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비혼
김애순.이진송 지음 / 알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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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未婚)의 사전적 정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음. 혹은 그런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혼(非婚)은 '결혼하지 않음. 또는 그런 사람'이다. 차이를 알겠는가. 미혼은 결혼할 여지를 남겨 두는데 반해 비혼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요즘은 미혼이라는 말 대신 비혼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다. 비혼에는 자발적으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직'이라는 말이 붙는 것과 붙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88년생 이진송과 41년 김애순이 가지는 공통점이란 그들이 여자이고 '비혼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걸로 함께 책을 쓴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비혼』은 오랜 시간 그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넘어서서 살아가는 여자 즉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독신, 싱글, 비혼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 41년생 김애순은 혼자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중학교 때 본 영화 한 편 덕분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실천하는 길에 결혼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절 여자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가고 공무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국회 비서관으로도 일했다.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싶어 수녀 생활을 잠깐 했고 독신 여성들의 단체 '한국여성한마음회'를 만들기도 했다. 김애순은 그렇게 혼자서도 잘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한국 사회에서 '비혼'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몸과 건강 챙기기, 아늑한 주거지 만들기 등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다. 혼자이지만 부모, 친척, 이웃과 지내는 법까지 김애순은 이진송에게 다양한 삶의 노하우를 알려준다. 이진송은 역시 비혼으로서 살아가는데 겪는 불편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비혼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선이 다양해지기를 바란다.

결혼을 기본값이라고 보는 시선에 대해. 타인의 결혼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오지랖에 대해. 여성 혼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삶의 조건에 대해.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솔직하고 격의가 없다. 결혼과 출산의 짐을 여성에게 지우려는 것으로써 저출산을 해결하려는 제도의 편협함을 안타까워한다. 김애순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냥, 하기 싫으니까.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삶에 대해 어떤 사연과 이유를 끌어내려고 하지만 그냥 싫은 게 전부이다.

포기가 아니다. 선택이다, 비혼은. 김애순과 이진송은 그렇게 말한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외롭다고들 하는데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을 한다는 게 이유가 되나. 이진송의 말대로 인간은 혼자라서 오는 고독을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자식이 없으면 말년에 어떻게 할 거냐고도 하는데. 자식을 노후 대책으로 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나의 행복을 위해서 비혼이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지 대단한 삶의 신념을 이루려고 하는 게 아니다.

너나 잘하세요. 나의 삶에 이런저런 간섭을 늘어놓는 이에게 김애순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 '비혼'이라는 말이 특별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비혼』은 나와 잘 지내는 것으로서 1인분의 행복이 완성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책임지지 않으려고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자유와 행복 추구 같은 보편적인 삶의 만족을 위해 '비혼'을 선택한 김애순과 이진송의 진솔한 대화는 이상한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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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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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어디에도 있다고 믿었던 자유는 봄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추상과 환상의 일이 아니었을까. 마음껏 돌아다니고 웃고 밥을 먹은 일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염려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나만 힘들다고 슬프다고 징징대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봄은 공평하게 아프다. 원래 잘 돌아다니지 않지만 그건 일정 부분의 자유를 방기하는 데에서 오는 나만의 삶의 특성이었다.

원래 인간은 청개구리 습성이 있어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집에 있어야 한다고 하니 나가고 싶다. 그러다 200년 전에 쓰인 어쩌다가 남극 탐험을 하게 된 인물의 기록을 읽으며 마음은 세계 일주 중이라고 위로해본다. 에드거 앨런 포의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이상한 모험의 끝판왕을 보여준다. 내내 누워서 읽었는데 기괴하고 잔인한 내용으로 손에 땀을 쥐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포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을 읽고 나면 현대에 만들어진 서사의 시초가 이 책에서 발현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은 친구 어거스터스에 의해 펼쳐진다. 도입부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과장된 행동과 유머는 단숨에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술에 취한 어거스터스가 핌을 배로 데리고 가는 황당함과 유산을 물려주기로 한 외할아버지를 보기 좋게 속이는 핌의 재치를 시작으로 그들은 무모함을 보여준다. 선장을 아버지로 둔 어거스터스는 남태평양을 항해한 경험을 핌에게 들려주곤 한다. 핌은 강렬한 마음으로 바다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어거스터스의 아버지 버나드가 그램퍼스호를 고래잡이로 개조해 항해에 나서기로 한다. 어거스터스는 핌에게 같이 갈 것을 주문한다. 핌은 가족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거짓으로 꾸민 편지를 써서 친척 집에 가 있겠다고 위장을 한다. 어거스터스는 갑판에 핌을 숨겨 두고 그곳에 약간의 물과 음식을 남겨 둔다. 배가 더 이상 육지로 돌아갈 수 없을 때 핌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 계획은 성공할 것처럼 보인다. 이후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의 결과로 보자면 핌이 갑판에 숨어 있던 일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핌이 어둠 속에서 몇 날 며칠을 기절해 있는 동안 배에서는 선상 반란이 벌어졌다. 선장은 낡은 배에 태워져 버려졌고 선원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어거스터스는 인디언 혼혈인 피터스의 호의에 의해 죽음은 면했다. 어거스터스는 갈증과 허기로 핌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그를 찾아낸다. 피터스를 위주로 그들은 항해사를 죽이고 배의 권력을 탈취해 온다. 풍랑을 맞고 배가 난파 지경까지 이르면서 겪게 되는 이후의 일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시체가 가득 담긴 배, 갈증과 허기를 이기지 못해 제비 뽑기를 해서 사람을 먹는 행위, 팔이 썩어가면서 죽음을 맞게 되는 친구와의 이별, 또 다른 배에 탑승하면서 경험한 남극에서의 기이한 시간.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핌이 겪은 일을 포가 대신 쓰는 형식으로 출발하지만 결국엔 핌이 모든 부분을 책임지고 다시 쓴다. 소설이라는 갈래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이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은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 독자를 배에 태우고 온갖 고초를 옆에서 보게 하면서 남극으로 데리고 간다. 실감 나는 묘사와 긴박한 문체로서 말이다. 세상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현실이 허구를 압도하기도 한다.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속 특정 장면은 지금에 이르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가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에 기대어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감정을 배제한 세련된 문장으로 가장 먼저 잔혹한 서사를 창조해 내었다.

자발적인 칩거 생활을 보내는 와중에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읽었다. 우리는 여전히 오만하다. 핌이 남극 탐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은 잘난척쟁이에 무식하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행해졌던 인간의 무자비함을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는 강렬하게 드러낸다. 결말이 소실되면서 핌과 피터스가 겪은 마지막 항해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서 고든 핌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란 모든 이야기의 끝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걸 알아내려고 어리석게 굴지 말고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자코 들어보라는 것. 자유는 그런 데서 온다고 핌과 포 씨가 내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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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 단 한 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김현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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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열면 파란 하늘이 나를 반겨준다. 헐벗은 산의 나무들이 푸른 잎을 매달고 있다. 꽃이 피었고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함성이 들린다. 너희, 빨리 학교 가고 싶지? 씽씽이를 타고 단지 앞을 달리며 웃는다. 택배 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온다. 제목에 끌려 기사를 클릭했다. '간호사 출신 작가 김현아, 드라마 집필 접고 의료 지원 위해 대구로'

21년 동안 중환자실 간호사로 살아온 김현아의 이야기였다. 메르스 사태 때 그가 있던 병원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가 사망했다. 즉시 14일간 코호트 격리 상태로 중환자실에서 싸워야 했다. 그때 겪었던 기록이 신문 지면에 실리면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숨도 쉬기 버거운 마스크와 방호복을 입고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였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최초 메르스 사망자 이외에 단 한 명도 그곳에서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그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고 유명해졌지만 간호사 업무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근무를 하면서 인터뷰와 강연 요청에 응답했다. 간호사라는 직업과 처우에 대해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사명감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는 후배 간호사가 환자 가족에게 폭행을 당할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으로 간호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는 간호사로서 살아왔던 그간의 기록이 담긴 책이다.

의료보험비를 내지 못해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엄마를 위해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중환자실을 전담하는 간호사가 되어 그곳에서 만난 환자의 일화와 보낸 시간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내 환자'라고 김현아는 부른다. 열악한 처우와 모든 걸 돈으로 생각하는 병원 경영에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내 환자'를 살리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를 읽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간호사의 업무가 어디까지인지.

중환자실에서 그들은 무적이 되어야 했다. 신입 간호사가 들어와도 업무 파악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인원을 증원해도 모자랄판에 병원은 경영 논리를 앞세워 간호사 인원을 줄였다. 경력 간호사가 그만두는 걸 좋아하기도 했다. 인건비 부담 때문이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근무를 해서 환자에게 먹여야 할 밥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간 간호사. 폐기물 쓰레기통 옆에서 달걀 한 알을 씹지도 못하고 삼킨 간호사.

죽음과 삶이 동시에 공존하는 중환자실에서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충실히 살라고 말한다. 출근하기 위해 버스로 달려가다가 사고를 당하고 교통사고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다. 저승사자와 맞서 싸우는 김현아가 바라본 중환자실에서의 죽음의 모습은 처참했다. 돈 때문에 죽어 가는 부모 앞에서 싸우는 형제. 죽음이 임박해 옴을 알고서 같은 편이 되어 달라는 할머니.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

김현아는 메르스 코호트 격리 기간 중에 자신의 어머니를 대구로 보냈다. 그 일로 대구에 마음의 빚을 진 게 있다고 하면서 대구로 의료 지원에 나서겠다는 신청을 했다. 드라마 집필도 멈춰 두었다.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를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그는 노련하고 능숙한 간호사였다, 아니 간호사이다.

간호사란 직업은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환자들을 열심히 돌보면 돌볼수록 점점 자괴감이 커져가는 직업 같았다. 어쩌면 자괴감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끝까지 할 일을 끝까지 해낸 사람들만이 느끼는 감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전체가 위기였던 메르스 때 내가 중환자실에 남았던 건 병원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중환자실에 남은 이유는 오로지 그곳에 내가 돌보던 내 환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많은 간호사들도 나처럼 자기 환자들을 끝까지 지키려 각 병원에 남았다. 메르스에 감염되어도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던 그곳엔 간호사들의 '희생'이 가득했다.
(김현아,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中에서)

끝까지 환자를 지키려고 했던 김현아는 다시 간호사가 되어 대구로 간다. 자괴감 때문에 간호사를 그만두었던 그였다. 어떤 이들에게 자괴감은 자신의 일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었다. 책임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그럴듯한 말로써 자괴감이라는 말을 쓰곤 했다. 김현아는 자괴감의 뜻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낸 사람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자괴감인 것이다. 누가 자괴감이란 말을 함부로 쓰면서 책임을 떠넘기고 진실을 왜곡하는가.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고 약해지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삶의 정의를 곱씹게 만드는 책, 『나는 간호사, 사람입니다』. 삶이란 알 수 없다 와 모르겠다의 반복이다.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도 추가한다. 모호한 세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힘이란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단단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누군가들이 베풀어준 호의 때문이었다. 지금은 마음의 빚을 갚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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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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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소리가 크게 들린다. 윗집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 고양이가 우는소리. 냉장고가 한 번씩 돌아가는 소리. 소리가 소음이 될 때. 자꾸 신경이 쓰인다. 책을 읽거나 무언갈 끄적거릴 때는 음악을 듣지 못한다. 백색 소음이 좋다고 해서 틀어놓기도 하지만 이내 꺼버린다. 그렇다면 나는 신경이 예민한 사람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피곤한 날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을 자니까.

조남주의 데뷔 소설 『귀를 기울이면』에는 소리에 민감한 나이가 나온다. 모두들 그 아이를 바보라고 불렀다. 심지어 부모도 그렇게 불렀다. 김일우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는데(심지어 일우는 잘 생기기기까지 했다) 다들 바보라는 말로 퉁쳤다. 왜 이제서야 이 소설을 읽었을까. 조남주의 다른 소설을 다 읽어 놓고 『귀를 기울이면』은 빠뜨려 놨을까. 2018년에 이북으로 나온 걸 샀는데. 그때는 『82년생 김지영』으로 조남주의 이름이 여기저기 알려졌을 때였다.

『귀를 기울이면』은 첫 소설답지 않은 이야기꾼으로서의 능숙함이 엿보인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더해가며 한 번 읽으면 멈출 수 없게 만든다. 방송 작가 출신의 이력을 살려서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 데리고 간다. 동네 바보라고 불리는 김일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오빠 호칭에 설레는 정기섭의 이야기를 받아서 한때 잘나가다가 중간에 삐끗해서 후배한테 당근 뺀 김밥을 사다 바쳐야 하는 피디 박상운의 이야기까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유쾌한 사서 속으로 안내한다.

노숙자를 아빠라고 생각하고 따라갈 정도의 지능을 가진 김일우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머즈 급의 청력을 가진 소년이다. 일우의 학교 선생님은 부모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보라고 한다. 피아노는커녕 멜로디언도 사주지 못하는 형편의 부모는 일우를 정기섭이 세오시장을 살릴 목적으로 주최하고 박상운이 숟가락을 얹어 만들어낸 좋게 포장하면 쓰리컵대회 일명 야바위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내보낸다.

집 보증금을 빼서 쓰리컵 대회 출전비를 마련한 일우의 부모는 여관방을 잡아서 훈련을 시킨다. 『귀를 기울이면』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은 해학적으로 그려진다. 과장과 허풍이 한몫하기도 하지만 조남주는 탁월한 유머를 구사해서 밉지 않게 인물을 그려낸다. 애초에 그들은 누굴 속이거나 사기를 쳐서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었다. 유학 간 아내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고 내 집 마련을 이루고 상인회 총무로서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 벌이는 일이었다. 일은 자꾸만 꼬여간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우한 소년이 꿈과 용기를 갖는 지극히 아름다운 성장 소설인 줄 알았다, 『귀를 기울이면』은. 아니었다. 일이라는 게 벌이면 벌일수록 꼬이고 엉키며 이상한 결말로 나아가는 속성을 가진지라 계획을 세운 그들의 앞날은 보기 좋게 망한다.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귀를 기울이면』의 주제로 적합한 말이다. 진짜,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일우 집 보증금이 무사히 반환되기를 응원하는 나는 소심한 사람이다. 겁도 많고 일어나지 않을 일에 미리 걱정하는 사람. 『귀를 기울이면』에서 보여주는 서사에서 긴장과 서스펜스를 느낄만한 사람인 것이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조남주는 『귀를 기울이면』에서 왕창 보여주었다. 프린터를 사서 토너가 닳을 때까지만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황현진이 수상자 조남주를 만나서 인터뷰하고 쓴 글은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해서 웃기고 애잔했다.

우리의 일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들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으며 해가 지고 간판 불이 켜지는 걸 매일 보고 있을까. 소설은 나를 일으킨다. 이야기는 시간을 잊게 만든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며 쓴 소설은 누군가의 어깨를 토닥인다.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은 아이를 소개한다. 여기, 귀를 기울이며 너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가 있어. 그러니 용기를 내. 『귀를 기울이면』은 그런 말을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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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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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소설일까. 예언서일까. 소설의 배경 오랑시에서는 페스트가 돌자 다른 책은 팔리지 않는다. 대신 도서관에 있던 낡은 예언서를 편집한 책이나 기자가 대신 쓴 미래를 예언하는 기사가 잘 팔린다. 사람들은 도시에 병이 들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하다가 도지사가 페스트를 선언하고 폐쇄 명령을 내리자 그때야 당황한다.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난 일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고 있는 『페스트』에서 병의 발현이나 조짐은 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 쥐떼들. 쥐들은 그렇게 작은 몸짓으로 다가올 죽음의 전조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쥐가 죽고 사람들이 쓰러진다. 멍울이 생기고 종기가 부풀어 오르면서 급성으로 사망하는 것이다.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로서 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다.

동료 의사와 긴 이야기 끝에 리외는 도시에서 발병하는 병이 페스트 라는 것을 알아낸다. 리외가 쥐의 죽음을 목격한 날짜는 공교롭게도 4월 16일이다. 그날 아침 이후로 오랑시의 풍경은 달라진다. 소설이다. 자꾸 그렇게 생각해보아도 『페스트』는 과거에서 날아온 예언서처럼 읽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에서 부채 의식을 가지며 다가오는 봄을 만끽할 수 없게 만든 시간도 4월 16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비약이 심하고 상상력은 빈약하다고 하겠지만 이런 우연은 흔하지 않을뿐더러 현실은 우연의 연속과 범벅일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회의가 열리고 오랑시는 폐쇄된다. 봄과 여름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해수욕을 하는 대신 사람들은 우울과 불안으로 칩거에 들어가고 환자가 생기면 격리된다.

시설이 부족해지자 공동으로 사용된 공간이 비워지면서 침대와 천막이 들어찬다. 시신을 매장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졌고 화장터로 오래 사용하지 않은 철로를 복구해 시신을 옮긴다. 리외를 중심으로 보건대가 조직된다. 타루, 그랑, 랑베르 그리고 코타르. 오랑시를 잠식해 들어가는 페스트에 맞서기 위해서 개인이었던 그들은 우리가 되어간다. 코타르는 좀 다르지만.

코타르는 경찰에게 쫓기고 있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옆집에 사는 시청 비정규직 공무원 그랑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그 시기에 코타르는 암거래를 해서 돈을 벌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타루는 리외와 함께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페스트와 싸운다. 『페스트』는 역경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감동을 극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병이 창궐하지만 오랑시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곳은 여전히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그려진다. 환자가 나오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절망이 엄습하지만, 살아간다. 때때로 불안에 빠지고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의 욕망이 들끓어 오르지만 어떻게 하든 살아가려는 의지로 인간애를 잃지 않는다. 카페에 다니고 어쩔 수 없이 오랑시에 갇힌 연극단의 같은 공연을 본다.

『페스트』를 읽은 이유는 뻔하다. 2020년의 3월을 살아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환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회의에 빠지지 않는 리외를 통해서 삶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알고 싶어서. 그들이 나누는 길고도 오랜 대화를 읽으며 현재를 도모할 수 있을까 싶어서. 결론은 이미 내가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실행하지 않으려는 오만이 있을 뿐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 몇 문장을 가지고 온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죠? 세계의 질서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이상,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그래요, 리외.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나는 인생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날 아침에 의사가 작별하면서 "용기를 내세요. 지금이야말로 올바르게 판단해야 할 때예요"라고 말해준 랑베르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영영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사람을 지체 없이 되찾았다. 그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원할 수 있고 또 가끔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 카위, 『페스트』中에서)

더 적고 싶은데 여기까지. 『페스트』의 결말을 읽고 나면 놀랄 것이다. 세계의 거대한 슬픔은 끝나지 않고 인간의 불행은 서로를 불신하는 것으로 반복된다는 서술은 단순한 소설적 결말에 그치지 않는다. 소설을 가장한 예언서로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괜찮다. 힘든게 아니라 힘들지 않다. 불행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닌 불행을 인식한다. 우리는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병을 겪고 병의 기억을 가지고 우정을 도모한다.

『페스트』는 말한다. 현재를 과거의 형태로 두고 미래로 바꾸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나로 이루어진 각자가 아닌 나로 모인 우리가 될 때, 병의 종식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다시 불행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가면 된다. 아픔에 신음하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로서 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우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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