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땅에 묻히는 날

이백 명의 친구들이 모일 거야

그날 자네가 내 무덤에서 연설을 해 주었으면 해

  

 

 

 3월 말, 아직 미련이 남은 겨울 공기가 방안을 서늘히 감싸던 그 무렵 나는 아주 특별한 과제를 수행 중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나만의 글로 기록하는 인터뷰 과제였다. 인터뷰 대상은 누구라도 상관 없었다. 나는 대상을 정하기 위해 머릿 속을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가상으로 그려보았다. 고심 끝에 한 명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손을 잡았다. 네 인생이라면 그럴듯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6년 째 사귀고 있는 친구였다. 그 중 4년은 멀리 떨어져 지내며 일 년에 한 두번 얼굴을 보고, 한 달에 한 두 번 연락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친구와 깊숙이 연결돼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의 경우는 어떨 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렇다. 말그대로 나는 그와의 관계를 자부(自負)한다. 그를 친구로서 매우 사랑하고, 일상과 떨어진 세계에 머무는 듯한 그의 자유를 동경했다. 그가 내 친구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그는 학교의 규칙이나 교육 시스템 전반에 불만이 많았다. 눈에 띄는 반항아는 아니었으나, 조용히 경계선 위에 앉아 안쪽 세상을 관조하는 타입이었다. 그와 친구가 되려면 나 역시 경계선에 발을 딛어야했다. 꽤 모범적인 학교 생활을 해오던 나는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었다. 우리는 수업이 듣기 싫을 땐 뒤로 나가 연습장에 낙서를 하며 놀았고, 야자 시간 중간에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달을 보며 종종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학원에서 나눠주는 공책을 주욱 찢어 한 바닥을 가득 채운 편지를 수없이 주고 받았다. 그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나는 영화와 노래를 좋아했다. 우리는 익숙지 않았던 영역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세계에 스며들었다. 생일선물을 주고 받고 급식을 같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런 친구였다.

 

과제를 위해 5일 가까이 메신저와 전화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갓난아기때부터 유치원 시절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 순간도 놓치지않고 그가 여태껏 살아온 인생을 들었다. 인생을 논하기엔 파릇한 나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시간은 느리고 지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불편한 가정사, 내팽개쳐진 사춘기, 예상치 못한 자유 아래 그는 삶을 버텨왔다. 그는 하수구 같은 세상을 가리키며 욕하길 좋아했지만, 그로 인해 토악질을 하는 모습은 내비친 적이 없었다. 나는 가시지 않은 추위에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뒤늦게 그로부터 덤덤한 표류기를 전해 듣게 된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나 사실 강에 빠져 죽으려고도 했어. 나는 대꾸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파울은 베른하르트의 삶을 지탱해준 사람이다. 죽음을 갈망하는 원인 따위를 분석해 병명을 붙이는 것이 아닌, 베른하르트 속에 있는 광기를 함께 공유함으로써 바닥난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천재와 광기의 경계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신병'을 "자기 삶의 내용" 또는 "예술"로 발전시켰다. 상업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가는 예술 아래 그들은 가식적인 포장을 뜯어내며 '진짜'를 찾는 여정과 대화를 나눴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정상을 욕하는 그들은 비정상이 되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지만 둘은 혼자가 아니기에 더 당당할 수 있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정말 사랑했다. 그래서 그가 죽어가는 순간을 차마 곁에서 바라볼 수 없었다. 아마 베른하르트는 반짝이던 그가 죽음의 그림자 아래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지않았을 것이다. 결국 베른하르트는 파울의 죽음을 외면한다. 장례식에서 연설을 해달라던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기록했다. 한 사람의 인생 전반을 돌아보며 기록하는 건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광기를 천재성으로 향상시켜준 그의 업적에 따라, 글로써 그 연설을 대신한다. 그가 말한 것 처럼 200명의 사람은 무덤에 모이지 않았으나, 베른하르트는 그를 알지 못한 전세계인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더불어 그의 삶을 말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파울을 누구나 알 수 있게 하지만, 그만큼 폭력적인 수식이다. 한 개인에게 '유명인의 친척'이라는 존재성을 부여하는 순간 대중이 보내는 선입견의 감옥에 갇혀야한다. 정작 파울은 비트겐슈타인과 단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하더라도. 그 수식으로 인해 파울은 쉽게 재단되고 비교 우위 아래 조롱 받는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이 비트겐슈타인 만큼 혹은 비트겐슈타인보다 더 뛰어난 철학적 지식을 파울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세를 통한 흥미유발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온다. 하지만 결국 책을 덮었을 때 파울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아닌 독립된 한 명의 개인으로 남게 된다. 베른하르트는 파울을 누군가의 조카가 아닌, 나의 소중한 친구, 나의 정신적 동반자, 무엇보다 '파울'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나는 과제를 통해 내 친구를 많은 이들에게 알렸다. 나는 최대한 나의 시선이 아닌, 그의 모습 그대로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 내가 느낀 그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 애쓴 점도 있다. 그걸 포장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몇 안되는 분량에 그를 나타내기위해선 인위적 편집이 불가피했다. 베른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를 책 속에 녹여내고, 그의 마지막 유언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때론 그의 또라이같은 면을 더 부각시켰을 지 모른다. 결국, 이 책 역시 베른하르트의 기억과 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울의 모든 면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무덤 속 '파울'이 베른하르트의 어깨를 다독이지 않을까. 꽤 들을만한 연설이었네, 친구!

 

 여전히 그는 파울이라는 이름 대신 '비트겐 슈타인의 조카'라는 수식으로 더 많이 불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그 수식은 선입견의 감옥이 아닌 편의상의 수식으로 남았을 뿐, 그렇게 우리는 파울을 알게 되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