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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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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길을 걷다 눈앞으로 오토바이가 스쳐간다. 그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릴 정도다. 불쾌한 굉음이 흩어지며 떠난다. 너는 죽을 뻔 했네 말하며 다시 가쁘게 걷는다. 3분 후면 지하철이 도착한다. 놓치면 그대로 지각이었다. 너는 눈앞에서 차를 놓친다. 지하철에서는 ‘그’가 옆 병실에서 첫 번째 죽음을 목격했다. 12층을 오를 엘레베이터를 놓친다. 난간을 붙잡고 기어가며 읊조린다. 죽을 것 같아. 수업을 마치고 순환 버스 안에서 납작 찌그러진 채 또 한 번 토해낸다. 딱 죽겠다. 너는 오늘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고,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 뉴욕 맨해튼 폭발 사망자가 7명으로 늘어난 것을 본다. 밥알을 씹어 삼킨다.

 

너는 경주 리조트 사건이 터졌던 밤, 잠들 수 없었다. 너는 일어나 물 두 모금을 마셨고, 그동안 두 발자국 더 죽어가고 있을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언젠가 버스에 앉아 바라봤던 반대 차선의 소방차를 떠올리며 너는, 모르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너는 사망자 명단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그 자리에 새기는 악몽을 꿨다. 그날부터 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걸음마를 일찍 뗀 너는 바퀴벌레를 보고 도망치다 넘어져 머리가 찢겼다. 수건 하나를 새빨갛게 적셨지만 죽지 않았다. 모닥불에 엎어져 손을 태우기도 했다. 한 달 동안 너는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교정 받지 않는 왼손잡이였다. 아토피가 심해 죽고 싶었다. 30도가 넘는 날씨, 넌 진득한 붕대를 감고 누워 아프지 않게 혀를 깨물어봤다. 새로운 하복으로 갈아입고 등교했던 아침에 너는 옆 반에 놓인 국화꽃 하나를 보게 된다. 짝지가 말했다. 아파트에서 떨어졌대.

 

죽음의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한다. 너는 한동안 죽음의 단상들이 뻗어낸 가지들에 찔렸다. 두려움은 어느새 굳은살이 되어, 어느 순간 너는‘죽을 뻔 했어’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뉴스에도 무심한 척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너는 머리카락을 헤집어야 찾을 수 있는 흉터를 만지는 습관이 있었다. 너는 죽음의 테두리를 만지듯 민둥한 자국을 짚어냈다. 위장된 버릇은 오래된 습관을 이길 수 없었다. 너는 죽음이 두려웠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어려서부터 병은 늘 그를 따라왔다. '그냥 오는 대로,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젊은 날의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늙어서는 통하지가 않았다. 늙어버린 그는 삶에 대한 갈망에 어쩔 줄 몰라한다. 그는 어떻게든 견디어야 했다. 혼자 하는 일에 익숙했던 그는 이제부터 정말 모든 걸 혼자 처리해야 했다. 그는 지난 날 자신을 오고 간 많은 사람을 훑는다. 그리고 순간, 억울해 지쳐버렸다.

 

피비에게 마비가 왔다.젊은 날을 함께 한 동료 중 한 명은 정신이 상했고, 한명은 죽었다. 그는 죽음이 가지는 현실과 더욱 가까이 마주쳤다. 그리고 오히려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장례식장에서 죽음이 부당해서가 아닌, 그저 열여덟로 돌아갈 수 없기에 우는 부인을 만난다. 남편의 질책에 그는 부인 대신 혼이 났다. 부모님의 무덤, 여전히 존재하는 그들의 뼈를 보며 사라지는 것의 두려움을 위로받는다. 무덤 파는 남자를 긴 시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는 죽었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사라졌다.

 

죽음의 두려움은 죽어서야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는 이미 죽음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죽음의 전에 만난 늦지 않은 마주침. 그것은 죽음은 모든 평범한 이에게 찾아온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였다. 예상치 못한 죽음은 어제도 오늘도 쏟아진다. 죽음의 폭격 아래 안전지대란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 결국 '그냥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너는 아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하지만 서둘러 죽음의 진리를 새기며 초연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너는 아직 젊다. 너에게 그런 마주침은 조금 더 늦어도 괜찮다. 다만, 너는 조금 달라진다. 너는 죽음에 애써 태연한 척하지 않고 그대로 슬퍼할 것이며, 죽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살아 있다는 말에 익숙해질 것이다. 느려도 괜찮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조급해 할 일이 있다. 언젠가 그의 모습이 될 너의 아버지를 위해, 한 걸음 더 마주쳐야 함은 벌써 조금은 늦어버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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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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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졸업을 1년 앞둔 한 여대생은 요즘 ‘왜?’라는 주위의 물음에 시달린다. 국어국문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이번 해에 문예창작을 복수전공으로 택하였기 때문이다. 국문과의 존폐 위기에 각종 매스컴이 떠들어 대는 시점에서 경영도 아닌 문예창작이라니. 부모님, 친구들, 친척 오빠까지 그녀를 향해 ‘왜?’라는 물음을 던진다. 순수한 물음의 ‘?’가 아닌,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는 ‘?!’에 가까운 질문이다. 그녀는 1년 가까이 고민해왔던 자신을 위한 선택임에도 괜스레 몸이 움츠러든다. 왜, 나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 안 돼?

 

 

20대여, 쫄지 말고 상상해봐. 혁명을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2009.9)의 저자 우석훈은 20대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가슴 시리도록 현실적인 이름을 달아준 이다. 그가 앞서 저술한『88만원 세대는 사회과학 출판 시장에서는 이례적으로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이 숫자가 놀라운 것은, 책을 기피하는 20대들이 40%의 구매층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과 '미친 세상'에 쿨 한 척 고개를 돌리다가도, 결국 자신이 왜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답답함을 『88만원 세대를 통해 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88만원 세대는 여느 사회과학 서적이 그렇듯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물론 저자가 젊은 감각으로 친근하게 써내려갔지만, 3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익숙하지 않은 경제학 용어 때문에 한 번에 책을 완주해내기는 어렵다.

그러한 이유인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는 『88만원 세대의 속편 격인 책이 나왔지만, 전보다는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행을 타듯 우후죽순으로 나온 '청춘 위로 마케팅'의 책들이 큰 인기를 끌었지만, 문제의 개선방향보다는 '자기 계발서'에 그친 수준이었다. 결국 책은 자신들의 현실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회의가 20대들을 점령했고 청춘마케팅의 유행은 점차 식어가는 분위기다.

그러나 다시금 책을 놓고 시니컬해진 20대에게 출간된 지 4년이 지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여전히 그들을 향해 그 답을 던지고 있다. 당신들이 바꾸고자 하는 현실과 문제는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혁명'을 통해 이뤄낼 수 있다고.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88만원세대 새판 짜기. 제목과 부제는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88만원 세대가 20대를 관찰하고 그들에게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이 붙을 수밖에 없는 시대의 문제점을 꼬집었다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자신이 이름 붙인 '88만원 세대'가 어떻게 그 이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그야말로 조용히 '혁명'을 준비함으로써 88만원 세대의 새판을 짜는 책이다.
 

 

무기력한 20대, 추해서 못 참겠다

 

 이 책은 제일 먼저 20대들이 ‘혁명’을 꿈꿀 수 없는 이유와 무기력해진 그들을 일으킬 수 있는 원동력을 제시한다.

 90년대 말, 케인스 시대가 해체되고 신자유주의가 시대적 대세로 떠오르면서 대기업의 CEO가 새로운 ‘영웅’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역시 IMF 이후 본격적인 CEO 찬양 시대가 열리더니, 08년도 대선 때 이명박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지금의 20대는 이처럼 CEO가 영웅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시기에 10대를 보냈다. 학벌주의와 빈부격차가 따라오는 사교육을 볼 때 신자유주의는 어떤 선진국보다도 뼈저리게 체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길들여진 20대는 경쟁 안에 갇혀있다. 경쟁에서 실패한 20대 혹은 여전히 경쟁에 시달리는 20대 모두 사회적 존재감은 매우 낮고,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무엇을 해낼 것이라는 기대는 없다.   
 
 이들을 움직일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원동력을 ‘간지’에 목숨을 거는 20대들의 특성에서 바라본다. 이는 한예종 학생들이 든 ‘추해서 못 참겠다.’라는 피켓과 ‘옳다/그르다’의 접근이 아닌 ‘싫다/보기 싫다’라는 말로 이명박 시대에 몸서리쳤던 20대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저자는 불의는 참아도 추한 것은 못 참는 20대들의 감성에서 ‘혁명’의 씨앗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진(陣) 짜는 법, 친구들아 모여라

 

 다음으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에서는 이러한 20대들이 어떻게 하면 사회에서 존재감 있는 세대가 될 수 있는 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가장 큰 맥락은 20대 스스로 그 방향에 참여하는 ‘당사자 운동’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우선 저자는 20대가 짤 수 있는 진의 형태를 추측한다. 80년대 대학생들은 교문 돌파를 위해 펼쳤던 직사각형의 가투 진을 짰지만 지금 20대들에게는 어떠한 진도 없다. 오로지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한 자신들만의 진(陣), 즉 ‘스펙 쌓기’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진들은 커다란 사회 구조 앞에서 무기력하다. 국가 재정 활용 방안에 20대를 고립시키고 20대 신입사원들의 월급을 깎아도 속수무책이다.

 

 이들의 진(陣)은 어떻게 짜일 수 있을까. 20대에게 유신세대의 상명하복 소통 구조와 386세대의 ‘결정되었으면 따라야지’라는 민주집중제는 어울리지 않는다. 권위를 앞세워 이끈다고 이끌려 가는 세대도 아니며, 다 같이 모여 의견을 모으지도 않는다. 긍정적으로 이는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이 싹틀 수 있는 터가 20대에게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수평적인 진. 저자가 말하는 20대의 진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진(陣)을 구축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진(陣)을 만들어 낼 20대 영웅이 등장하기엔 사회는 너무나도 부패하여있으며, 강남/비강남 수도권/비수도권의 구도 아래에서 20대들은 서로가 공동의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는 20대들의 진(陣)을 구축하기 위해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찾는 것을 첫 번째로 본다. 누군가 진(陣)을 만들어보자고 나설 때, 그를 ‘엄친아’나 질투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수평적으로 함께 갈 수 있는 동반자로 바라봐주는 것. 서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때 혁명을 위한 진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혁명은 어떻게? 조용히

 

 현실적인 해결방안으로 저자는 시민운동과 정치운동, 그리고 노조설립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시민운동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를 후원하고 활동가를 길러 내는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형이든 개별적인 별도의 조직이든, 시민운동이 확대될 때 이는 혁명이 된다. 정치 운동은 작은 공간에서 출발하여 정당을 활용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운다. 지역의 20대가 당사자 조직을 꾸리기 위해서는 기초의원 선거부터 출마하여 지역에 뿌리를 둔 실제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 곳곳에 널린 ‘알바’들이 자신들의 노조를 구축할 때, 이들의 운동은 대리인 운동인 동시에 당사자 운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국의 20대 혁명의 모델로 68운동과 차티스트 운동을 세운다. 그는 20대의 혁명이 68혁명의 은유를 유지하되 차티스트의 운동과 같이 구체적인 요구 사항들과 입법을 포함한 정책을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권리 선언문’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권리들을 제시한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큰 틀과 함께 구체적인 방향까지 제시해준다. 『88만원 세대를 읽고,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발이 들었던 이들에게 친절한 매뉴얼을 건네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제시한 방안이 지금의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이뤄지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때문에 이 책은 '그럼에도' 현실을 타파하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무기력한 20대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대’라며 기를 죽이지도, 자신감을 사디슴 적으로 주문하지 않는다. 20대를 이해하고 관찰하여, 그들의 혁명이 가능하게끔 원동력을 끄집어내 준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진(陣)도 리더도 아닌 20대들이 서로 부대끼며 지낼 수 있는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당장 큰 변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엄친아’라며 누군가를 배척하지도, 나는 SKY대고 너는 지잡대야, 라며 저들끼리의 계급을 나누지 않고 20대의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서로가 우정을 회복하는 것. 그러한 조용한 혁명에서부터 세상을 바꿀 혁명은 이루어질 수 있다. 20대의 ‘혁명’을 통해 그가 이뤄내고 싶어 하는 세계 역시 소박하다. 

 

 20대가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세상. 그리고 그것을 실현해 먹고 살 수 있는 세상. 그는 불신 지옥의 대학에서 한방의 취업을 노리는 고독한 저격수가 아닌, 명랑하게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20대의 세상을 꿈꾼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왜?’라는 물음에 시달리는 국문과 여대생을 포함한 수많은 20대에게 이러한 말을 전한다.

 

쫄아있는 ‘당신들’, 혁명을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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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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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시작으로 조정은 청의 대군을 피해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다다른다. 김상헌은 남한산성에 임금이 있다는 말에 서둘러 행장을 챙겨 떠난다. 죽음을 각오 할 만큼 춥고 머나먼 길임에도 그는 ‘삶 안에 죽음이 있듯, 죽음 안에도 삶은 있다’는 말로 자신의 길을 걷는다. 김상헌은 강을 건너기 위해 사공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청병을 도와 곡식을 얻어 살아가려하는 사공의 목을 베어버린다. 김상헌은 그렇게 사공을 ‘죽어서 살게’ 한다. 하지만 사공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나는 사공에 대한 연민을 품고 다음 책장을 넘기며 그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줄기의 물음이다. 주화파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주전파는 치욕적인 삶은 곧 죽음과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임금은 그 물음에 고뇌한다. 시간이 흐르고 군병들은 추위 속에서 지쳐가고 백성들은 불안함 속에 뜬소문에도 이리저리 흔들린다. 안에서 무너지느냐, 밖에서 무너뜨리느냐. 결국 시간의 끝에 결과는 같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임금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임금에게 자신의 삶 뿐 아닌 조국의 삶,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달린 거대한 ‘삶의 선택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백성들에게 임금의 선택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라는 말장난 같은 말로 표상된 것이 아닌 그저 ‘농사를 준비할 것인가, 농사를 준비하지 말 것인가’라는 그야말로 삶, 그 자체의 선택일 뿐이다. 백성들은 명분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나길 원하지만 그 선택권은 주어지지 않는다. 군병들 역시 임금의 고뇌를 ‘계집이 뻗대는 것’에 비유하며 조롱하지만 상관의 명령에 따르며 하루를 보낼 뿐이다.

 

겨울의 추위는 담에 흘러내린 물을 저절로 얼어붙게 만들어 적을 막지만 군병의 손, 발 또한 얼게 만든다. 봄이 오고 얼어붙던 추위는 녹아내려 성벽마저 허물게 만든다. 그리고 그 구멍사이를 통해 당하관 두 명은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성 밖에는 칸이 도착하고 더 이상 버텨낼 식량과 힘은 사라져간다. 결국 ‘실천 가능한 치욕’과 ‘실천 불가능한 정의’에서 임금은 말 그대로 ‘실천이 가능한’것을 택할 수밖에 없다. 임금은 ‘살아서 죽을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임금에게 칸에게 보낼 국서를 명령받은 당하관 셋은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선택한다. 교리와 수찬은 죽음으로 삶을 택했고, 정랑은 살아서 죽는 것도, 죽어서 사는 것도 아닌 나라도 품계도 없는 세상에서 혼자 살아날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김상용은 당면한 것을 당면하며 삶을 결정한다.

 

그렇게 남한산성의 47일은 임금의 절로 마무리 된다. 임금과 조국은 치욕 속에서 죽었고, 그렇게 살아났다. 임금의 선택에 청에 잡혀가는 기녀들은 울며 임금을 부르짖고, 남은 백성들은 농사를 준비한다. 이마에 피가 나도록 올린 절로써 임금은 삶의 씨앗을 품어낼 흙냄새를 쫓았고 그렇게 성안에 봄빛이 찬다.

 

그 시대 백성들은 임금의 명령에 따를 뿐, 임금의 선택을 이해하려하지도 화(和)니 전(戰)이니, 이해할 수도 없다.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하기엔 애초부터 놓인 패가 너무나도 악하고 약했다. 결국 임금의 선택에 백성 중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는다. 백성들은 그렇게 ‘그나마’ 선택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사공은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백성이었던 사공은 죽은 것이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에 결정되어진 사공의 삶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사공의 딸 나루는 살았다. 죽어서 산 것도, 살아서 죽은 것도 아닌 그저 살아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싹이 트는 봄, 나루는 초경을 흘려 새로운 삶을 품어낼 수 있게 된다. 책을 덮자 나는 사공의 죽음을 마냥 억울히 여길 수 없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이 소설을 읽고 그 시대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자와, 선택되어져야 하는 자들이 겪은 저마다의 고통과 고뇌를 읽어내었을 뿐, 그 시대 어떠한 삶이 옳은 것인가 또는 임금과 백성의 고통 중 누구의 고통이 더 힘든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왕은 남한산성에 있었고 그 시대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시대에 있고 한 사람으로서 ‘삶’을 고민해야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는 사실만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겨울은 언제나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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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정미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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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션 속의 안위 : 당신은 너무도 아름답게 거짓말을 하는 군요.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힘들어한다. 도시의 삶은 더욱 그렇다. 욕망이 들끓지만 결핍은 공허하다. 둘은 정비례관계이다. 욕망이 넘쳐갈수록 결핍은 더욱 헛헛해진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도시의 사람들은 대학입시, 취업, 결혼, 출산. 적당한 시기에 맞추어 짜인 커리큘럼 안에 발맞추어 살아간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은 결국 타인의 욕망을 향해 있다. 내가 하고자, 이루고자 하는 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가. 뒤돌아볼 여유는 없다. 현실은 바로 현재를 쫓지 않으면 바로 낙오되어버리는 사회다. 보통의 도시인은, 결국 지쳐버린다.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순간의 작은 위안뿐이다. 월급날 예쁜 구두 한 켤레와 초코가 범벅이 된 케이크를 사는 것으로 위로를 건네거나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온라인 게임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이질감과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은 가상세계의 나 자신을 새로이 만들고 그 안에서 안식을 찾는다. 가상, 즉 거짓 속에 숨어버리는 것. 나를 분한 아바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욕망을 풀어내는 것. 그것만이 보통의 도시인에게 최선의 선택이다.

 

무언가모래폭풍속의 화자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들은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안고 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국 현실을 피해 거짓에 집착하는 것은 다름이 없다. 두 단편 속 화자들은 모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통의 현실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 엄마의 빚과 남자친구의 바람. 진부하다면 진부한 클리셰적 요소이지만 그만큼 쉽게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요소다.

 

1) 무언가를 내뱉어야만 하는, 무거운 현실 : 무언가無言歌

    

내 마음은 엄마 얼굴을 보기 전보다 더 단단해진다. 낯빛과 달리 엄마는 앉자마자 우는 소리다.....확 짜증을 내자 어느새 눈물자락을 펼친다.....돌아서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엄마 연기력을 당해낼 수가 없다.

(중략)

엄마는 면회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허리를 구부정하게 접는다. 한숨을 내뱉는 품이 오랜만에 왔다고 한바탕 퍼부을 기세다. 어떻게 하면 불쌍해 보일까 목을 갸웃이 뺀 뒷모습으로 나가는 걸 보자 명치가 답답해지며 얼굴로 열이 확 끼친다.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엄마다. 화자의 엄마는 빚 때문에 벌써 두 번째 구치소 생활을 하고 있다. 억울하게 들어간 것도 아니다. 푹 빠진 남자 때문에 성형수술을 하고 남자에게 돈을 가져다 바치다가 생긴 빚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 상견례에서 무례한 언사를 뿜어내며 딸자식의 혼사까지 망친 전력이 있는 이 엄마는 화자의 말처럼 한번 지고 나면 일생을 벗어 내려놓을 수 없는 장기배낭처럼 등에 들러붙어 숨통을 조이는 질기디 질긴 넝쿨과 같다. 그녀에게 짊어진 현실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다.

 

화자의 직업은 텔레마케터이다. 불특정고객에게 회사가 기획한 부동산상품을 홍보하는 직업이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저희는..’으로 시작되는 전화를 곱게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개 곧바로 전화를 끊어버렸거나 잘 걸렸다는 듯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하루 종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그녀에겐, 수화기 하나 역시 너무나도 무겁다.

 

당신 목소리를 사지.

놀라서 쳐다보는 내게 그는 덧붙였다.

그렇게 섹시한 목소리는 처음이야.

 

다만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매혹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목소리는 사람의 속성 중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란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목소리에 끌린다는 건 눈이나 입술, 혹은 품성에 이끌리는 것보단 더 본질적이며 지속 가능성이 높은 매혹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 목소리를 계약하며.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불특정고객한명이 상품에 관심이 있다며 따로 만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남자는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사겠다고.

    

K가 처음 내 목소리를 사겠다고 했을 때, 말 그대로 목소리만 주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샤일록에게 내린 판결처럼, 목소리 외엔 줄 수 없으니 외과수술로 성대를 적출해서 가지라고 떼를 쓸 생각도 처음부터 없었다. 그건 다만 마음까지 달라는 건 아니야, 혹은 네 마음까지 원하는 걸로 오해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까지로 해석할 수 있는 뻔한 은유일 뿐이다.

    

그녀의 해석대로 K와 화자는 그날부터 목소리와 함께 따라붙은 은유를 매매한다. ‘네 목소리 랍스터 스시 같아. 차가운 바다향이 밴 비린 살점.’과 같이 겉 멋든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 그들은 간단히 말해, 몸을 팔고 몸을 사는 것이다. 화자는 마치 부동산 상품을 팔듯이 자신의 목소리를 팔아버린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들려주길 원하는 그를 위해 무슨 말이든 내뱉는다. 말을 멈추는 순간 그에게서 해고당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통한 위안, 하지만 無言歌 

   

 

새로 개발된 대규모 온천지 배후에 .....그 사람의 입술은 내 젖가슴을...... 분양은 이미 끝났지만 남아 있는 회사지분을......엉덩이가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면......나는......그 사람은 어젯밤에도......현재의 은행금리라면 예치해놓을수록......내 다리를 벌리고......

내용은 다르지만 어차피 토지에 관한 정보도. 내가 그의 귀에 속삭여야하는 이야기도 진저리나는 픽션일 뿐이니.

    

 

엄마의 빚과 딸의 성매매. 이는 마치 혀를 쯧쯧 찰 만큼의 신파적 전개이다. 하지만 그 둘의 모습이 꼭 처럼 비춰지지는 않는다. K와의 관계는 엄마의 빚과 불특정다수를 향해 드는 수화기처럼 단순히 무거운 현실만은 아니다. 화자의 태도는 마치, K와의 관계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자는 현실의 짐에서 벗어나 픽션 속에 자신을 담구는 것이다. 그 역시 현실에 점철되어 있다하더라도.

 

 

K가 준 봉투에 들어있는 돈으로 무언가를 사고 싶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쳐가며 걷다 속옷가게로 들어간다. (중략) 포장을 하는 동안 쇼윈도에 걸린 가터벨트를 쳐다보자 아가씨는 서랍에서 같은 걸 꺼내어 보여준다. 남자친구가 너무 좋아할 거예요. 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스타킹도 같이 넣어주세요.

    

 

 

위의 문단을 볼 때, 그녀가 단순히 을 목적으로 K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K에게서 받은 돈을 그대로 K와의 관계를 위해 바치고 있기 때문이다. 줄어들지 않는 엄마의 빚,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이상을 꿈꿀 수도 없는 현실 속에서 그녀는 픽션을 통해서라도 달콤함을 맛보고자 한다.

 

나의 노래 속에서 나는 늘 사랑받으며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여자이며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오만한 여자가 된다. 때로 이 놀이를 원하는 건 K보다 내가 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녀는 현실에 지쳐 외로운 한 도시인이다. 목소리만을 거래한, 결국 마음은 주고받지 않는 거짓된 K와의 관계 속에서나마 안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처절한 도시인.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픽션 속에서 마냥 즐거워하며 즐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 화자 역시 이것이 오로지 픽션일 뿐이라는 것, 결국 거짓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지 말아요.

 

그 말은 그 여자가 아니라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요 며칠 동안 내 마음 속에서 아우성치던 목소리가, 이러지 말아요, 그 여자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 같다.

(중략)

이러지 말아요. 그 여자의 번호를 누르고 이러지 말아요, 하던 목소리를 한 번 더 듣고 싶은 충동이 가터벨트의 고리처럼 자꾸만 내 살을 파고들었다. 오후 내내.

 

결국 그녀가 내뱉고 싶었던 말은, 부동산 상품에 대한 이야기도, K에게 내뱉던 한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라일락 향에 대한 이야기도 아닌 이러지 말아요라는 현실에 대한 절규였을 것이다. 욕을 내뱉으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그리고 자식의 앞길을 망치고도 미안한 얼굴 한번 보이지 않는 엄마를 향한, 찢어질 듯 허벅지를 파고들더라도 가터벨트를 입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현실을 향한 이러지 말아요.’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말하는 나까지도 위로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진화된 거짓말을 하고 싶다. 내가 만든 픽션을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다.

 

지나친 포만감이 주는 이상한 후회와 가려움. 수면 아래 잠기는 현악기의 마지막 떨림. 이러지 말아요, 울고 있다 전화를 받았던 여자의 목소리. 갑작스러운 공포의 기운. 저 문을 열면 일시에 밀려들어온 바닷물이 나를 수장시킬 텐데.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면 현기증과 두려움이 깨진 선체 틈으로 밀려드는 차가운 바닷물처럼 내 몸 위로 일시에 차오르는데.

 

엄마, 사는 게 왜 이리 지루해? 조잡한 픽션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으니.

 

화자는 만들어진 픽션 안에서 자신을 위로하려하다가도 순간순간 치밀어오는 현실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도소에 계속 있던 말던 더 이상은 신경쓰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고 왔음에도 자꾸만 다시금 덩굴처럼 자신을 옭매는 엄마. 결국 모두 허상일 뿐이라는 걸 자꾸만 인식시키는 가터벨트의 집게, 그리고 추잡한 픽션에 대한 죄책감. 차가운 바닷물처럼 밀려오는 그 공포 속에서도 화자는 손 쓸 수 없다. ‘조잡한 픽션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으니.’

 

 

 

2) 당신은,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모래폭풍

 

  누구나 거짓말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걸, 양치기 소년이라는 동화를 통해 배우며 자라왔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짓말을 한다. 코에 생크림을 묻혀놓고는 케잌은 손도 대지 않았다는 새빨간 거짓말, 단맛이 나는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맛있다고 웃어주는 새하얀 거짓말.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서, 또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

 

모래폭풍의 화자는 새빨갛고 새하얀 거짓말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거짓말이 섞이어 분홍빛의 사랑을 지켜내길 바란다. 그녀는 애인의 외도를 눈감는다. 상대방을 몰아세우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외로움을 피하기 위해 화자는 다른 여자의 체취로 흥건한 침대 시트를 모르는 척 무시한다.

    

사람들은 관계를 망가뜨리는건 거짓말이나 불성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를 끊어놓는 것은, 물 위로 떠오른 익사체처럼, 대개 감추어져야 할 사실이다. 대부분의 진실은 불결하고 때로 사악하다. 일상이 도덕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보들은, 그 고집 때문에 잃지 않아도 될 많은 것들을 잃게 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빈손을 내려다보면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그 사람이 더 소중했다고. 아버지가 잠 속에서 중얼거리는 다른 여자의 이름을 들었다 하더라도,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스무 살짜리나 입을 만한 레이스 투성이 블라우스를 입고 아버지를 찾아가 울고불고 하지만 않았다면 엄마는 아버지를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감추어야할 사실을 감추지 않는 이들을 바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 그녀가 바라본 엄마는 처절함 그 자체였다. 이미 마음이 떠나버린 아버지의 두 다리를 붙잡고, 불화의 절정에서도 고집스레 뱃속의 아이를 키워내려 했던 엄마는 결국 아이를 사산했다. 훗배앓이에 안방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는 엄마를 보며 화자는 다짐했을 것이다. 사실을 숨겨서라도. 빈손이 되지는 말자.

 

화자는 네이트 판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으로 멍청한 인물이다. 전임자리 핑계로 천 만 원을 뜯어내고,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때문에 만난다는 여자가 있으며, 제 기분대로 콘돔도 쓰지 않은 채 관계를 원하며, 그러다 덜컥 임신을 했으나 너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낙태를 권하는, 한마디로 개새끼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 더욱 화자가 미련한 것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도 그에게 이별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미련함 전면에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떠나버린 아버지와, 남편을 빼앗긴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어머니가 있었다. 오로지 여자와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에 빠진 부모. 화자는 자신의 존재가 그들이 떠나는 것에 어떠한 망설임도 주지 못했다는, 그들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도 아니었으며, 아무런 고통도 주지 않았다는, 자신은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외로움을 품고 사는 인물이다.

 

    

........저 벚꽃이 피기 전만 해도 당신을 몰랐는데 이제 오랫동안 알아온 것처럼 느껴지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당신의 생각을 한순간도 지울 수 없는 이 강박증마저 내겐 달콤한 고통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현수는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제 곁에서 떠나보낼 수 없다.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도,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도 못 본 척 눈을 감아버린다.

    

나는 현수의 눈을 바라본다. 이 남자는 거짓말에 서투르다. 뭘 숨기는 데도 서투르다. 거짓말을 하는 데 테크닉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모른다. 낯선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누구냐고 묻는 내게 적당히 거짓말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걸 못한다. 그러다보니 한주일 동안에 그 여자를 다섯 번이나 만난 그대로 들키고야 마는 것이다.

 

마치 그녀의 모습은 과거의 엄마와도 같다. 엄마를 보며 어떠한 삶의 교훈을 얻어냈지만 결국 그녀의 모습은 처절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타난 바퀴벌레를 때려잡기 싫어, 몇 초간 불을 끄고 바퀴벌레가 숨을 시간을 유예해주듯 그녀는 그가 제대로 현실을 감추어주길, 제대로 거짓말을 해주길 바란다. 그녀에게 현실은 감추어야만 한다. 거짓을 현실로 바라보아야한다. 그녀는 스스로 그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고, 그 픽션 안에서 머무르고자 애쓴다.

 

그녀는 답답하다. 하지만 그녀를 욕할 수 없다. 그녀는 너무도아름답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자신은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질 존재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감추고 있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결국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깨끗이 모르는 척 할 수 없다는 것을.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몇 가지의 꽃들로 만들어진 그게 어쩌면 싸서 집어든 듯 보이는 건 순전히 내 기분 때문일 것이다. 쇼핑백 속에는 뜬금없이 두 장의 시디까지 들어 있다. 어디 편의점에서 산 듯한, 클래식 컴필레이션 음반이었다.

 

그가 잘못한 건 없다. 사소한 일에 깊이 상처받고 무딘 칼에도 예리하게 찢기는 불량한 심성을 내가 가졌을 분이다. 눈물 대신 헛구역질이 솟는다. 진땀이 배어난 이마에 빌어먹을, 샌드 스톰이 부딪쳐온다.

    

현수가 감추려했던 사실, 화자 역시 감추어놓고자 했던 사실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녀가 바랐던 분홍빛의 미래는 없다. 그저 갈색의 건조한 샌드스톰만이 방 안에 가득 들어찰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거짓말을 멈출 수 없다. 모래폭풍이 밀려와도 어쩔 수 없다. 거짓으로 감췄던 현실이 정말로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 그녀는 사막 위에 홀로 남겨져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당신은 짐승,

 

 

바람을 피면서도, 현수가 화자 옆에 남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 혹은 아직도 남은 옛 감정.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이상 현수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좀 더 많은 꽃씨를 따 모으고자했던 외로운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싸구려 꽃다발을 화자에게 건네면서라도 지키고자했던 꽃씨. 이는 화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외로운 그녀가 속에 품은 현수라는 꽃씨. 그들은 외로움을 갈망하며 씨를 주고받는. 그러면서도 꽃을 피우지는 못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짐승이자 별이다.

 

 결국 현실, 해열제를 삼키는 사람들 : 검은 숲에서

 

호모루덴스의 삶을 살자. 청춘을 위로하기 위한 지침서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조언이다. 팍팍한 현실에 쫓기지만 말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현실을 놀며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악기 하나쯤 배워보기 또는 를 찾기 위해 무작정 배낭여행 떠나기. 책장을 넘기며 20대들은 그럼 나도 한번...? 이라는 생각을 품지만 당장 방학동안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토익점수를 올리고 스펙을 쌓아야한다. 학자금대출로 졸업 전에 이미 빚만 산더미다. 이들에게 현실은 말 그대로 현실이며 낭만을 꿈꾸기에 여유롭지 못하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바라는 것은 뭔가요. 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취업. 바라는 건 그것 밖에 없어요.

 

검은 숲에서의 화자는 건물주의 사기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방에서 쫓겨날 신세에 처했다. 일주일 사이에 체중이 삼 킬로나 빠져나가고 닷새째 화장실을 못 갈 정도로 의욕 없이 지쳐버린 그녀에게 효의 전화가 걸려온다. 삼년 만에 걸려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약혼자의 전화이다.

    

이상도 하지, 왜 나는 효의 전화를 받고 새로운 생의 의지를 품게 되었을까. 오래된 감기가 어느 날 나아 있듯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그건, 그가 돌아와 다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동화 같은 기대감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전화에 그다지 큰 충격을 받지 않는다. 꿈같은 목소리를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낸다. 그리고 그녀는 오히려 그 날부터 삶의 의욕을 찾고 현실을 인식한다. 경매공고 이후로 불면에 시달리던 화자는 효의 전화를 받고 비로소 깊이 잠이 든다. 마치 해열제를 삼킨 듯, 들끓던 현실의 고통이 잠든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나는, 분노를 소멸시키지 못하는 존재이다. 자기 몸 어느 구석엔가 쌓아놓고는 우물에 독약을 던지고 그 물을 퍼마시듯 조금씩 그것을 퍼먹는다. 효가 정말 오래전 죽어버렸기를 나는 원한다.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건 그가 던진 칼에 심장을 찔려 죽는 것과 같다. 어쩌면 진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그건, 피를 흘리면서도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고 피를 흘리면서도 웃고 또 무언가를 먹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네가 부정해버린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삼년 전 효의 엄마는 효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통보한다. 결혼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때, 화자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만큼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삼년이 지나고 화자는 효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여긴다. 아마 화자는 효가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떠났을 바에, 차라리 죽었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전화를 받고, 효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상상 속에서 이미 죽어버렸던 효가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효는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화자에게 전혀 새로운 사람일 뿐이다. 저를 부정해버린 효는 예전의 효가 아니며, 효에게 부정된 저는 그 옛날의 자신이 아니다.

 

추억 조차될 수 없도록, 그가 살아 있다는 현실낭만을 저만치 밀어내버린다. 과거 속에 맴돌던 효에 대한 추억과, 상상들이 점점 뚜렷한 현실로 변해버린다. 흐지부지하게 결말짓지 못했던 연애가 드디어 끝나버렸다. 화자는 허무한 듯 보이면서도 무척이나 담담하다. 화자에게 사랑은 과거이자, 지금 원하고 갈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이다.

 

당신은 지금 뭘 원하죠?

당신과 똑같은 것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건 뭐죠?

사랑받는 거겠죠.

 

누군가 나에게, 당신에게 필요한 게 뭐죠? 묻는다면 나도 내 방, 이라는 말 대신 사랑받는 것,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복잡하지 않을 때 효의 전화가 왔었다면 좀 달랐을까. 사랑 같은 건, 겨울이 지나면 살던 집에서 밀려나야 하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사랑이라니. 내게 필요한 건 당신이고 사랑이에요. 저런 대사나 읊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에 쫓기던 때가 아니었다면, 화자는 효의 전화를 조금 더 반갑게 받을 수 있었을까. 과거의 달콤하던 장면들을 붙잡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마냥 효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화자에게 현실은 그런 유통기한 지난 사랑을 마시기에 너무도 지쳐있다. 호모루덴스의 삶을 살 수 없는 이시대의 20대들처럼.

    

사진집을 선물 받았으면 좋겠다. 너무 많은 나무들로 숲은 온통 검었다. 사실은 나무는 제 무게를 못 견뎌 그렇게 생의 한 순간 제 허리를 접으며 푹 주저앉아버린 거야. 그렇다고 죽진 않잖아. 알 수 없는 언어가 만약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면 그게 잘못된거야. 그의 어머니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월급날마다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보낸다. 마치 남이 주는 것처럼 택배를 부쳐 받고는 집으로 와서 서랍에 처박아버린다. 한 달 동안 귀를 찌르는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를 견뎌낸 자신을 위한 선물. 조금이나마 삶을 낭만스럽게 만드는 자신만의 연극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조차도 그녀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단편의 마지막은 언제 쫓겨날 지모를 방 안에 가만히 누워 다음 달의 선물은 사진집으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어렴풋이 스쳐보았던 사진집의 그림을 떠올려보며 감상에 젖다가도, 한순간. 그녀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읊조린다.

 

   그 사진집이 얼마였더라.

 

 

끝으로,  ‘발칸의 장미내게주었네.

 

입시, 기러기 아빠, 부동산, 낙태, . 소설 속 인물들이 안고 있는 현실은 뉴스나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상황 속에 한껏 지친 상태로 등장한다. 정미경 특유의 담담하고 건조한 문체 덕분에 분위기의 가라앉음은 더하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섬세한 시선은 건조함 그 속에 갈라져있는 표피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존재가 바로 고통인 땅이지. 아이러니하지 않아? 겨울엔 비와 진흙 때문에, 여름엔 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는 곳이지만 그보단 어디서 저격병의 총탄이 날아와 몸에 박힐지 모르는 처절한 내전의 땅이지. 그 발칸 반도의 어둠이 흩어지기 전, 무거운 공기가 흔들리기 전, 자정부터 새벽 사이에 줄기를 자른, 강한 향기가 고스란히 가두어져 있는 그곳의 장미가 지상에서 가장 귀하게 대접받는 거야.”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 305p

 

발칸은 존재가 바로 고통인 땅이다. 고통이 가득한 현실, 그 속에 피어난 장미는 그만큼 강한 향기를 뿜는다. 하지만 꽃은 현실에서 곧 시들어버리고 만다. 주인공은 장미를 현실에서 지켜내기 위해 드라이플라워로 만들어 꽃병에 담아놓는다. 하지만 결국 죽어버린 꽃. 이 책은 꽃의 이상을 품고자 하지만, 결국 건조한 현실에 머무르는 도시인들의 이야기이다. ‘발칸의 장미내게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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