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 파리의 벨빌에 사는 주인공 모모(원래 이름은 모하메드로 아랍계 소년이다), 양육비를 받고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길러주는 유대인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아이를 맡겨놓고 사라지는 경우도 있기에 아이들은 종종 입양이 되기도 한다) 수시로 바뀌는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쉽지 않을 것 같은 삶이지만, 책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모의 생각은 어린아이답지 않은 능청스러움(당연하지, 작가가 성인이잖아)과 애써 담담하게 보이려는 어린 아이 특유의 치기 같은 것이 짙게 묻어나온다.

      소설 속 모모는 종종 신선한 통찰을 보여준다. 로자 아줌마의 곁에는 아무도 없기에 자기 살이라도 붙어 있어야 한다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뚱보가 된다고 말한다.(99)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살이라는 시각적 소재로 기발하게 표현해 내는 부분. 불치의 병에 걸린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안락사로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개에게 더 친절하기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130)는 지적은 조금 슬프다.

 

     사실 스토리의 진행보다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런 통찰들이 좀 더 인상적인 작품인지라, 이런 구절들을 발견할 때마다 해변에서 예쁜 조약돌을 줍는 느낌이었다.

 

 

      이민자들과 창녀들, 소매치기와 마약상, 힘을 과시하는 패거리들이 주민인 거리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결코 안전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주인공 모모에게는 그런 거리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 집의 꼭대기가 가장 지키고 싶은 장소였다. 절망과 희망, 불행과 행복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달까.

 

      여느 아이들과 달리 모모는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가 얻은 행복은 누군가에 의해 수여된 것이 아니기에, 더 값져 보인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자처하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는 데서 낙을 찾는 문명화된 십대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지킬 것은 지키고,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모모가 행복을 찾는 비결이 아니었나 싶다.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사막에서도 꽃을 피워낼 수 있는 거다. 물론 이 비결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적절히 사용될 수 있을 것 같고.

 

 

     씩씩한 모모에게 응원의 박수를. 그리고 그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격려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