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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3
알베르 카뮈 지음, 유호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소설일까. 예언서일까. 소설의 배경 오랑시에서는 페스트가 돌자 다른 책은 팔리지 않는다. 대신 도서관에 있던 낡은 예언서를 편집한 책이나 기자가 대신 쓴 미래를 예언하는 기사가 잘 팔린다. 사람들은 도시에 병이 들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인지하지 못하다가 도지사가 페스트를 선언하고 폐쇄 명령을 내리자 그때야 당황한다.
194X년 오랑에서 일어난 일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고 있는 『페스트』에서 병의 발현이나 조짐은 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 쥐떼들. 쥐들은 그렇게 작은 몸짓으로 다가올 죽음의 전조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쥐가 죽고 사람들이 쓰러진다. 멍울이 생기고 종기가 부풀어 오르면서 급성으로 사망하는 것이다.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는 의사로서 이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다.
동료 의사와 긴 이야기 끝에 리외는 도시에서 발병하는 병이 페스트 라는 것을 알아낸다. 리외가 쥐의 죽음을 목격한 날짜는 공교롭게도 4월 16일이다. 그날 아침 이후로 오랑시의 풍경은 달라진다. 소설이다. 자꾸 그렇게 생각해보아도 『페스트』는 과거에서 날아온 예언서처럼 읽히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가 한국 사회에서 부채 의식을 가지며 다가오는 봄을 만끽할 수 없게 만든 시간도 4월 16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비약이 심하고 상상력은 빈약하다고 하겠지만 이런 우연은 흔하지 않을뿐더러 현실은 우연의 연속과 범벅일 정도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사망자가 급속도로 늘어나자 회의가 열리고 오랑시는 폐쇄된다. 봄과 여름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해수욕을 하는 대신 사람들은 우울과 불안으로 칩거에 들어가고 환자가 생기면 격리된다.
시설이 부족해지자 공동으로 사용된 공간이 비워지면서 침대와 천막이 들어찬다. 시신을 매장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졌고 화장터로 오래 사용하지 않은 철로를 복구해 시신을 옮긴다. 리외를 중심으로 보건대가 조직된다. 타루, 그랑, 랑베르 그리고 코타르. 오랑시를 잠식해 들어가는 페스트에 맞서기 위해서 개인이었던 그들은 우리가 되어간다. 코타르는 좀 다르지만.
코타르는 경찰에게 쫓기고 있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옆집에 사는 시청 비정규직 공무원 그랑에 의해 목숨을 구한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그 시기에 코타르는 암거래를 해서 돈을 벌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생활의 여유가 있는 타루는 리외와 함께 다니면서 적극적으로 페스트와 싸운다. 『페스트』는 역경에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감동을 극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병이 창궐하지만 오랑시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곳은 여전히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으로서 그려진다. 환자가 나오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절망이 엄습하지만, 살아간다. 때때로 불안에 빠지고 폐쇄된 공간에서 탈출의 욕망이 들끓어 오르지만 어떻게 하든 살아가려는 의지로 인간애를 잃지 않는다. 카페에 다니고 어쩔 수 없이 오랑시에 갇힌 연극단의 같은 공연을 본다.
『페스트』를 읽은 이유는 뻔하다. 2020년의 3월을 살아가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환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도 회의에 빠지지 않는 리외를 통해서 삶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인지 알고 싶어서. 그들이 나누는 길고도 오랜 대화를 읽으며 현재를 도모할 수 있을까 싶어서. 결론은 이미 내가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실행하지 않으려는 오만이 있을 뿐이었다.
잊지 않기 위해 몇 문장을 가지고 온다.
"당신 같은 사람이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죠? 세계의 질서가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이상, 신이 침묵하고 있는 하늘을 바라볼 일이 아니라, 신을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것이 어쩌면 신에게도 더 좋을지 모른다는 겁니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그래요, 리외.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나는 인생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 사람은 저마다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페스트 앞에서 무사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자칫 방심한 순간에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전염시키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날 아침에 의사가 작별하면서 "용기를 내세요. 지금이야말로 올바르게 판단해야 할 때예요"라고 말해준 랑베르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영영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사람을 지체 없이 되찾았다. 그들은 적어도 당분간은 행복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원할 수 있고 또 가끔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베르 카위, 『페스트』中에서)
더 적고 싶은데 여기까지. 『페스트』의 결말을 읽고 나면 놀랄 것이다. 세계의 거대한 슬픔은 끝나지 않고 인간의 불행은 서로를 불신하는 것으로 반복된다는 서술은 단순한 소설적 결말에 그치지 않는다. 소설을 가장한 예언서로 읽을 수 있는 까닭이다.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괜찮다. 힘든게 아니라 힘들지 않다. 불행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닌 불행을 인식한다. 우리는 싸움에서 실패하지 않는다. 병을 겪고 병의 기억을 가지고 우정을 도모한다.
『페스트』는 말한다. 현재를 과거의 형태로 두고 미래로 바꾸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나로 이루어진 각자가 아닌 나로 모인 우리가 될 때, 병의 종식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다시 불행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로서 살아가면 된다. 아픔에 신음하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로서 말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우정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