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해부 - '앎'을 위한 팩트체크 옥성호의 성경 직독직해 시리즈 1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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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책의 초반부 기도로 폐병을 고쳤다고 확신한 채 촉망받는 물리학자의 삶을 포기하고 신학으로 돌아선 한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애초의 진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그가 쓸쓸하게 걸어간다는 내용으로 마치는 이 이야기는, 그가 신앙으로 자기합리화를 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저자의 거의 사실화된 강력한 추측으로 이어진다.(이 책에선 매번 이런 식이다. 자신의 추측이 곧 사실이다.)

     처음의 예와 거의 반복되는 또 하나의 사례(이번에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를 든 후, 저자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자신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 이를 위해 심지어 아담의 역사성까지 믿고 있다는 식으로 (다분히 깐족대는 어조로) 자신의 보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건 다음 내용을 전개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본론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신이 볼 때, 성경 속 하나님의 모습은 차마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원시적이고, 무능력하며, 과격하고, 잔인한 신이며, 나아가 성경 속 각종 명령과 규례들은 온갖 모순을 안고 있으며,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적 법령들이라는 것. 이를 위해 저자가 분석하는(이 책의 제목을 따르면 해부하는’) 대상은 놀랍게도 십계명이다.

 

  

2. 감상평 。。。。。。。

     먼저 책 서두에 나오는 한 전직 물리학도의 실감나는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전하는 사람들은 일어난 사건을 단순히 옮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더하거나 빼기 마련이다. 더구나 저자가 전한 이야기는 그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 되고 있고, 또 마지막을 최대한 허탈하게 만들기 위한 구성도 엿보인다. 설사 그가 한 설명이 사실이 근접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젊은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물리학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단순히 속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저자의 판단은 무엇에 근거한 걸까? 또 그는 신앙에 의해 속임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가 물리학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주변의 기독교인들의) 강요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자는 다분히 이 이야기를 가지고 전통적인 신앙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못 미더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이런 식의 개별적(귀납적) 경험사례를 가지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실히 판단내릴 수 없다는 건 논리학의 기본적인 원칙이 아닌가.

 

     저자가 십계명의 조목들을 해부하는모습도 썩 능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가 이 과정에서 참고한 것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관점을 지닌 신학자들의 의견일 뿐이고, 각각의 판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신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잠재적인 것일 뿐인데, 저자는 지나치게 자신의 판단을(정확히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자유주의적 신학방법론을) 확신하고 있다.

 

     ​예컨대 왕하 3장의 모압전투 가운데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히브리어 원문은 주어를 아예 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만을 보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 본문에서 저자는 그것을 신의 분노라고 읽지만, 꼭 그렇게 읽어야 할 것은 아니다. 모압 비문에서야 그것을 자신의 신학에 입각해 해석해놓았지만, 그 비석이 성경기록을 해석하는 키는 아니다.

     [엘 엘룐][엘로힘]을 두고 저자가 그리는 신관의 발전에 대한 이미지(다신교일신교유일신교)는 애초에 문학적 수사법 안에서 두 단어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히브리 수사법에서 대구, 반복 등은 매우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고, 각각의 단어들이 꼭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전반적으로 이 책 속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사적 표현과 논리적 정합성을 다투는 문장 사이의 혼동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저자가 선택하고 있는 문자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저자가 책 속에서 지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발견되는 이중적인 모습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작은 부분에 집착하면서 더 큰 기회와 관계를 포기하는 좁은 시야 등은 분명 곱씹어 들을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심지어 여호와가 인신제사를 좋아하는 신이라는 식의 주장까지도 거침없이 하는 걸 보며(이 부분에서 저자는 레 27장의 속전 개념, 3장의 레위인 대속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메스를 들고 진리의 배를 가를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건지 싶다. 저자는 마치 자신이 성경 속 신앙인들로부터 바로 나온 것처럼 여기는 듯하지만, 그가 책 속에서 비웃고 있는 수많은 무명의, 그리고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신실하게 살려고 애썼던 신앙의 선배들 덕택에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생각지 못하는 것 같다.

 

     ​칼을 들고 다짜고짜 배를 가른다고 다 수술은 아니다. (, 저자는 수술이 아니라 해부라고 했으니 상관이 없는 걸까.) 해부용 메스는 휘두르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관련된 부분에만 그어야 한다. 하물며 의학적 목적으로 기증된 시신을 대할 때도 난도질을 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는 게 기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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