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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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증 뒷면을 들여다본다. 주소 변경란은 총 다섯 줄이다. 그중 네 번째까지 바뀐 주소가 쓰여 있다. 두 줄 때까지는 손글씨로 그다음부터는 주소가 인쇄된 스티커가 붙어 있다. 추억은 방울방울이다. 12년 동안 네 번 이사를 했다. 학교 때문에 혈혈단신 혼자서 상경 비슷한 걸 한 뒤로 집에 대한 욕구가 끓어오르다 못해 흘러넘쳤다. 내 집 마련은 내 짐 마련이 되고야 마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은 늘어났다.


말똥구리처럼 짐을 등에 이고 지고 이사를 다녔다. 천장에 쥐와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동물의 왕국을 실사로 체험하는 집에서부터 문을 열면 앞 집의 부엌과 방이 보이는 집을 거쳐 토요일 아침마다 마늘을 절구통에 넣고 빻아대는 집까지. 욕실 천장에 물이 새서 낙담하면서 드러누워 스마트폰으로 랜선 집들이를 했다. 화사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집을 부러워했다. 구두쇠여서 돈을 들여 집을 고치거나 게을러서 집 정리를 하지도 않았다.


마리 유키코의 소설집 『이사』는 제목처럼 이사에 관한 미스터리를 다룬다. 전에 살던 사람이 강간살인범이라 이사를 하고 싶어 하는 기요코. 내일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하다 수납장을 발견하고 불쾌한 추억을 떠올리는 나오코. 파트타임으로 이사업체에서 일을 하다 전임자가 책상에서 전임자가 남겨두고 간 편지를 읽는 마나미.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며 자신의 물건이 담긴 상자를 잃어버린 유미에.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기억을 갖고 있는 하야토. 이사를 취미로 삼는 사야카.


각각의 여섯 편의 이야기는 마지막 단편까지 읽었을 때야 하나로 뭉친다. 『이사』의 목차는 「문」, 「수납장」, 「책상」, 「상자」, 「벽」, 「끈」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의 이름을 가져다 썼다. 수납장, 책상, 상자 이런 것들은 이사할 때 버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물건이다. 일상에 밀접하게 접해 있는 물건과 행위에서 공포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마리 유키코는 이야기를 배치해 놓았다. 이사할 집을 둘러보게 될 때 문을 열어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리 유키코는 이런 행위에서 마저도 조심하라고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짧은 이야기 안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반전이 『이사』에는 가득하다. 옆집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 내 등 뒤에서 킬킬대는 누군가의 비웃음. 간식으로 넣어두었던 푸딩이 사라지는 이상함. 열리지 않는 문안에는 무언가 감춰져 있을 것 같은 불길함. 일상에서 마주치는 기분 나쁜 일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공포는 새롭게 시작된다. 사실 공포의 실체는 별게 아니다. 누군가 살해를 당하거나 죽은 사람이 원한을 가지고 찾아오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공포는, 벽과 천장에 피어나는 곰팡이거나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는 바퀴벌레, 눈이 마주친 쥐, 월세를 올려 달라는 주인의 노크 같은 것이다. 『이사』를 읽으며 알게 된 것. 일본은 집을 구할 때 수입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고 주인에게 집을 빌려줘서 고맙다고 한두 달 월세를 사례금으로 줘야 한단다. 소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보다 그러한 사실이 더 무서웠다.


이사는 추억과 작별하는 과정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중학교 때 썼던 일기장, 원고지에 썼던 글 뭉치, 특별한 날 선물 받았던 옷 등등을 주민등록증 네 번째 줄까지 주소지를 옮겨 오면서 버렸다. 몸에 맞지 않은데도 유행과는 멀어졌는데도 가지고 다녔던 옷아 안녕. 읽으면 얼굴이 뜨거워지는 글을 썼던 중2병 시절아 안녕. 이러면서. 책은? 절대 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게 책이었다. 비염과 축농증의 원인이 책에서 나오는 먼지와 곰팡이 때문이라는 걸 알았고, 버렸다.


종이책 대신 『이사』는 전자책으로 읽었다. 마리 유키코는 빨리 다음 장을 넘기고 싶을 정도의 속도감을 자랑하는 소설가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러니까 대체 이 인간들은 어떻게 되는데 궁금해서 계속 읽게 된다. 이사를 앞두고 있다면 당신, 조심해야 한다. 벽에 난 구멍 하나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사 중에 상자를 잃어버렸다면 끝까지 찾아내야 한다. 옆집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함부로 단정하거나 짐작해서도 안 된다. 왜 조심하고 안 되는지 『이사』를 읽으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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