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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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를 훌쩍 넘어 키가 자라도, 발목을 훤히 드러낸 교복 바짓단에 몸을 떨고 마는 열여덟의 아이들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에 서 있다. 합격과 불합격, 사회에 제대로 진입하느냐 낙오되느냐의 경계에 시험당하는 시기다. 화장을 하고 술을 마셔대는 성인, 스무 살의 나이가 되어서도 다르지 않다. 경계선 위의 아이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지독한 불안은 우정의 그룹 안에서 해소되곤 한다. 그 속에서 균형 있게 자신의 자리를 버티고자 노력하며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팽팽한 균형을 위해 아이들은 또 다른 경계,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룹의 기준에 맞게 자신을 제단 하고, 스스로 제 마음속 진실을 가두고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흐트러짐 없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쓰쿠루의 무리가 내세운 첫 번째 규칙은 ‘사랑 금지’였다. 그들은 본능적인 감정 앞에 모두 거짓말을 해야 했다. 둘이 아닌 다섯의 조화를 위해, 쓰쿠루 역시 시로와 구로를 이성(異性)으로 바라보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 구속마저 기쁠 만큼 쓰쿠루는 운명처럼 모인 다섯의 그룹을 사랑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내세운 두 번째 규칙은, ‘쓰쿠루 금지’였다. 시로의 거짓말은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진실이 되었다. 시로를 지켜야한다는 이유 저편에는 나고야에 남은 무리 속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한다는 이기심이 있었다. 냉정하고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다자키 쓰쿠루(430p)니까, 무리의 따뜻함에 안주하며 나고야에 남은 약해빠진 우리 넷보다는 잘 버텨낼 거라는 자기 합리화로 쓰쿠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박탈당한다.  

 

 나고야를 오가던 쓰쿠루와 달리 예민한 시로는 완벽했던 5각이 4각으로, 4각에서 또다시 5각으로 변형되는 과정의 균열을 바로 곁에서 느꼈다. 그리고 쓰쿠루가 도쿄로 떠났을 때 느낀 공허에 자신도 몰랐던 ‘사랑’을 깨달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은 곧 그룹의 죽음이었다.   모래성처럼 푸석거리기 시작한 그룹이 규칙을 깨버린 자신 때문에 완전히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결국 시로는 역으로 진실을 아예 뒤엎는 망상에 빠졌다. 그리고 영원한 ‘쓰쿠루 금지’를 몸소 해냈다. 어쩌면 자신의 모든 불안정을 지켜내려 했던 시로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쓰쿠루는 쿨하게 버텨낼 수 없었다. 색채 없는 이름조차 외로워하며, 떳떳한 일원으로 머물고 싶어 하던 쓰쿠루다. 그는 큰 충격 속에 사건의 진실과 자신의 마음까지 꽁꽁 가둬버렸다. 트라우마는 그를 진실에 아예 등을 돌린 파수꾼으로 만들었다. 하이다 마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자 꿈속의 무의식까지 끌고 와 자책하는 동안 트라우마는 더욱 짙어졌다. 그 후 10년 간 진심 없는 가벼운 만남만 지속한다. 그는 칼날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수록, 이별 뒤에 쏟아져 나올 피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 미리 두려워했다.  

 

 기억은 달라져도, 역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자신을 죽음까지 몰고 간 절교가 제 탓이 아니었다는 ‘진실’을 알게 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색채를 믿지 못한다. 쓰쿠루의 역사는 이미 망가져 버렸다. 그들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 그리고 거짓으로 끌어안은 무리는 결국 쓰쿠루와 시로 그리고 운명 같던 다섯의 무리마저 지키지 못했다.  

 

 경계선 위의 파수꾼은 그렇게 각자의 어른이 되었다. 나고야에 머물며 세상에 거짓 아부를 던지거나, 도자기를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에 따라 경계선을 넘어섰다. 그때, 그들이 시로를 믿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 했다면 그들의 세상은 더 좋게 변했을까. 관계 속 진실과 거짓을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만큼, 결과 역시 쉬이 예측하기 어렵다. 어쩌면 세상은 손톱 아니면 발톱을 뽑아야하는 나쁜 패만 가득할지 모른다. 패를 고를 수 있는 자유, 경계선 위에서 발을 뻗는 의지 그 정도에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경계선 위에서 손톱을 뽑을 것이다. 선택의 상처도 새 살도 내 눈과 가까운 곳에서 피하지 않고 돌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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