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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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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분주히 재잘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홀로'라는 '1'의 상태에서 금방이라도 '無'로 넘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침대에 혼자 드러누워서는 느낄 수 없는 '0'의 존재성은 군중 속에서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나는 거미줄처럼 연결된 관계망 속에 혼자 부유하고 있는 듯한 투명함을 즐긴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나만의 투명인간 놀이인 셈이다. 내가 투명인간이 되기를 자처하여,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게 된 이유는 오히려 투명해지지않기 위해서였다. 사람들과 섞이어 떠들다보면 때론 내 주장과 다른 이들의 말에 동조해야하거나, 뜻하지않은 기대나 오해가 입힌 가면에 진짜 '나'는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낸 페르소나만 남게된다. 군중 속의 고독은 나의 진짜 영혼을 느끼게 해주곤 한다.

 

 만수는 역시 제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나의 존재성을 지키기 위함인지, 나의 존재성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함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흑과 백,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도망쳐 투명을 택한 이와 달리 만수는 흑과 백 사이를 오로지 '가족의 생존'을 향해 넘나들다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만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큰 것 말고 뚜렷한 개성이 없던 자식이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어수룩하고 누이를 따라 나물 캐기를 좋아하던 만수에게 다들 커다란 기대나 몫을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고엽제'에 집을 책임지던 맏형 '백수'가 죽고 만수는 얼떨결에 집의 장남이 되어버린다. 그나마 보살핌을 주던 큰누나마저 시집을 가버리고, 만수는 완벽히 자기 아래 두 동생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 된다. 존재감이 없던 만수에게 점점 짙고 무거운 책임의 그림자가 앉게 된다. 만수는 묵묵하고 미련할만큼 그 책임을 완수해내고자 노력한다. 타고난 재능이 없는 만수는 그저 '노력'만 할 뿐이다. 특별한 자신의 색깔도 주장도 없는 만수는 오히려 그 '투명성'을 특기로 물처럼 모든 사람들 사이를 넘나들고 아우르며 사회생활을 한다. 만수는 열심히 돈을 번다. 가족을 위해,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간다.

 

 만수는 그렇게 투명인간이 되었다. 좌파나 우파. 어떤 정치적 분파에도 가담하지않고 오로지 가족들만 생각하는 무식하고 순수한 사람이다. 모두를 아우르고 챙겨가며 가족과 동료에게 '염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는 떠안지않아도 될 책임까지 모두 떠안고 희생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살지않는다. 그가 꾸는 꿈에는 가족의 안녕만 있을 뿐, 만수의 세상 속에 자신의 정체성은 이미 오래전에 '투명'해졌다. 그리고 권력 아래 그는 투명인간과 같이 없는 사람처럼 무시당하는 노동자 계급에 속해있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 중에서도 꽤 고위 관직을 맡고 있는 그는, 권력에 아부하면서도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깔보지 않았던, 흑과 백 모두에 속하지 않으며, 결국 모두에 속하고 말았던 '투명인간'이다. 그리고 만수는 정말로, 투명인간이 되었다. 

 

 상징적인 투명인간이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향토적이고 현실적인 묘사로 유려하게 흘러가던 전개가 갑자기 끼익, 마찰음을 내며 뜬금없어지는 대목이다. 만수가 살아온 삶을 가슴 속으로 애잔하게 바라보던 독자들은 갑자기 진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의아해진다. 거기다 투명인간이 된 사람은 만수만이 아니다. 태석도 석수도 명희도 만수의 아내도 투명인간이 되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진짜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사람들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태석은 부모의 버림, 같은 반 아이들의 끔찍한 괴롭힘, 선생님의 무관심과 폭력. 썩어빠진 학교. 어떤 울타리 안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안정하지 못했고, 결국 제 몸을 불태워버리듯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석수는 고문 속에서 자신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강제적으로 개조당하면서 만수의 세상 속에서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만수의 아내는 태석의 빗나간 반항심과 벽에 똥칠하며 저를 비웃어대는 시누이, 끝없는 노동과 가난 속에서 제 삶을 잃어버렸으며, 명희는 가스 중독으로 바보가 되어 넋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투명인간과 '진짜 투명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투명인간' 만수는 죽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뻑- 몸통을 날릴만큼 금속성의 자동차가 강한 속력으로 걷어차도, 꽥- 소리 한 번, 핏물 한 번 내뱉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투명인간이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너무도 사소한 소시민(小市民)이었기 때문에. 그저 열심히 살기 위해 투명인간이 되었던, 만수. 이세상의 모든 만수. 이세상의 모든 투명인간은 그렇게, 아무렇지않게 세상의 폭력에 사라지고 있다. 투명인간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두 눈을 뜰 생각조차하지않고 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이 아닐까. 투명인간도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쩌면 그들은 일부러 간과하고 있을지 모른다. 가끔 사람들은 '투명인간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소원을 빈다. 이제 나는 그 천진난만한 바람앞에 무거운 상징을 얻게 되었다. 투명인간은 이제 SF공상과학 소설에나 등장하는 환상이 아니다. 지금 내 주위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슬픔이 공허함만큼이나 무겁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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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드 모파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기 드 모파상 - 비곗덩어리 외 6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9
기 드 모파상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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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모든 단편이 10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넘어 그 시대가 가지는 모순과 결핍을 깊이있게 고찰하고 있다. 단 한 편도 그 역할을 소홀이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것은 기 드 모파상이 포착한 장면과 그려낸 이야기가 수십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의 대한민국 독자에게도 공간성과 시간성을 뛰어넘는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위 아더 월드. 마치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비정상회담'의 외국인들이 한국어로 제 나라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만국공통의 주제 아래 토론을 펼치듯, 기드모파상의 단편은 하나같이 인간 세상이 가지는 보편적인 갈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그저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범하지않은 인생을 살아온 한 인간 자체의 삶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비범함'은 비극과 닿아있어 한 편마다 그들의 기구한 삶에 마음이 쓰리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그저 개인의 불행으로 치부할 수 없다. 기드 모파상은 이야기 안에 인물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 배치한다. 그리고 힌트를 조합하여 만든 답은 결국 인간의 이기심이며,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시킨 사회의 부조리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 '목걸이'는 그 대표성만큼 대단한 작품이다. 고전이라는 이유로 이미 반전의 지점을 다 알아버려 뒤통수를 때리는 충격은 받지 못했지만 덤덤하게 그의 문장을 읽어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골이 얼얼했다. 자본주의가 낳은 허영심과 그 허영심을 수요로 삼아 탄생한 '짝퉁'. 진실된 제 모습보다는 겉을 치장하여 위상을 뽐내는 것에 급급했던 여자는 결국 진짜가 아닌 짝퉁 목걸이를 위해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하게 된다. 간단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시사하고 비판한다. 대표작 <목걸이>가 가지는 시사성은 62편의 단편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래서인지 62편을 읽어내는 동안 뻗어난 가지들이 서로 얽혀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가지들은 결코 긍정적이거나 희망을 향해 뻗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은 단편의 편수만큼이나 다양했던 시점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등등 국어시간에 배웠던 모든 시점의 예들이 줄줄이 이어져 읽는 즐거움을 더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만찬>처럼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을 들려주는 단편도 좋았지만,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독자와 동등한 위치의 화자가 등장할 수록 새롭게 느껴졌다. 간접적인 화자는 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다 화자가 단순히 이야기를 토스해주는 역할만 하여 짧은 페이지 안에서 시점에 변화를 준 <미망인>도 좋았고, 조카의 시점에서 가족들에게 외면받는 삼촌을 바라보던 <쥘 삼촌>도 좋았다.  

 

 은유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간혹 단편들은 그 은유성을 무기로, 고집스런 주관성을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끔은 어려운 시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어려운 시도,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시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번씩 난해할 수록 더욱더 은유적이고 예술적이라고 칭송받는 모습은 의아하긴 하지만, 그도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는 생각한다. 기드 모파상의 단편은 읽기 매우 편하다. 문장도 어렵지않고, 인물들의 관계성 역시 복잡하지 않다. 이야기는 단순하고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도 분명하다. 그렇기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한 편씩 읽어내기 쉬웠고, 좋았다. 책읽기를 꺼려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기 쉬운 가독성 또한 그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 중 하나다.

 

 기 드 모파상은 '선택과 집중'의 기능을 아주 잘 활용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바라보는 수많은 장면들 속에,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뽑아 간단하게 풀어낸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이 낳는 편협함은 63편이라는 방대한 개수로 시원하게 날려버린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또 이야기 자체에 빠지며, 그 이야기의 상징성을 머릿 속에서 풀어내다보면 무궁무진한 늪 속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펼친 수많은 플롯과 메시지는 앞으로 다른 작품을 감상할 때나, 창작을 할 때에도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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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무의미의 축제 ㅣ 밀란 쿤데라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만드는 또 하나의 이름. 아직 나는 쿤데라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파르티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쿤데라의 소설로 착각하고 하나는 읽었구나싶었더니 더 창피해지기만 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언젠가 읽을 북리스트에 올려놨지만, 만만치않은 분량때문인지 조금은 겁을 먹어 아직 읽지 못했다. 그보다 반토막 난 분량이지만 역시나 네명의 주인공을 다룬 '무의미의 축제'가 나왔다. 간절하게 소름끼칠만큼 나를 사로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뤄뒀던 그의 작품들도 즐거운 흥분에 차 읽을 수 있을테니. 

 

 

 

 

 

 

 

 2. 밤, 호랑이가 온다 ㅣ 피오나 맥팔레인


진갈색 창살 사이 엿보이는 정글과 얼굴이 감춰진 빨간 원피스의 여인, 독특한 구성의 표지와 감성을 자극하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표지와 제목만 보면 정글 속 '파이이야기'를 연상케하지만, 정작 내용은 노년의 삶과 공포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반전을 거듭하는 심리스릴러 형식 이라니. 심리스릴러 형식은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않는다'를 통해 처음 접했다. (아마 그 전에도 나름 그런 형식을 취한 소설을 읽었겠지만, 특별히 기억나지않는 걸 보면 진짜 '스릴'은 없었을 것이다) '예감~'은 원서까지 구입할 정도로 재밌게 읽어 '심리스릴러'라는 문구 하나에 구미가 한층 더 당긴다.

 

 

 

 

 

 

 

 3. 대성당 ㅣ 레이먼드 카버

 

 

수업시간에 대성당을 20명 남짓의 학생들과 함께 둘러앉아 낭독한 적이 있다. 짧은 글을 아우르는 커다란 은유와, 단순한 대칭적 비유를 넘어 그가 만들어낸 환상적 세계를 통찰하는 날카로운 시각에 넋을 놓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아직 소장본을 가지고 있지않은데 개정판이 나왔다고하니 책장에 꽂아놔야겠다.

 

 

 

 

 

 

 

 

 

 

 4. 게으른 삶 ㅣ 이종산

 

 


애잔한 청춘의 민낯을 그린다니. 그런데 제목이 게으른 삶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스물세 살이라니, 마치 나를 콕 집어 가리키는 듯하다. 청춘은 '청춘'이 지겹다. 청춘을 운운하는 매체들이 지겹고, 청춘이라며 푸릇함을 기대하는 눈길이 지겹고, 마음껏 즐기지도 힘껏 열성을 다하지도 못하고 불안 속에 무기력해진 자신의 모습 그대로의 '청춘'이 지겹다. 이종산이 얘기하는 청춘은 무엇일까, 너무 감상적이지만 않기를 바라며. 한 번 담아본다.

 

 

 

 

 

 

 5. 불륜 ㅣ 파울로 코엘료

 

" 나는 아무런 미래가 없는 성적 관계가 아닌,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그의 영상 인터뷰를 보고있자니, 흑백이 어울릴만한 고전과 마주하는 듯 기이한 느낌이다. 책의 문장들을 살짝 엿보니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속속이 눈에 들어온다. 진정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에 제목은 '불륜'이라니. 아이러니하면서도 강렬한 색감으로 교차되어있는 체리 세개가 흥미를 끈다. (그래도 표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꼭 심리학 저서같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을 그리 즐겁게 읽지는 못했지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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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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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한없이 허무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병에 걸리지않기 위해 매일 아침 알로에를 갈아대는 믹서기 소리. 초록불이 바뀌어도 성급히 발을 뻗지 않고 좌우를 살피는 치밀함. 내일을 위한 저축, 내일을 위한 공부, 내일을 위한 오늘의 모든 것. 그러니까 지금 바로 현재, 숨 쉬고 있는 순간 하나하나가 허무하다. 죽음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온다.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경계선이 결코 멀리 있지도 그리 두껍지도 않다는 걸 인식한다.


 부당한 죽음 앞에 소멸하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하고 억울한가. 세상의 모든 일이 뜻대로 순리대로 이뤄지지않는다고 하지만, 죽음을 결과로 낳는 부조리는 결코 돌이킬 수도, 어떤 식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분노는 당사자가 아닌 그 당사자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는 사람의 몫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붙잡고 '살려내라'며 불가능을 애원하고, 가끔은 그 분노의 방향을 알 수 없어 오히려 황망하게 무너져 땅만 치며 울어버린다. 이 눈물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눈물이 아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친구. 내 사람을 죽인 세상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다. 그들은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도록, 마음껏 추억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다. 죽음을 인정할 수 없어 미련한 끈을 붙잡고 놓지 못한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죽은 이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대신 안고 사는 이들이 등장한다. 한 걸음 물러선 채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문체는 덤덤하고 그들의 말은 차분하게 가라앉아있다. 상황은 너무도 슬프고 아픈데도, 그들은 그걸 툭- 던져놓고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을 할 힘조차 잃은 모습이다. 무표정하게 꾹 다물린 입매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것은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영웅적이게 상황을 진두지위한다거나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던져 희생하는 그런 극적인 인물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책감과 양심으로 수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도 당시 그들이 떠나보낸 죽음을 잊지 못하고 감히 슬퍼하지도 못한다. 친구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죽음이 두려워 도망친 중학생 아이는 결국 하늘색 교련복을 입고 총대를 매고, 정치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던 어머니는 나머지 자식마저 잃을 것이 무서워 막둥이 찾기를 머뭇거리다 아들의 시체 앞에 시위에 나서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장례식이 되어버린 삶. 그 아픔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의 힘은 충분하다.


 외어야 하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르다. 중학교 시절 나는 '5.18'을 원인-전개-결과의 순서로 노트에 필기하며 달달 외웠다.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1980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광주에서 많은 희생자…. 암기과목에 자신있었던 나는 국사 과목의 점수가 좋았다. 그러다 가족이 다 함께 극장을 찾아 관람했던 <화려한 휴가>를 통해 나는 5.18의 광주를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과서에 적힌 '역사'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었다,는 사실보다 나는 그들의 삶이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5.18은 분명 정치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은 결코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을 왈가왈부하는 일에 정치적인 의도를 섞게 되면, 사실을 바탕으로 진실이 될 수 있는 일이 거짓으로 매도될 위험이 생긴다. 나는 이 책을 5.18을 중점적으로 읽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슬퍼할 수 없는 슬픔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너무도 아프게 느꼈다. 역사는 알아야하고 외워야하는 것이지만, 소설을 통해 읽는 역사에서 얻어낼 지점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과서적 문장이 아닌, 한강의 문장으로 읽어내는 5.18은 역사를 넘어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아파해야 할 인간 본연의 숭고함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부당한 죽음이 다시는 일어나지않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새기게 된다. 슬퍼하기도 전에 우리는 왜 분노에 먼저 지쳐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나는 한강의 소설을 읽고 이상한 힘같은 것을 얻었다. 남들의 슬픔을 읽고 힘을 얻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어떻게보면 이기적인 일일테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은 죽음 앞에 초연해져 무기력해진 내게 죽음의 무게가 얼마나 묵직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정말 하루에도 몇번씩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로 사람들이 '가볍게' 죽어나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으며 남아있는 사람들이 가지는 삶 역시 한층 더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이다. 너무도 쉽고 가볍게 죽어버리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가벼운 것은 절대 아니다. 이토록 죽음은 남은 이들을 아프게 한다는 당연하지만 늘 잊고마는 사실. 


 봄이 오면 벚꽃이 피어난다.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언젠가 지구 온난화로 '봄'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3월과 4월의 경계 쯤, 봄이 이 어드매에 머물러 있었거니 추억하는 것 조차 무색하게 날은 여름과 겨울 둘로 나뉠 것이다. 하지만 5월 18일. 그날은 100년이 지나, 그 후에 또 다시 100년이 지나더라도 사라지지않는다. 그 시간 속에 살아가던 이들이 떠날지라도, 그날이 남긴 거룩한 핏빛의 역사는 매년 회자되어 남을 것이다. 당연한 이치다. 외어야 할 것은 외우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하는. 그리고 죽음의 무게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그날.        


소년은 다시 올 수 없고, 그날만 계속해서 찾아온다.

소년은 다시 올 수 없지만, 그날은 계속해서 찾아온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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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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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드.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전쟁 시절, 뉴어크의 우리 동네에서 스위드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위대한 스위드에서 살인자의 아버지로 


 스위드는 신이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그를 연호하는 것만으로도 그가 가진 마법 같은 우월함이 자신에게 전해지기라도 하듯이 그를 숭배했다. 유대인에게는 희망이었고 위로가 되는 존재였던 그는 유대인이 아닌 미국인, 그것도 뉴저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스 뉴저지’와 결혼한다. 유대인이었지만 미국의 무리를 대표하는 운동선수이자 기업가였던 그의 인생은 불공평할 정도로 완벽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1부 ‘기억 속의 낙원’일 뿐이다.

 

 딸이 미국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사람이 죽었다. 그는 추락했다. 삶의 모든 아이러니가 비켜가던 '신'은 이제 보잘 것 없는 보통의 인간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쩌면 신이어서 가지는 그 특별함은, 평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지독한 비극 속에 색을 달리 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위대한 스위드’가 아니다. 살인자의 아버지다.

 

 <미국의 목가>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유대인 '스위드'의 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그의 삶은 미국적인 것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성공을 이뤘지만, 결국 미국적인 것에 가로막혀 무너진다.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던, 진짜 미국 해병대, 미국 합중국 속에서 살고자했던 그는 딸 메리를 통해 미국이 가지고 있는 끔찍한 이면을 마주하게 된다. 미국의 이면은 곧 자신이 품고 있는 이면과도 같았다. <미국의 목가>는 이처럼 스위드의 인생에 폭탄을 던짐으로써 그 부서진 환상 속의 폐허를 그리고 있다.

 

 

환상 속의 폐허와 마주하는 법 

 

 <미국의 목가>는 꽤 흥미로운 액자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화자인 주커먼은 스위드를 '신'처럼 여기며 찬양하던 무리 중 하나였다. 그의 기억을 토대로 '스위드'라는 인물의 신비로움과 위대함이 1부 내내 이어지지만, 중간 중간 그의 환상은 '내가 잘못 생각했다' 라는 말로 가로 막힌다. 자신에게 개인적인 편지와 부탁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벅차오를만큼 그를 '팬'으로서 지극히 사랑하던 주커먼은 너무도 평범하고 약해진 스위드의 무기력 속에 실망하게 된다.   

 

 

유치하게도 그의 신같은 모습에 감탄하는 상황을 기대하고 있다가 철저하게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과 마주하고 말았던 것이다. 신 대접을 받을 때 치러야 할 한가지 대가는 모여드는 신자들의 줄어들 줄 모르는 환상과 마주해야한다는 것이다. (118)

 

 주커먼은 제리를 통해 스위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스위드를 철저하게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었던 끔찍한 비극의 전말을 알게 된다. 주커먼은 고등학생 때부터 품고있던 스위드의 진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현재의 스위드와 함께 교차시키며 그의 인생을 다시 한 번 회상하기 시작한다. 주커먼만의 상상과 해석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스위드의 이야기는 새로이 시작된다. 그 안에는 어떠한 환상도 없다. 주커먼은 스위드를 '소설'을 통해 다시 만나는 것이다. 

 

 스위드의 우월함은 진실이었다. 스위드는 정말로 훌륭한 운동선수였고, 아름다운 아내를 지니고 깔끔한 경영을 해내는 존경받는 엘리트였다. 그의 아내 돈은 미스 뉴저지로 뉴저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다. 둘에게 지나친 환상과 기대 혹은 잘못된 선입견을 주입시킨 것은 그들을 바라보는 제 3자들이었다. 스위드를 신으로 추대하고, 돈을 아름다움을 팔아 '돈'을 버는 골빈 여편네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들의 속내와 본질을 보다는 겉모습만으로 판단한 것들이었다. 그런 환상이 가지는 위험 또한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메리'였다.

 

 

메리는 아버지를 증오해요

 

 대체 메리는 왜 그렇게 된 걸까. 그 누구보다 가정적인 아버지와 아름답지만 진취적인 어머니를 두고도 메리는 파괴적인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메리의 부모는 너무도 완벽했기 때문에, 혹은 너무도 완벽하게 보였기 때문에 메리는 그 견고한 틀을 깨고싶은 반항이 들었을지 모른다. 똑똑하고 예민하고 외로움을 품고 있던 메리는 -의사의 말로는- 관심을 받고 자기 위주로 상황을 돌리기 위해 말을 더듬고, 아버지에게 키스를 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 '애정'에 강박적인 욕구와 본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 폭발적인 욕구는 한 대상에 대한 집착(천문학, 오드리 햅번, H4클럽)으로 표출되었다. 아름다움이 가지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필사적으로 가축농에 매진하던 엄마, 합리적이고 균형있는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늘 미국적인 틀에 얽매여있던 아버지는 메리가 키워내는 파괴성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메리는 폭발하고 말았다.

 

 

"미스 아메리카를 원했어? 그래, 형은 미스 아메리카를 얻었네, 말 그대로 말이야- 형 딸이 미스 아메리카잖아! 진짜 미국 운동선수가 되고 싶었고, 진짜 미국 해병대가 되고 싶었고, 아름다운 이방인 아가씨를 품에 안은 진짜 미국 거물이 되고 싶었어?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미합중국에 속하기를 갈망했어? 그래, 이제 그렇게 됐네, 형, 딸 덕분에 말이야. 이곳의 현실이 바로 형 입안에 있어. 딸 덕분에 형은 그 똥더미, 진짜 미국의 미친 똥더미 속으로 내려갈 수 있는 한 깊이 내려가있단 말이야. 미친듯이 날뛰는 미국에! 길길이 날뛰는 미국에!" (73)

 

 

 메리가 가진 정치적인 신념이 정말 '메리의 신념'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 신념을 아주 무대포로 배워나가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기 시작한다. '미국'에 대한 증오는 여태껏 저를 외롭게 만든 부모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류층에 속한 아버지, 공장을 운영하며 노동자를 부리는 아버지.너희들이 말하는 '위대한 부부'는 그저 위선적인 똥덩어리일뿐이다. 그렇게 메리는 미국을 향해, 그리고 스위드와 돈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스위드는 제 인생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왜 요모양 요꼴이 된 거지?" 라는 질문을 자신이 메리에게 했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서 답을 구하려 한다. 그럴수록 그는 자괴감과 분노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메리가 바랐던 바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그러나 스위드 부부는 메리가 말한 것 처럼 그렇게 증오적인 인물인가.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들이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못하는 딸을 낳을만큼 도가 지나쳤었나. 그렇지 않다. 스위드 부부는 조금 더 잘나고 아름다웠을뿐,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사람들이 보내는 그 환상의 기대치가 너무 커 그들의 '평범함'을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결코 살인자를 키워낼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맞서고 있었다. 그들의 삶을 좋아하지 않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맞서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모든 목소리가 그들의 삶을 비난하고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이 뭐가 문제인가 도대체 레보브 가족의 삶만큼 욕먹을 것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288)

 

 그렇다고해서 스위드 부부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스위드 부부는 개인이 아니라, 위선적인 미국의 사회 구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그가 아무생각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로 혹독한 죗값을 치룬다. 오대수가 받은 잔혹한 복수는 결코 오대수의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다. 오대수의 말이 품은 사회적 정언명령에 대한 복수였다. 작가는 이처럼 겉으로 봐서는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스위드 부부'를 내세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미국의 비판적인 지점을 말하고자 했을거라 생각한다.

 

 <미국의 목가>는 함부로 스위드를 신으로 만들었던 환상도, 스위드가 지닌 합리적이라는 명목 하의 위선도, 메리의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신념도,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비꼬는 이웃들 모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목가. 농촌처럼 소박하고 평화로우며 서정적인. 또는 그런 것은 모두 똥덩어리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책을 덮으며 <한국의 목가>라는 제목으로 된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국의 목가>는 읽기 꽤 어려웠던 소설이다. 미국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나 역사를 알지 못한 상태로 읽어낸 <미국의 목가>는 그야말로 겉핥기 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점이 가장 아쉽지만, 그렇게해서라도 조금이나마 미국을 맛보게 되었다는 건 꽤 유익한 경험이었다. 필립 로스의 소설은 <에브리맨>을 먼저 읽었다. 그의 작품이 가진 매력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인물'과 '문장'들로 나와 같은 모든 '에브리맨'의 뇌리와 가슴을 탁- 탁- 때린다는 점이다. 사실 초반은 늘 지루하기 짝이 없어, 몇번이고 앞과 뒤를 들추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돌직구를 날려주는 그 탁월한 묘사와 센스가 부럽다. 그는 이제 은퇴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출간되길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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