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언어 - 하늘문을 여는 열쇠
김우현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07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1. 요약 。。。。。。。                    

 

     방언을 하늘의 언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로 여기는 저자가 자신의 삶을 간증으로 나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을 하는 곳에서 놀라운 일들(능력?)이 나타나고 큰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저자는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으며, 또 방언을 해야 한다는 방언 일반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신자들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식 - 지적인 교만 내지는 무지 - 으로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을 보여준다.

 

 

2. 감상평 。。。。。。。                   

 

     이런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건 쉽지 않다. 우선은 책의 내용이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거기 담겨 있는 저자의 관점이 거의 전체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을 읽고 감상을 남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하다. 이럴 경우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평가를 하게 되는데, 일단 그런 글은 재미도 없고 필경 공격적인 문장들로 마쳐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어쩌겠나.. 

 

 

     책에 담긴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19세기 이래로 부흥했던 기독교 영지주의의 재판(再版)이라고 하겠다. 초대교회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다가, 박해의 시기가 지나며 교회들이 한 자리에 모여 건강한 교리를 재확인하는 일이 시작되면서 잦아들기 시작했던 이 사조(思潮)는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다시 크게 부흥했다. 능력과 성결, 더 높은 삶, 영적인 비밀과 같은 용어들은 그들의 전매특허였다. 물론 저자는 이걸 ‘사탄이 교회에 침투해 성령의 역사를 인간적인 의와 지식으로 대치해버’린 것(235)으로 생각하는 듯하지만.

 

     방언을 ‘인간의 이성적인 무엇보다 더 고차원의 영적 지식의 통로’(96)로 여기는 저자의 생각은 정확히 이런 영지주의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기도를 하며 성령의 목소리를 직접 자신의 입으로 냈다는 (성경 어디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을 하는 그는(119), 방언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로 올라가’기를 구한다(120). 방언을 통해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비밀’, ‘예수 이름의 비밀’, ‘교회의 비밀’, ‘깊도다 경건의 비밀이여’와 같은 비밀구절들의 의미들이 풀어질 것이라는 구절(210)은 영지주의적 공동체의 구원론을 정확하게 담아내는 부분이다.

 

 

     특정한 비전(秘傳)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영적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영지주의는, 불가해한 하나님에 대한 인간중심적 사고의 결정체다. 처음부터 기독교의 주변부에서 싹이 텄던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기독교의 그것과 매우 유사해 많은 사람들을 혼동에 빠뜨리게 해 왔다. 일상적인 것들보다 더 우월한 무엇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사모는 영적인 계층을 만들었고, 이 계층을 지켜내기 위한 비밀들을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성경은 비밀들과 영적인 계층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깊으신 비밀은 이미 다 풀렸는데, 그분의 영원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비밀’의 내용의 전부이다. 여기에 또 어떤 비밀을 덧붙이려 하는 저자는 성경의 저자들도 감히 넘보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되지 못하고, 대신 그 자리를 주관적인 느낌과 경험들이 차지하고 있다.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게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87)이라는 설명이나 모든 영적 은사는 방언을 기반으로 나타나기에 방언은 은사의 기본(108)이라는 주장,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방언을 했기 때문에 영적 충만함을 누리며 강한 능력을 경험했다(110)는 부분, 방언에 대한 ‘지식 없음’이 방언을 하지 못하도록 제어했다(175)는 구절 등은 저자의 주장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사유와 경험에 기반해 있을 뿐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다니엘이 방언을 할 줄 몰라 그의 기도가 사탄의 세력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방해했다는 식의 지적을 담고 있는 부분(88-89)은 기가 차다.

 

 

     모든 것을 방언이라는 중심을 떠받드는 시종으로 만드는 시도는 방언에 대한 경계를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상상에 올려놓는 자의적 해석(216)을 낳기까지 하고 있다. 저자가 그토록 자주 참조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유익을 강조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를 위한 내용이지만, 방언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성경구절을 정확히 반대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고린도 교회는 공동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깨어진 상태에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교회를 향해 개인만을 위하고 자랑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라고 권면한다. 방언과 예언의 대조는 이런 문맥에서 등장한다. 그건 방언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고,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때문에 원문에는 끊임없이 ‘호 데’, 즉 ‘그러나(but)’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잘 하는 것을 자랑하고 그들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18-19절)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A도 좋지만 B가 더 나아’라는 말을 듣고서 A도 좋다고 했다는 부분만 가져다 쓰는 꼴이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저자가 영지주의적 이단에 속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사용하는 문법들이나 단어들, 사유의 논리는 영지주의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의 용어들을 담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동일한 출판사에서 마이클 호튼의 『미국제 영성에 속지말라』라는 책을 펴낸지 2년 만에 이런 책을 출판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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