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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생명을 향해 달려온 사람들
박일환 지음 / 불어라바람아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성남, 그 중에도 그리 발전하지 않았던 태평동에서 태어나 군대에 가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살았다. 책에 나온 인하병원은 바로 그 인근에 있었고, 성남시의료원 설립을 위한 다양한 운동들이 이루어지는 모습도 직접 옆에서 봤었다.
물론 이 책에 실린 것처럼 그 자세한 내용까지는 다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사고로 몇 번인가 가보긴 했지만, 병원이라는 곳이 그리 관심이 가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병원이 문을 닫는다고 하고, 사람들이 여럿 나와 무슨 운동을 벌이고, 한참 후에 그 가까운 자리에 성남의료원이라는 병원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
병원이 문을 닫는 과정에 소유권을 둔 법적다툼이 있었고, 병원의 소유자가 하필 갑질 삼남매로 유명한 한진그룹이었고, 시민들의 복지를 위한 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데 일년에 고작 수십 억이 아깝다는 이유로 방해만 일삼았던 양심 없는 시장과 시의원, 시 고위 공무원들에 관한 이야기는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얼마 전 지인의 가족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성남시의료원 장례식장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원래 시청이 있던 그 자리에는 문화회관도 있어서 몇 번인가 합창공연을 위해 서기도 해서 익숙한 자리에 세워진 새로운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건물만 새롭게 새워진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새롭게 바뀌었다는 건 조금 아쉽다. 인하병원이 폐업한 이후 새로운 병원을 세우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던 이들은, 새로 만들어진 병원에서 일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정치와 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내가 성남에 사는 동안 세 명의 시장이 있었는데, 이재명 이전의 두 시장은 모두 비리로 구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가장 집요하게 이 문제를 방해했던 이대엽은 온갖 비효율적인 설계와 낭비로 가득한 새 시청사를 세우면서 엄청난 금액을 빼먹었던 사기꾼이었다. 이권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시의원들은 자기 할 일이 뭔지 제대로 모르는 모지리들이었고, 시청의 고위 공무원들은 ‘공무’를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보다 자기들이 더 위에 있다는 뜻으로 여기는 한심이들이었다.
복지부동이 기본 스킬로 장착된 공무원들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언제나 이전에 해 왔던 대로만 되뇌일 뿐이었고, 시장은 이 당에서 저 당으로 바뀌었지만 시정이 바뀌는 건 전혀 체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개선한 게 이재명 시장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왜 이렇게 싸움을 자주 하는지 힐난하기도 하지만, 책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공무원 조직의 관성은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좀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시장 하나가, 심지어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도 행정은 쉽게 달라지기 어렵다.
10년이 훨씬 넘는 투쟁을 해온 분들에게는 조금 죄송한 일이지만, 결국 문제를 푸는 핵심적인 열쇠도 정치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정치적 상황을 바꾸는 데에는 시민운동의 힘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겠지만, 애초에 일단 당선되고 난 후에는 여론이니 뭐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정치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좋은 정치인을 선출해 내는 건 시민들의 권리이자 책임, 나아가 의무일 것이다.
어렵게 완성된 시립의료원이 시민을 위해 잘 운영되기를, 그리고 이를 위해 애쓰고 수고한 이들의 노력이 너무 빨리 잊히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