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시는 너무도 내 가슴을 울렸고 갑자기 콧등을 시큰하게 했으며 시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그 시가 꼭 김수영의 시 같다는 느낌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그 아래 저자의 설명을 읽어 보니 내 느낌대로 김수영의 시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인지 알지 못해도, 그저 읽기만 해도 ''라는 사실을 독자가 직감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울리는 발성법에 도통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김수영에 대해 좀 더 설명을 할애해 준 것이 너무도 기뻤고, 더불어 그의 맥을 이어갔던 신동엽 시인까지 소개해주어 한국의 근대시가 가지고 있었던 힘을 새삼 다시 보게 되었다. 만일 시와 철학을 통해 침묵으로 가라앉은 목소리의 열정을 틔워보고 싶다면 김수영신동엽의 시부터 찬찬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 김수영, <폭포>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김수영, <푸른 하늘을>

 

일어서야지,/양말 신은 발톱 흉물 떨고 와/논밭 위에 세워논, 억지있으면/ 비벼 꺼야지,/열 번 부러져도 그 사랑/발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있는 것......쓰러진 폐허/함박눈도 쏟아지는데/어디서 나왔을까, 너는 또/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다. 

- 신동엽, <>

 

이 책에서 신선했던 점은 여성들의 활약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에 해당하는 여성 시인들과 여성 철학자들을 예우하기 위함이 아니라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우리 안에 억압되어 있는 여성성의 가치를 확인하고 철학이 가진 여성성을 통해 사회에 유용하게 적용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성성, 박애, 포옹과 같은 주제는 남성철학자나 시인들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절박함과 짙은 감성이 담겨있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누구에게나 있지만/여자의 것만 문제가 되어......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오랜동안 진정나의 소유가 아니었다......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 정희, <유방> (p.64-65)

 

문정희 시인이 가진 생각을 이리가레이의 철학으로 말한다면 '남성과 평등해져가고 있는 존재론적 차이의 회복'이다. 기존의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로 알려져 있지만 이리가레이는 이것이 생명의 중성화에 불과할 뿐, 진정한 여성성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여기서 여성적 감수성을 토대로 한 사회란 여성우월주의나 있는 그대로의 여성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이 가진 이물질을 포용하는 힘, 즉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공존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타자인(생물학적으로는 이물질인) 아기를 태내에 품고 10달을 인내하는 것처럼.

 

철학적 시 읽기의 소주제는 사랑을 비롯, , 여성, 타자,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 등과 같은 삶과 현실의 키워드들이다. 이 중에서도 사랑과 타자는 다양한 키워드 가운데 꾸준히 등장하면서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이성복의 시와 라캉의 무의식을 통한 가부장적 가족질서의 극복, 한용운의 시와 바르트의 사랑(일반적인 사랑)을 통한 타자에 대한 감각 생성, 고정희의 시와 베이유의 해방신학를 통한 박애적 사랑과 타자와의 연대, 그리고 김행숙과 바흐친의 덮어주기를 통한 억압에서 일치로 변하는 타자 등이 나의 내면으로부터 시작해 긍정적인 관계로 접근해가는 사유의 단초들이 되어주고 있다. 한편, ,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와 같은 소주제에서는 세상이 개인을 억압하는 방식을 간파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리하게 해주며 시와 철학에 나타난 저항정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현명한 자세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한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포용과 저항, 보다 포괄적인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과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광란의 21세기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명제이기도 하다. 저자도 꾸준히 언급해 왔지만 철학에서 타자를 이해하고 타자와의 관계를 배워가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또한 분노를 추구한다고 하면 의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와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그들의 부당함에 대해 정당한 분노의 목소리를 터뜨려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시인과 철학자들이 사랑과 분노에 대한 발성법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갔듯, 우리도 이 책을 악보 삼아 자신만의 발성법을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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