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책 제목에 붙은 ‘유토피아’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리얼리스트’라는 단어가 붙으니 의미상 모순되는 한 쌍이 탄생해 버렸다.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라는 제목은 그렇게 뭔가를 풍자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 풍자의 대상은 누구일까? 리얼리스트일까, 아니면 유토피아일까?
만약 전자라면 이 책은 유토피아(존재하지 않는 곳)를 만들려고 실제로 애쓰는 사람들의 노력의 헛됨을 지적하는 것일 테고, 후자라면 그들의 노력을 비웃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그건 불가능 할 거야’)을 깨뜨리려는 의미일 것이다. “너희들은 이게 안 될라고 생각하지만, 아니야 할 수 있어” 같은.
다행이 책은 두 번째 의미였다. 전자였다면 그저 시니컬한 비판서 수준으로 전락했겠지만, 이 책은 오히려 상상력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읽는 맛은 이 쪽이 훨씬 더 크다.
책은 빈곤층에 대한 현금 지급이라는 아이디어로 시작한다. 오늘날 전 세계를 짓누르고 있는 빈곤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현금의 직접 지급이라는 정책이 꽤나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다. 반대파가 입만 열면 되뇌는 우려―그렇게 했다간 아무도 일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제 나타난 결과만 보면 근거 없는 비난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받은 현금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자를 한다. 물론 일부는 직장을 찾는 일을 그만둘지도 모르지만(하지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전반적인 추세는 달랐다. 그들의 수익은 몇 배로 뛰어 올랐고, 오랫동안 천문학적인 원조금액을 쏟아 부어 시도했던 프로그램으로도 해결하지 못한(여기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빈곤의 늪을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빈곤선 근처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은 사람들에게도 현금 지급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삶의 질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취미나 관심사에 돈과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낸다.(대체로 사람은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자연스럽게 ‘기본 소득’이라는 아이디어로 나아간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이런 정책적 논의가 조금씩 오고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논의는 부족해 보인다. 구체적인 실험이나 사례 분석 없이, 자기가 속한 정치세력의 이익을 위해 비난만 퍼붓는 한심한 수구정당 정치인들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자칭 진보정당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로 기본소득을 부정하려 한다는 점인데, 이쪽은 편 가르기를 바탕으로 한 정체성 정치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새다.
문제는 역시 재원마련이 아닐까. 우리나라의 경우 현재 국가 재정으로 효과적인 기본소득을 국민들에게 배분하는 건 무리로 보인다(대충 계산해도 5천 만 국민들에게 한 달에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려면 한 해 국가예산 전체를 털어 넣어도 모자라다). 하지만 문제는 좀 더 깊고 다양한 고민을 통해 풀어나갈 방법을 찾는 식이어야지, “모르겠으니까 하던 대로”라고 해서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송파 세 모녀’는 굶어죽을 것이고, 길을 찾지 못한 자살자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가기만 할 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책에는 주당 노동시간의 감축, 부의 재분배, 국경 통제의 완화 등 다양한 진보적 이슈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그런 아이디어가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다양한 자료로 뒷받침하기 위해 노력한다. 진보적 대안 언론사를 만들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물론 이런 제도들이 도입된다고 해서 어떤 사회가 당장 ‘유토피아’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실패나 부작용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 이에 대한 반대파의 정치적 비난과 공격도 엄청날 것이다. 그렇게 시끄러워지면, 또 누군가는 나서서 케케묵은 옛 방식을 새로운 해결책인 양 내세울 수도 있고.
당장 자신의 눈앞에 직접적인 이익이 없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려 하는 ‘대중’이라는 벽도 고려해야 할 요소다. 개혁이 어려운 건 그게 당장 눈앞에 이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인데, 그 개혁의 수혜자들 또한 그런 이유로 미온적인 지지만 보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바꾸고자 하는 게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들은 단지 ‘수혜자’만이 아니라 함께 일을 해야 할 ‘동반자’이기도 하니까.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지도 유토피아 계획의 일부여야 할 것이다.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던 철지난 계몽주의의 자취를 뒤따르자는 건 아니다. 계속 진보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인간들이 모든 문제를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낭만적 진보주의도 내 취향은 아니다(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동료들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그들을 어떤 식으로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그리고 이 대안은 단순히 당위만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한 대안이어야 한다. 이리저리 방법을 모색해보는 이 책의 시도가 사뭇 와 닿는 이유 중 하나이다. 젊은 저자다운 과감한 제안이 인상적이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