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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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아무튼, 메모』에서 기억할 만한 문장을 적어본다. 네 마음 내 마음 같은 글이었으므로.


어느 날 정말로 '갑자기' 결심했다. 달라지기로. 뭔가를 하기로. 그만 초라하게 살기로. 제일 먼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는 일을 그만뒀다. 누가 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지 관찰하는 일도 그만뒀다. 누군가 나를 좋게 생각한다고 "넌 내게 딱 걸렸어!" 기뻐하는 일도, 나쁘게 생각한다고 앙심 품는 일도 그만뒀다. 남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일도 그만뒀다. 삶이 간결해져서 좋았다. 그 대신 앞으론 뭘 할까만 생각했다.


세상만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어두움이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만 아는 것들-거의 이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 실수했다는 것, 후회스럽다는 것, 말만 앞선다는 것, 유치하다는 것, 속이 좁다는 것. 수시로 자기 비하의 유혹에 빠진다는 것,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 칭찬에 중독되었다는 것, 중요해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 무조건 이기고 싶어 한다는 것, 돈을 심하게 밝힌다는 것, 남과 비교를 너무 많이 한다는 것, 비판을 감당 못한다는 것,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것,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한다는 것


한 번 읽은 뒤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있다 보르헤스의 말이다. "우리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그리고 나쁜 일은…." 여기서 잠깐 멈추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대체 나쁜 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테면 시 같은 것으로." 이 말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평생 하는 일일 것이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中에서)


공책을 사서 모으던 시절이 있었다. 연필과 샤프, 볼펜까지. 그걸 사면 대단한 글을 써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무언갈 쓸 수 있겠다는 활력을 돈으로 사는 기분이 들었다. 첫 장에는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잃어 버려도 그걸 보고 누군가 찾아주지 않을까 하고.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름과 연락처를 쓴다.


꼼꼼한 사람이 아니고 꼼꼼한 척할 뿐이라서 끝까지 공책을 채우진 못한다. 쓰려는 자가 아닌 쓰는 자가 작가라고 하던데. 나는 매일 쓰려고만 하는 한심한 사람이 될 뿐.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의 첫 시작을 읽고 가슴이 두근대서 곧장 잠으로 빠져 버렸다. 이야기의 내용이 꿈에 나왔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성악가의 공연을 본 아이의 심정을 감히 상상할 수 없어 꿈까지 꾼 것일까.


꿈을 꾸고 메모를 해 놨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여기에 썼을 텐데. 그냥 공연을 본 아이가 웃었다는 내용만 기억이 난다. 정혜윤의 안타까움처럼 '메모해둘걸' 하는 마음. 『아무튼, 메모』는 많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읽고 기억나는 문장을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쓸 수 없는 책이다.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나대는 작가의 작품들. 카프카, 보르헤스, 리처드 플래너건, 호치노 미시오, 이탈로 칼비노의 글과 정혜윤 자신의 기억과 메모.


책을 읽는 건 열심히 한다. 책의 밑줄을 긋고 문장을 옮기는 일까지는 아직. 어쩌면 나는 책을 읽는 시간과 문장에서 파생되는 과거의 기억과 부끄러움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꿈의 포기가 아닌 꿈의 추구를 『아무튼, 메모』는 말한다. 꿈을 포기하는 건 쉽고 유혹적이다. 이런 현실에서 꿈의 추구가 가능해?라고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꿈을 말하고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죽은 자들의 언어를 빌려 응원한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를 좋아하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존재하기가 아닌 살아가기로. 나쁜 일은 시 같은 것으로 바꾸며. 아무튼, 쓰는 시간 안에서. 공책을 펼쳐 꿈을 그리는 순간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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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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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얻어걸렸다고 해야 할까. 도서관이 다시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래서일까. 1층에 마련된 신간 대출 코너에 책이 거의 없었다. 와. 사람들. 이렇게 책을 많이 읽는 거야? 나처럼 도서관 개관 소식을 듣고 많이들 왔나 보다. 소설 책장에 꽂힌 몇 안 되는 책에서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을 꺼내 들었다. 영화 《고백》의 원작자라는 정보만 있을 뿐이었다.


한 권만 빌리기는 아쉬워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이게 뭐지? 신간 책이 2층 종합 자료실에 가득 꽂혀 있었다. 올라와보기를 잘했다. 2층 올라가는 계단이 부담스러워서. 그러니까 게을러서 1층에서만 책을 고르고 떠났었는데. 가끔 찾아야 할 책이 있으면 2층에 올라오는 정도였다. 이제는 매번 올라와서 책을 빌려 가야지. 부푼 마음으로 책을 골라 들고 집으로 갔다. 미나토 가나에의 『조각들』은 소설의 정보가 전혀 없는 책이었다.


이런 내용일 줄 알았으면 빌려온 책 중에서 맨 처음 읽어볼걸. 그래도 좋다. 읽었으니. 욕심껏 책을 빌려왔는데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으니까. 미나토 가나에는 마리 유키코와 더불어 이야미스의 대표주자로 꼽힌다. 인간 본성에 감춰진 악의를 탁월하게 그려낸다. 읽으면 기분 나빠지는 추리 소설이라는 뜻의 이야미스. 『조각들』은 미용외과 의사인 히사노가 한 소녀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을 찾아가는 내용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히사노는 얼굴이 예쁘다. 가정 환경도 좋아 학교 내에서 인기가 좋다. 외국으로 봉사 활동을 갔다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이루어 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히사노의 목소리는 없다. 히사노를 찾아오거나 히사노가 찾아간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히사노의 학창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히사노의 신경을 긁는 동창의 목소리로 소설은 시작한다.


히사노를 찾아와 대뜸 날씬해지고 싶어라고 말하는 시호. 자신이 정한 몸무게의 데드라인이 넘었다고 했다. 반에서 살이 찐 요코아미를 교묘하게 놀렸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네가 그 중심에 있었다며 요금을 깎아 달라고 한다. 히사노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요코아미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눈치챈다. 병원을 벗어나 요코아미에 관련된 인물을 만나러 다닌다.


『조각들』에서 외모의 아름다움, 공부를 잘하는 능력, 행복한 가정 환경을 인물의 입을 통해 기프트라고 표현한다.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닌 선물로써 주어져야 가질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누군가에 대해서 쉽게 판단하고 생각을 말해 버린다. 저 사람은 예쁘네. 공부를 잘하니 행복하겠어 라는 식으로. 자신이 아니면 알 수 없는 행복의 가치를 마음대로 단정해 버린다.


도넛을 옆에 두고 죽은 소녀. 그 소녀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찾아가는 히사노. 돼지라고 놀림당했어도 당당했던 소녀. 단순히 살이 쪘다는 이유로 가혹한 일을 겪어야 했다. 스스로를 못생기고 키가 작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의 불행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을 구하지 못한 건 내 외모 때문이야라고 짐작했던. 낮아진 자존감을 극복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세상에는 내가 끼어 들어갈 구석이 있겠지.


울퉁불퉁한 나란 사람의 조각이 맞춰지길 기다리는 퍼즐이 있을 거야. 『조각들』은 소녀의 죽음에 감춰진 비밀이란 자신이 찾아들어갈 조각을 완성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야 한다. 쌍꺼풀을 하면 예쁠 거야. 살을 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말을 듣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의 평가가 아닌 나의 판단에 의해서 내 조각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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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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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성장 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무관심하고 방관으로 일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힘들어하는 아이가 나오고. 지구 용사처럼 맞서 싸우지는 않지만 내내 괴로워하다가 껍질을 깨고 세계 밖으로 탈출하는. 나쁜 어른이 존재하고 또 이상한 어른이 등장하며 손을 내밀어 준다.


말더듬이증이 있는 열네 살의 소년은 자신을 금사빠라고 소개한다. 호의와 친절을 간절히 원하는 소년은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부반장을 자신에게 잘해줬기 때문에 좋아했다. 원래는 다른 이에게 갔어야 할 생일 선물을 부반장은 거절당해 소년에게 줘버린다. 그 길로 소년은 사랑에 빠진다. 내내 부반장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돌아오는 한 마디는 '쳐다보지 마'였다.


114 안내원으로 일하는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엄마의 전 애인 쓰레기가 집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말더듬이증을 고치기 위해 소년은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간다. 원장은 사람들에게 소년을 '무연'으로 소개한다. 그곳에선 최근에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정해 한 달간 부르게 한다. 무연중에 다니는 소년. 스프링 언어 교육원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원장은 노트를 주면서 '말하기 힘든 말.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적'으라고 한다. 무연은 쓴다. 말을 할 수 없다면 쓰는 것으로 소통을 시작한다. '나'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쓴다. 나에 대해서. 나의 주변. 나를 괴롭게 하는 것. 나를 실망에 빠뜨리는 것. 소년은 무연에서 24번으로 이름이 바뀐다. 학교에서 이름 대신 불리는 번호. 국어 선생은 소년의 말더듬증을 고쳐 주겠다는 이상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억지로 글을 읽게 하는 국어 선생은 소년을 24번으로만 부른다.


소년은 조금씩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찾는다. 원장의 표현처럼 용기가 없는 이에게 용기를 내라는 말은 기만이다. 사람들은 가짜의 말로 진짜를 숨긴다. 하지 않아도 될 만을 하며 살아간다. 소년은 일상에 필요한 말만이라도 제대도 하고 싶었다. 교정원에서 만난 이상하거나 다정한 사람들에게서 실마리를 얻는다. 그들은 가짜가 아닌 진짜의 말을 하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계피 맛 사탕을 손에 쥐여주고 돈가스를 사주고 너 진짜 글 잘 쓴다 말해주는. 내내 사소한 친절이 소년의 입을 열 수 있게 도와준다. 소년의 마지막 이름은 용복으로 정해졌다. 소년이 쓴 노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용서와 복수'였기 때문이다. 소년을 슬프게 했던 누군가들. 용서를 하거나 복수를 하거나.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다 읽고 소년의 진짜 이름이 나왔는지 찾아보았다.


눈 어두운 독자라 혹시 놓쳤을까 봐. 나오지 않았다. 소년이 열네 살에서 열다섯이 되는 고독과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다. 추측한다. 용복이 소년의 진짜 이름이 아닐까 하는. 우리의 삶은 용서와 복수 사이 중간을 헤매고 있다는 암시가 아닐까. 독특하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내가 말하고 있잖아』에 등장한다. 캐릭터가 살아 숨 쉬고 있어 영상화되면 즐거울 것 같다.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가면 나의 이름은 무엇이 될까. 안돼. 싫어. 이렇게 불릴 수도. 용기와 위로를 주는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자신감이 떨어지고 말하는 게 힘든 어른이들. 어른이 되기 전에 좋아하는 말을 마구 하고 싶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아까워서 사 놓고 쓰지 못한 펭수 노트의 비닐을 벗겼다. 용복이처럼 나도 쓰며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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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트
황선미 지음 / 비룡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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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소설이다. 독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소설이어서 차라리 다행인 걸까. 소설은 허구니까. 꾸며낸 거짓말의 세계니까. 아니다. 소설은 사실성을 기반으로 하는데. 어디까지고 현실이고 허구인지 가려내는 건 독자의 몫이지만 너무 했다. 황선미의 『엑시트』는 한 번 잡으면 멈출 수 없으면서도 눈을 감으며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어쩌자고 이렇게 독한 이야기를 써 낸 걸까. 찾아보니 황선미 작가는 입양이란 주제에서 10년을 붙들려 있었다고 한다.


주인공 장미는 열여덟이다. 성은 노. 성과 이름이 함께 불리는 걸 싫어한다. 꽃 중의 꽃이라는 장미. 그 이름을 자신에게 붙인 부모가 밉다.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세상에 나오게 했고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조롱거리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할머니 손에 키워졌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고모 집으로 들어갔다. 고모 집에서 눈치가 보여 주말에는 백화점 수선실에서 일을 했다. 돈을 벌어서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고 어울려 놀고 싶었다.


친구 세희의 남자친구인 J에게 반해버렸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었다. 사랑과 관심이 고픈 장미였다. J는 장미를 이용하기만 했다. 좋아한다고 고백했지만 돌아온 건 폭력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장미를 불러내 괴롭혔다. 어느 날 고모는 장미의 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고모의 말에 장미는 집을 나왔다. 보호소에 들어갔고 하티를 낳았다. 그곳에서 같은 처지인 진주도 만났다.


어른들 모두 장미에게 하티를 입양 보내라고 했다. 그게 최선이라고. 아무도 하티와 장미가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성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장미는 출생 신고를 할 수 없는 아이, 하티를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대단한 모성이 우러나와서도 아니었다. 그저 하티를 머나먼 나라로 보낼 순 없었다. 보호소에서 도망쳐 나왔다. 하티의 물건과 원장의 돈을 훔쳐서. 진주의 반지하 방에 얹혀살면서 장미는 사진관에서 일을 했다.


진주가 하티를 돌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방치 수준이었지만 하티와 함께 할 수 있음에. 월급을 받아 분유와 기저귀를 사서 돌아갈 집이 있음에. 안도했다. 『엑시트』는 입양의 문제를 건드린다. 입양 기관과 협력해서 도움을 주는 사진관 사장의 오지랖을 통해 입양아들의 현재를 장미는 바라본다. 하티를 보낸다면. 자신은 모든 걸 잊고 열여덟의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 하티를 보낸다면 말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아온 해외 입양아의 슬픔을 장미는 무시하지 못한다.


『엑시트』는 장미가 겪어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처절할 정도여서 제발 그만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장미 곁에 다정한 조언과 위로를 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장미가 겪은 일에 대해 한심해 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냉정한 판단만을 했다. 소설의 결말로 나아갈 때까지 장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이 취하는 형식적인 친절이 전부였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장미를 불쌍해 할 수도 있다.


『엑시트』는 놀랍고 경이로운 기적을 장미에게 선사한다. 결코 불쌍하고 한심한 장미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장미는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강요만이 있을 뿐이었다. 폭력으로 가장된 해결책을 집어던지고 장미는 세상 밖으로 나온다. 자신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장미. 나빠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장미. 그런 장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단 한 사람이 걸어온다.


내 삶의 비상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만나는 기적이 모두에게 찾아오길 기대한다. 고통으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 끊임없이 의문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를. '몇 개월 아이' 이후의 시간도 살아낼 장미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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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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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 뒷면을 들여다본다. 주소 변경란은 총 다섯 줄이다. 그중 네 번째까지 바뀐 주소가 쓰여 있다. 두 줄 때까지는 손글씨로 그다음부터는 주소가 인쇄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추억은 방울방울이다. 12년 동안 네 번 이사를 했다. 학교 때문에 혈혈단신 혼자서 상경 비슷한 걸 한 뒤로 집에 대한 욕구가 끓어오르다 못해 흘러넘쳤다. 내 집 마련은 내 짐 마련이 되고야 마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은 늘어났다.


말똥구리처럼 짐을 등에 이고 지고 이사를 다녔다. 천장에 쥐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동물의 왕국을 실사로 체험하는 집에서부터 문을 열면 앞 집의 부엌과 방이 보이는 집을 거쳐 토요일 아침마다 마늘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대는 집까지. 욕실 천장에 물이 새서 낙담하면서 드러누워 스마트폰으로 랜선 집들이를 했다. 화사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집을 부러워했다. 구두쇠여서 돈을 들여 집을 고치거나 게을러서 집 정리를 하지도 않았다.


마리 유키코의 소설집 『이사』는 제목처럼 이사에 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전에 살던 사람이 강간살인범이라 이사를 하고 싶어 하는 기요코. 내일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다 수납장을 발견하고 불쾌한 추억을 떠올리는 나오코. 파트타임으로 이사업체에서 일을 하다 전임자가 책상에서 전임자가 남겨두고 간 편지를 읽는 마나미.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며 자신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잃어버린 유미에.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기억을 갖고 있는 하야토. 이사를 취미로 삼는 사야카.


각각의 여섯 편의 이야기는 마지막 단편까지 읽었을 때야 하나로 뭉친다. 『이사』의 목차는 「문」, 「수납장」, 「책상」, 「상자」, 「벽」, 「끈」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을 가져다 썼다. 수납장, 책상, 상자 이런 것들은 이사할 때 버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물건이다. 일상에 밀접하게 접해 있는 물건과 행위에서 공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마리 유키코는 이야기를 배치해 놓았다. 이사할 집을 둘러보게 될 때 문을 열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리 유키코는 이런 행위에서 마저도 조심하라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짧은 이야기 안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반전이 『이사』에는 가득하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 내 등 뒤에서 킬킬대는 누군가의 비웃음. 간식으로 넣어두었던 푸딩이 사라지는 이상함. 열리지 않는 문안에는 무언가 감춰져 있을 것 같은 불길함. 일상에서 마주치는 기분 나쁜 일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공포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실 공포의 실체는 별게 아니다. 누군가 살해를 당하거나 죽은 사람이 원한을 가지고 찾아오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공포는, 벽과 천장에 피어나는 곰팡이거나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바퀴벌레, 눈이 마주친 쥐, 월세를 올려 달라는 주인의 노크 같은 것이다. 『이사』를 읽으며 알게 된 것. 일본은 집을 구할 때 수입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고 주인에게 집을 빌려줘서 고맙다고 한두 달 월세를 사례금으로 줘야 한단다.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보다 그러한 사실이 더 무서웠다.


이사는 추억과 작별하는 과정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중학교 때 썼던 일기장, 원고지에 썼던 글 뭉치, 특별한 날 선물 받았던 옷 등등을 주민등록증 네 번째 줄까지 주소지를 옮겨 오면서 버렸다. 몸에 맞지 않은데도 유행과는 멀어졌는데도 가지고 다녔던 옷아 안녕. 읽으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글을 썼던 중2병 시절아 안녕. 이러면서. 책은?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책이었다. 비염과 축농증의 원인이 책에서 나오는 먼지와 곰팡이 때문이라는 걸 알았고, 버렸다.


종이책 대신 『이사』는 전자책으로 읽었다. 마리 유키코는 빨리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을 정도의 속도감을 자랑하는 소설가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러니까 대체 이 인간들은 어떻게 되는데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된다. 이사를 앞두고 있다면 당신, 조심해야 한다. 벽에 난 구멍 하나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사 중에 상자를 잃어버렸다면 끝까지 찾아내야 한다. 옆집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함부로 단정하거나 짐작해서도 안 된다. 왜 조심하고 안 되는지 『이사』를 읽으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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