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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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훌쩍 넘어 키가 자라도, 발목을 훤히 드러낸 교복 바짓단에 몸을 떨고 마는 열여덟의 아이들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합격과 불합격, 사회에 제대로 진입하느냐 낙오되느냐의 경계에 시험당하는 시기다. 화장을 하고 술을 마셔대는 성인, 스무 살의 나이가 되어서도 다르지 않다. 경계선 위의 아이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독한 불안은 우정의 그룹 안에서 해소되곤 한다. 그 속에서 균형 있게 자신의 자리를 버티고자 노력하며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팽팽한 균형을 위해 아이들은 또 다른 경계,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룹의 기준에 맞게 자신을 제단 하고, 스스로 제 마음속 진실을 가두고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쓰쿠루의 무리가 내세운 첫 번째 규칙은 ‘사랑 금지’였다. 그들은 본능적인 감정 앞에 모두 거짓말을 해야 했다. 둘이 아닌 다섯의 조화를 위해, 쓰쿠루 역시 시로와 구로를 이성(異性)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구속마저 기쁠 만큼 쓰쿠루는 운명처럼 모인 다섯의 그룹을 사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내세운 두 번째 규칙은, ‘쓰쿠루 금지’였다. 시로의 거짓말은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진실이 되었다. 시로를 지켜야한다는 이유 저편에는 나고야에 남은 무리 속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한다는 이기심이 있었다. 냉정하고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다자키 쓰쿠루(430p)니까, 무리의 따뜻함에 안주하며 나고야에 남은 약해빠진 우리 넷보다는 잘 버텨낼 거라는 자기 합리화로 쓰쿠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박탈당한다.  

 

 나고야를 오가던 쓰쿠루와 달리 예민한 시로는 완벽했던 5각이 4각으로, 4각에서 또다시 5각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균열을 바로 곁에서 느꼈다. 그리고 쓰쿠루가 도쿄로 떠났을 때 느낀 공허에 자신도 몰랐던 ‘사랑’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곧 그룹의 죽음이었다.   모래성처럼 푸석거리기 시작한 그룹이 규칙을 깨버린 자신 때문에 완전히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결국 시로는 역으로 진실을 아예 뒤엎는 망상에 빠졌다. 그리고 영원한 ‘쓰쿠루 금지’를 몸소 해냈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불안정을 지켜내려 했던 시로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쓰쿠루는 쿨하게 버텨낼 수 없었다. 색채 없는 이름조차 외로워하며, 떳떳한 일원으로 머물고 싶어 하던 쓰쿠루다. 그는 큰 충격 속에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마음까지 꽁꽁 가둬버렸다. 트라우마는 그를 진실에 아예 등을 돌린 파수꾼으로 만들었다. 하이다 마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자 꿈속의 무의식까지 끌고 와 자책하는 동안 트라우마는 더욱 짙어졌다. 그 후 10년 간 진심 없는 가벼운 만남만 지속한다. 그는 칼날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수록, 이별 뒤에 쏟아져 나올 피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 미리 두려워했다.  

 

 기억은 달라져도, 역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간 절교가 제 탓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색채를 믿지 못한다. 쓰쿠루의 역사는 이미 망가져 버렸다. 그들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 그리고 거짓으로 끌어안은 무리는 결국 쓰쿠루와 시로 그리고 운명 같던 다섯의 무리마저 지키지 못했다.  

 

 경계선 위의 파수꾼은 그렇게 각자의 어른이 되었다. 나고야에 머물며 세상에 거짓 아부를 던지거나, 도자기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에 따라 경계선을 넘어섰다. 그때, 그들이 시로를 믿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 했다면 그들의 세상은 더 좋게 변했을까. 관계 속 진실과 거짓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만큼, 결과 역시 쉬이 예측하기 어렵다. 어쩌면 세상은 손톱 아니면 발톱을 뽑아야하는 나쁜 패만 가득할지 모른다. 패를 고를 수 있는 자유, 경계선 위에서 발을 뻗는 의지 그 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경계선 위에서 손톱을 뽑을 것이다. 선택의 상처도 새 살도 내 눈과 가까운 곳에서 피하지 않고 돌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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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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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리팅, 비밀을 가진 모든 자들의 보험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SNS로 사생활이 전시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진짜 사생활을 그곳에 올리는 이는 없다. 오히려 SNS에 올린 사진을 통해 자신의 속내는 꽁꽁 감추고 포장하는 느낌이다. 비싼 스테이크 사진을 보란 듯이 올렸을지언정, 그 뒤 화장실을 수 십 번 오고 간 속사정은 감춰야 한다. 그럴듯한 삶 이면에는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법이다. 그야말로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비밀, 내가 죽는 순간 나와 함께 저세상으로 가져가길 바라는 것들을 딜리터에게 대신 부탁하는 것이다.  딜리팅이란, 나와 함께 무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들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것이다.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고객이 되는 사업, 실제로 찾아가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누구나 한번쯤 바라고 찾는 이상의 보험이 아닌가. 소재부터 탁월하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오규원의 <죽고 난 뒤에 팬티>다. 어차피 죽고 나면 수치심을 느낄 수도 정신도 살아있지 않는데 주검이 되어 발견되는 순간 내가 입고 있는 팬티의 상태를 신경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육체는 죽어 없어지지만, 나를 아는 이들의 삶 속에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그렇기 때문에 조그만 흔적까지 되돌아보며, 남겨진 자신의 모습에 흠이 잡히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지갑 속에 숨겨둔 첫사랑의 사진 또는 치기어린 시절 써내려간 부끄러운 연애편지 등 팬티처럼 소소한 것들은 '자신의 비밀'로 존재할 때는 무덤을 박차고 나오고 싶을 만큼 커다랗게 불어나는 법이다. 

 


 
비밀은 돈으로 거래될 수 있는가

 

 

 하지만 비밀은 정말 사라질 수 있을까. 돈으로 뭐든 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많은 텍스트 속에서 자본을 가진 자는 초반에는 떵떵거리다 후반부에는 정의나 사랑 같은 추상적인 것에 막혀 좌절됨으로써 “돈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세상은 아닙니다.”라는 교훈을 주곤 한다. 이 책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비밀이라는 추상은 물질적인 거래로 완벽히 제거될 수 없다. 비밀이 가지는 속성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므로, 결국 타인과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꺼란 말이야, 전부. 전부 다 빨리 내놓으라고.(242)
아빠 소유이기도 하고 제 소유이기도 하잖아요.(282)

 

 정소윤은 배후세력을 쫓는 구동치와 서사를 조립하느라 바쁜 독자를 잠시 멈춰 세우는 역할을 한다. 그야말로 책이 던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품고 있는 인물이다. 정소윤은 비밀이 결코 혼자의 몫이 아니라고 말한다. 네가 감춰놓은 보따리에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매던 보물이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구동치는 정소윤을 철없이 바라보지만 김인천의 죽음 뒤엔 그녀의 말을 곱씹게 된다. ‘의뢰를 받았기 때문에, 비밀은 의뢰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그 뒤에 일어난 일들에 눈을 감았던 구동치는 자신의 일이 ‘퐁당’ 소리와 함께 제 2의 김인천을 죽게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저는 우물 속에다 돌멩이를 던졌기 때문에 '퐁당'이라는 소리에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384)

 

 

 

월요일이던 그림자는 찢겼다

 

 비밀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딜리팅을 약속했지만, 구동치는 무덤 속이 아닌 자신의 캐비닛에 비밀을 이사시킴으로써 임무를 마무리한다. 그저 다른 세계에 영속된 비밀은 언제나 돌아오는 월요일처럼 기나긴 그림자를 끌고 엉뚱한 사람의 발끝을 휘감아 붙잡을 지도 모른다. 

 

당신도 뭔가 잃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오. (416)

 

 구동치는 마지막 일을 수행하며 비밀을 가득 담던 패딩 점퍼를 바다에 던진다. 누군가의 비밀이 삭제됨으로써 누군가에겐 소중한 것이 사라지게 될 때, 그 보상은 누가 해야 하는 걸까. 그에 대한 대답을 마지막 장면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비밀을 없애는 자가 가져야 할 책임,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구동치는 패딩 점퍼를 던지며 딜리팅을 관둔다.

 

그림자를 남겨두고 가는 기분이었다. (398)

 

 구동치에게 돌려받은 사진을 뽑아 인화하며, 돌아서는 길에 정소윤은 하얀 눈이 쌓인 길가에 냅다 드러누우며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마치 그림자처럼 새겨진 실루엣은 언젠가 다시 내린 함박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구동치에게 전해진 사진은 누군가의 비밀이었고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달력을 넘기면 격주로 돌아오는 월요일이 아니다. 칸 마다 텅 빈 캐비닛과 버려진 패딩점퍼. 그는 그렇게 딜리팅의 기록을 딜리팅했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그러나

 

 의미심장한 제목, 독특한 소재에 비해 서사방식은 전형적인 추리물이다. 하나의 사건과 감춰진 배후세력을 추리해가는 과정, 드러나는 악의 무리들, 결정적인 단서를 남기고 떠난 동료 형사의 죽음, 사건의 마무리 그리고 직업에 대한 회의. 어찌 보면 진부하지만, 그만큼 많이 익숙해져있는 장르문법은 오히려 대중의 입맛에는 탁월하게 들어맞다. 

 

 흥미로운 사건과 다양한 인물 덕분에 독자는 서사를 쫓아가느라 바빠진다.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서사가 움직인다기보다, 서사의 흐름 사이사이에 메시지가 툭툭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눈에 띄게 불거진 메시지는 허리 숙여 줍기 쉽고, 굳이 땅을 파내거나 깊은 사유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땀을 식힐 여운은 조금 줄어들지 모른다. 재미있는데다가 사회적 메시지도 있으니,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 600만 돌파를 앞둔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다. 나는 지금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이 그저 그런 대중소설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맨부커상 후보작을 고르는 기준에 ‘가독성’을 내세워 일대 논쟁이 일었던 적이 있다. 가독성이 문학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많은 평론가들이 앞 다투어 의견을 냈다. 나는 최근 누보로망의 대표작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었다. 가독성 점수를 주자면 5점 만점에 –5점을 줄 정도로 읽기 힘든 책이었다. 하지만 그 책이 싫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좋았다고 답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좋은 문학의 기준에 ‘가독성’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책을 잘 읽었다는 말에 ‘가독성’은 큰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 소설이다. 대중적인 요소가 곳곳에 감초처럼 들어있어 단숨에 읽기 쉽다. 간혹 ‘대중적’이라는 말을 ‘상업적’과 같은 말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 책은 대중적일지 몰라도 결코 상업적이지는 않다. 김중혁은 늘 쓰던 대로 매력있는 문체로 이야기를 풀었으며, 그 이야기의 장르가 ‘추리’였고, 그 소재가 모든 이의 공감을 부르는 ‘비밀’이었다. 목적이 아닌 결과가 대중을 향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말하고 싶다. 최근 들어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밌다. 두번 더 읽고 싶어지는 책이며, 누군가에게 읽어보라고 쉽게 권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심심풀이는 아니다. 책이 던진 '비밀'이라는 키워드에 뻗어나오는 사유는 꽤 길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당장, 이 소재로 또 다른 텍스트를 맛볼 수 있기를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중혁의 다음 작품 역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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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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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 주었으면 해

  

 

 

 3월 말, 아직 미련이 남은 겨울 공기가 방안을 서늘히 감싸던 그 무렵 나는 아주 특별한 과제를 수행 중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나만의 글로 기록하는 인터뷰 과제였다. 인터뷰 대상은 누구라도 상관 없었다. 나는 대상을 정하기 위해 머릿 속을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가상으로 그려보았다. 고심 끝에 한 명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손을 잡았다. 네 인생이라면 그럴듯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6년 째 사귀고 있는 친구였다. 그 중 4년은 멀리 떨어져 지내며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보고, 한 달에 한 두 번 연락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친구와 깊숙이 연결돼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의 경우는 어떨 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렇다. 말그대로 나는 그와의 관계를 자부(自負)한다. 그를 친구로서 매우 사랑하고, 일상과 떨어진 세계에 머무는 듯한 그의 자유를 동경했다. 그가 내 친구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그는 학교의 규칙이나 교육 시스템 전반에 불만이 많았다. 눈에 띄는 반항아는 아니었으나, 조용히 경계선 위에 앉아 안쪽 세상을 관조하는 타입이었다. 그와 친구가 되려면 나 역시 경계선에 발을 딛어야했다. 꽤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해오던 나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었다. 우리는 수업이 듣기 싫을 땐 뒤로 나가 연습장에 낙서를 하며 놀았고, 야자 시간 중간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달을 보며 종종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학원에서 나눠주는 공책을 주욱 찢어 한 바닥을 가득 채운 편지를 수없이 주고 받았다. 그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나는 영화와 노래를 좋아했다. 우리는 익숙지 않았던 영역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생일선물을 주고 받고 급식을 같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런 친구였다.

 

과제를 위해 5일 가까이 메신저와 전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갓난아기때부터 유치원 시절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않고 그가 여태껏 살아온 인생을 들었다. 인생을 논하기엔 파릇한 나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시간은 느리고 지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불편한 가정사, 내팽개쳐진 사춘기, 예상치 못한 자유 아래 그는 삶을 버텨왔다. 그는 하수구 같은 세상을 가리키며 욕하길 좋아했지만, 그로 인해 토악질을 하는 모습은 내비친 적이 없었다. 나는 가시지 않은 추위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뒤늦게 그로부터 덤덤한 표류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 사실 강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어. 나는 대꾸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파울은 베른하르트의 삶을 지탱해준 사람이다. 죽음을 갈망하는 원인 따위를 분석해 병명을 붙이는 것이 아닌, 베른하르트 속에 있는 광기를 함께 공유함으로써 바닥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천재와 광기의 경계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신병'을 "자기 삶의 내용" 또는 "예술"로 발전시켰다. 상업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예술 아래 그들은 가식적인 포장을 뜯어내며 '진짜'를 찾는 여정과 대화를 나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정상을 욕하는 그들은 비정상이 되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지만 둘은 혼자가 아니기에 더 당당할 수 있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죽어가는 순간을 차마 곁에서 바라볼 수 없었다. 아마 베른하르트는 반짝이던 그가 죽음의 그림자 아래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지않았을 것이다. 결국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죽음을 외면한다. 장례식에서 연설을 해달라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기록했다.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건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광기를 천재성으로 향상시켜준 그의 업적에 따라, 글로써 그 연설을 대신한다. 그가 말한 것 처럼 200명의 사람은 무덤에 모이지 않았으나, 베른하르트는 그를 알지 못한 전세계인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더불어 그의 삶을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지만, 그만큼 폭력적인 수식이다. 한 개인에게 '유명인의 친척'이라는 존재성을 부여하는 순간 대중이 보내는 선입견의 감옥에 갇혀야한다. 정작 파울은 비트겐슈타인과 단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하더라도. 그 수식으로 인해 파울은 쉽게 재단되고 비교 우위 아래 조롱 받는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비트겐슈타인 만큼 혹은 비트겐슈타인보다 더 뛰어난 철학적 지식을 파울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세를 통한 흥미유발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온다. 하지만 결국 책을 덮었을 때 파울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아닌 독립된 한 명의 개인으로 남게 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누군가의 조카가 아닌, 나의 소중한 친구, 나의 정신적 동반자, 무엇보다 '파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나는 과제를 통해 내 친구를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 나는 최대한 나의 시선이 아닌, 그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내가 느낀 그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점도 있다. 그걸 포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몇 안되는 분량에 그를 나타내기위해선 인위적 편집이 불가피했다. 베른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를 책 속에 녹여내고, 그의 마지막 유언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때론 그의 또라이같은 면을 더 부각시켰을 지 모른다. 결국, 이 책 역시 베른하르트의 기억과 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울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무덤 속 '파울'이 베른하르트의 어깨를 다독이지 않을까. 꽤 들을만한 연설이었네, 친구!

 

 여전히 그는 파울이라는 이름 대신 '비트겐 슈타인의 조카'라는 수식으로 더 많이 불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 수식은 선입견의 감옥이 아닌 편의상의 수식으로 남았을 뿐, 그렇게 우리는 파울을 알게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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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이 막 시작되었다. 날씨가 좋으면 뭐하나, 여유없는 나날들이 반복되니 오히려 맑은 하늘을 보며 괜한 화풀이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문화 생활은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 것 뿐이다. 그래서인지 5월에는 단편이 더 끌린다. 더군다나 요즘은 굳이 힘든 책을 찾지 않아도 안팎으로 너무도 아픈 일들의 연속이니, 아픈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쨌든, 5월의 주목 신간.

 

 

 

 

 

1. 소소한 풍경 ㅣ 박범신 ㅣ 자음과 모음

 

  박범신의 소설은 <은교>밖에 읽어보지 못했다. 그 작품만으로도 박범신의 작품 세계를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조금 더 읽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마침 신간이 나왔다고 하니 끌릴 수 밖에. 이 소설과 더불어 갈망 3부작을 책꽂이에 꽂아둔다면 내 안에 가둬놓았던 삶 속의 갈망들이 절로 일어날 것 같은 기이한 상상이 든다. 소소한 풍경, 이라고 하지만 줄거리를 읽었을 때 결코 소소한 풍경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벌써부터 깊은 고뇌 그 속의 갈라진 틈새를 쫓고 싶은 '갈망'이 인다.

 

 

 

2. 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토마스 핀천 ㅣ 창비

 

 사실 나는 이 작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작가의 글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 제목만 봤을 때는 한적한 산 속에서 읽을 만한 불교 경전의 느낌이 들지만, 막상 줄거리를 살펴보면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다. '죽음, 무기력,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감'이라는 어둡고 칙칙한 단어들과 연결된 단편들이 전하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의 이야기란 과연 뭘까, 궁금해진다.

 

 

 

 

3. 노예 틈입자 파괴자 ㅣ 이채은 ㅣ 알렙

 

 <노예 12년>이라는 영화와 소설이 주목받으면서 '노예'라는 단어와 함의 역시 그냥 지니치기 힘든 문학적 키워드가 된 듯 하다. 그래서 클릭하게 된 이 책의 내용은 '꿈과 언어 그리고 소통에 관한 묵시록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내는 소설' 이라고 한다. 요즘들어 춘곤증 때문인지 낮잠도 늘고, 꿈을 꾸는 시간도 늘어서 더욱더 꿈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그런데 남의 꿈을 드나드는 틈입자의 대한 이야기라니, 참신한 소재까지 매력적이다.

 

 

 

 

 

 

 

 

4. 말하자면 좋은 사람 ㅣ 정이현 ㅣ 마음산책

 

11편의 단편보다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너무 어려운 소설을 (억지로) 읽어야만 하는 일이 많았다.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긴다기보다, 괴로움 속에서 가치를 애써 발견하는 독서를 하고 있어서인지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보고 싶었다. 말하자면, <말하자면 좋은 사람> 처럼 간편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가볍지 않은 엑기스 같은 소설. 중간 중간 삽입된 신예 화가 백두리의 그림 역시 '5월'의 독서에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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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신간 평가단 첫 활동을 시작함에 앞서, 누군가 서재에 들어와 네가 뭐길래 신간평가를 하느냐고 의문을 가진다면 정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제를 위해 읽어내는 책을 제외하면, 나는 1년에 책을 열 권도 스스로 찾아 읽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강제로라도 내게 책을 읽어야 할 의무를 주고 싶었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엔 이 의무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간절함을 제치고 얻게 된 활동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신간평가단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쁨은 잠깐, 묘한 죄의식이 밀려왔다. 책도 잘 안 읽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누군가를 대표해 '평가'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책임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평가단'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싶을 뿐이다.

 

 초등학생 때는 매주 도서관을 찾았다. 대출수는 3권으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2시간을 꼬박 어린이실을 빙빙 돌며 일주일 동안 나와 함께 할 책을 골랐다. 초딩의 기준은 별 것 없었다. 우선 책표지가 예뻐야했고, 더럽지 않아야했다. (무려 폰트까지 신경을 썼다.) 그리고 제목이 마음에 들어야했고 한 바닥 정도 읽었을 때 어렵지 않아야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책 뒤에 있는 짤막한 줄거리와 홍보문구였다. 어, 맘에 들어. 싶으면 고르는 거였다. 그 시절의 내가 '이 작가의 책은 꼭 읽어야 해!', '이 출판사의 주목신간은 볼만하지!' 와 같은 책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객관적인 가치를 염두할 리가 없었다.

 

 지금의 나라고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초딩 때 쌓아온 독서력은 고등학생 때 별 노력없이 얻었던 언어영역 점수에 다 쏟아부어진 후, 지금은 얼마 남지도 않았다. 나는 정말 텅텅이다. 그래서 미리 말하고 싶었다. 앞으로 내가 보고 싶은 책을 고르는 기준 역시 초딩의 기준만큼이나 깊이 없고 겉핥기 식이라는 걸. 하지만 그 얕은 기준이라도 꼬박 2시간을 걸쳐 골라 낼 의지는 충분하다는 걸. 

 

 나는 아무 것도 아닌 평가단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기준도 될 수 없다. 오로지 나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취향만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처럼, 열심히(는) 하겠습니다! 하고 무대포로 대답한다.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을 뒤로하고, 누군가에겐 '이런 애도 신간평가를 하네'라는 용기를 주거나 동질감에서 오는 공감을 얻기를 바라며 첫 신간평가단 활동을 시작한다.

 

 

 

  1.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ㅣ 안보윤 ㅣ 문학동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며, '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비교적 안녕한'이라는 수식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책 소개에 인용된 문구를 바라본다.

 

' 저기, 집이 한 채 불타고 있다.
 당신이 모르는 집이다.
 아는 집이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목을 다시 보며 책의 내용을 짐작 해본다. 아마도 당신은 불타고 있는 누군가의 집을 바라보며 '나의 집은 비교적 안녕하군' 이라는 안심을 중얼거리고 있다. 대충의 줄거리를 읽다보니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그리고 '누군가'를 화자로 한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당신도 될 수 있고 당신의 이웃도 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재미를 느끼는 만큼이나 내 건조한 관조에 거울을 마주한 섬뜩함을 느낄 것 같다. 

 

 

 

  2.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 역 / 필로소픽

 

 책 표지가 마음에 든다. 살짝 틀어진 고개, 삼백안의 눈동자, 굵게 파인 이마의 주름, 이죽이는 입. 사회의 찌꺼기라는 찌꺼기는 죄다 포착하고 분노하느라 온갖 화상을 입은 듯한 인물의 그림이다. 책 소개를 본다 '인간혐오자의 그로테스크한 우정'. 책 표지가 저렇게 탁월할 수가 없다.

 

천재와 광기, 그 얇은 차이를 의심해 봤다면.
늙음과 죽어감에 대한 철학적인 소설을 원한다면.

 

그러한 당신이라면 이 책을 읽길 바란다며 출판사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천재 또라이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근에 <에브리맨>을 읽고 늙음과 죽어감에 대한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 게다가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소설가인 '배수아'의 번역이라니, 더 기대되는 지점이다.

 

  3. 청춘파산 ㅣ 김의경 ㅣ 민음사

 

 개인적으로 '청춘'이라는 말은 나에게 애증의 단어다. 모두들 나에게 청춘이라 말을 하며 응원을 보낸다고 말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고개를 숙여 어린 척을 한다. 그들이 응원하는 '청춘'에는 열심히 열정적으로 달려나가는 젊은이를 뜻할텐데, 나는 아직 그 찬란한 그룹에 속하기에 멋지지가 않다. 하지만 그만큼 '청춘'이라는 말을 동경한다. 어떻게든 그들이 말하는 그 멋진 '청춘'이 되고 싶다.

 하지만 '청춘파산' 이라니. 어떻게보면 시도때도 없이 퍼지고 있는 청춘마케팅, 청춘상술에 편승하는 제목이 아닌가싶어 반감도 들지만 '파산'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회색 도시에 저마다 예쁜 색의 노란 우산을 들고 있지만 옥상 위에 올라 서있어 불안해 보이기만 한다. 대충의 줄거리를 훑어본다. 제목 그대로 청춘이 파산 당하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 있단다. 읽고 싶다. 파산과 함께 내일을 저당잡힌 청춘. 출판사의 홍보 문구에 마음이 꽂혀버렸다. 가끔 나를 불쌍하게 말하는 소설도 읽을만 하다.

 

 

  4. 책방주인 ㅣ 레지 드 사 모레이라 ㅣ 이희정 역 ㅣ 예담

 

 책방 주인. 개인적으로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거기다 그 공간이 '책방'처럼 무언가 소담한 인물들이 모일 것 같은 곳이라면 더 좋다. 소개된 책 속의 문장 몇개를 읽어보니 더 마음에 든다. 형제와 누이를 위해 책 속의 페이지를 주저없이 뜯어 우편으로 보내는 책방 주인이라면 책방으로 돈을 벌기 위한 사람은 아니다. 그야 말로 '책방의 주인'이 이야기하는 책방의 이야기. 카페 주인 만큼이나 낭만적인 풍경이 그려지고, 또 부러워지기까지 하는 이 사람의 눈에 어떤 모습들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진다. 요즘 너무 어려운 소설들을 과제때문에 읽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자극없고 담백한 소설이 끌린다. 더구나 오늘같은 봄날씨에 책방 구석에 앉아 읽고 싶어지는 소설.

 

  5. 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ㅣ 김중혁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나는 아는 작가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리고 작가를 보며 소설을 찾아 읽는 일은 정말 드물다. 하지만 그 두문 경우 중 하나가 '김중혁의 소설을 읽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펭귄 뉴스>라는 단편집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펭귄'+'뉴스'만큼이나 섞이지 않을 소재들을 엮어 새롭지만 공감되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스타일에 푹 빠져 읽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도 그 책을 재밌게 잘 읽어서, 그 감동이 반감될까 다른 작품을 읽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냥 게을렀던 탓도 있다) 하지만 이제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가타부타한 말들 치우고 그냥.

"나에게 비밀을 말해주세요.

비밀의 그림자는 월요일처럼 길고 길어요."

이 문장에 끝났다. 정말 너무 엄청 읽고 싶어졌다.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여운이 생긴다.

 

 

 

 

 

 

3월에 찾아온, 4월에 보고 싶은 책들.

4월에 꼭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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