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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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네 맛집에 가서 지리산 흑돼지를 구워 먹었다. 다행히 오후 늦게 가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를 위해 가게를 빌렸다. 지리산 흑돼지는 1인분에 16,000원. 그냥 생삼겹살은 12,000원. 뭐가 좀 다르겠지. 지리산 흑돼지라잖아. 일단 2인분 시켜서 먹어보자. 맛은? 숯불에 구워서인지 비싸서인지. 겁나 맛있었다. 먹고 2인분 또 추가.


사장님은 고교 야구를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고기에 집중하는 사이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발라드를 트롯으로 재해석해 부르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게 바깥에서 들리는 건 줄 알았다. 가장 웃겼던 건 김범수의 하루였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슬픈 발라드는 구성진 자락으로 바뀌었다. 웃으면서 고기를 구웠다. 역시 비싼 게 맛있구나. 지리산이라 다르고만. 후식 누룽지까지 들고 마셨다.


윤성희의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 실린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뭐든 다 괜찮고 괜찮을 것이니 비싸도 지리산 흑돼지를 먹으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먹었다. 지리산 흑돼지. 메뉴판에서 지리산 흑돼지를 발견한다면 꼭 먹어보시길. 열한 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인데 꼭 장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인과 관계도 없이 닥치는 사고 앞에서. 내 탓인 걸까 자책하게 만드는 사고 앞에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체념하는 사고 앞에서.


『날마다 만우절』 속 인물들은 세상 사는 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것 가지고 힘들어 하누, 이런 말을 속삭이면서 통통한 손을 잡아준다. 손을 잡고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거 골라봐 말한다. 퇴직을 하던 날에는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사업에 몇 번 실패하고 집에 들어앉은 남편이 미울 때는 밖에 나와 킥보드를 훔쳐 타기도 한다. 암에 걸린 걸 알았을 때는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욕을 한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기치 않은 사고 일어날 수 있다. 사고가 커서 다치거나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 산 사람은 살아야지. 윤성희는 소설 곳곳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을 표현만 바꿔서 들려준다. 좋아하는 이가 있는데 그이랑 결혼 못 하고 죽은 남편이 돌아가면서 가족들 꿈에 나타나는 이상한 하루. 그래도 산다. 닭백숙을 해 먹고 동네 유치원에서 하는 아이들의 시 낭송을 듣는다. 동시를 지으며 마무리하는 하루. 윤성희의 원더랜드는 희미한 빛 속에 있다.


빛의 세기는 약하지만 은은하게 오래간다. 윤성희의 가족들은 대체로 철이 없고 무능하고 한심하다. 욕심도 가득하다. 젊은 날에는 대책 없는 일을 벌였다가 쫄딱 망한다. 원망하지 않는 힘. 그러거나 말거나 살아야지 하는 무한한 긍정으로 내일을 기대한다. 작가의 말에서 윤성희는 책을 읽은 후 '모두들,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썼다. 매일의 끝은 나의 한심함과 마주한다. 잘못 한지도 모르게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고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을 텐데.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고 비싼 거 먹으면서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와 전구색 불을 켜고 요즘 꽂힌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틀어 놓고 『날마다 만우절』을 읽어보자. 어떤 말들은 대책 없이 자주 쓰여서 들으나 마나 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나에게만큼은 대책 없는 그 말들을 자주 해줘야 한다. 괜찮아. 힘내. 네 잘못이 아니야. 일단 시켜. 사고 싶으면 사야지. 같은.


오늘의 거짓말 하나.


서울에 산다는 외삼촌한테 전화가 왔다. 휴일에는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해놨기 때문에 받지 못했다. 문자 메시지도 왔는데 내 이름을 틀리게 적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연락을 자주 하자는 말은 왜 쓴 걸까. 내가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는 무소식이 희소식. 엄마는 죽을 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걸 알면 득달같이 내려와서 다 뺏어 갈 거라고. 막상 가져갈 것도 없는데 그런 걱정을 했다. 나는 청개구리니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처도 몰랐고.


거짓말 같은 하루. 산다는 건 낄낄거리며 거짓말을 들려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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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는 맛 - 먹고 사는 일에 누구보다 진심인 작가들의 일상 속 음식 이야기 요즘 사는 맛 1
김겨울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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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한 달은 그랬다. 그게 그러니까 카드 내역을 보려면 스크롤을 한참이나 내려야 했다. 소비의 달이었다. 은행 앱으로 든 적금을 깨서 신나게 써 제꼈다. 하나 살 걸 두 개 사고 평소 같으면 안 사야지 했던 것도 샀다. 뭔가에 씐 듯. 소위 말하는 지름신이 강림하사 그분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 뭘 해 먹으려는 마음도 없어서 배달의민족에 의지했다.


『요즘 사는 맛』을 쓴 저자 중 한 명인 배우 박정민처럼 카드 내역서에 자주, 빈번하게 우아한 형제 님들이 등장했다. 다들 아시나. 배달의민족 앱에서 결제를 하면 사용처는 우아한 형제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대체 우아한 형제가 누구길래 자꾸 돈을 가져가나 하겠다. 그렇다. 우아한 형제는 지금의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형제님들이다. 그 분들은 게으르고 배고픈 형제, 자매님을 위해 집 앞까지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준다.


거기까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돈 백은 우습게 사라진다. 어떤 유튜버는 배달 음식비로만 백만 원을 넘게 쓴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주문하는 동안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이것도 못 먹지는 않잖아. 이 정도는 쓰면서 살 수 있잖아. 흥분된 마음으로 포장을 뜯고 먹고 나면 후회가 밀려온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밥해 먹을걸. 펑펑 쓴 3월 지나 4월,의 첫 소비는. 두구 두구. 바로. 우아한 형제님이다. 다 먹지도 못하면서 사이드 메뉴까지 욕심 부리며 시켰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작가들이 배달의민족 레터에 음식을 주제로 산문을 썼나 보다. 시켜 먹기 바빴지 배민이 그런 걸 하는 줄도 몰랐는데 책이 나오고서야 알았다. 『요즘 사는 맛』은 무얼 먹고 사는지 왜 먹는지 먹으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작가들의 귀여운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사는 모습만큼이나 먹는 모습도 다양하다.


남들이 어떤 걸 먹으며 사는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무얼 먹으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을 때 읽으면 딱 좋은 책이다. 입이 터져 버린 배우 박정민의 이야기. 토마토에 진심인 김겨울. 혹독한 직장 생활을 견디게 해준 음식의 추억을 꺼내는 김혼비. 헐렁헐렁한 비건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요조. 한 음식만 패는 최민석. 읽으면서 깜짝 놀라서 다시 정독하게 만든 훌륭한 글솜씨를 가진 핫펠트.


요즘 나는 괜찮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 원래도 아무거나 잘 먹는데 더 아무거나 잘 먹게 되었다. 매일유업에서 나오는 두유를 사서 냉장고에 일렬로 정리해 두었고(마치 편의점 같은 진열로) 친구 찬스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종종 먹고 있다. 샐러드 가게에 가서 감탄한다. 만만치 않은 가격인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걸 보고선.


다들 요즘 사는 맛은 어떤지. 세상은 점점 이상하고 기괴해져 가는데 괜찮은지. 그러니까 시간이 난다면 마트든 편의점이든 가서 달달한 걸 하나 사서 입에 넣으며 집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쓴맛 나는 하루였대도 하루의 끝은 달았으면 그랬으면 한다. 정 힘들 땐 배달비 생각하지 말고 제일 먹고 싶은 거 시켜서 먹어. 결제는 한 달 후 월급 받을 네가 할 테니까. 미래의 너를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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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을 땐 고양이
마스다 미리 지음, 히라사와 잇페이 그림, 이소담 옮김 / 이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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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하면 몇 가지의 일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어린 시절의 많지 않았던 기억 가운데에서 말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났더니 문 앞에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놀라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들이 치웠겠지. 또 어떤날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던 거겠지. 밤에 집으로 들어갔더니 고양이들이 안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눈.


쓰레기를 내놓으면 봉투를 뜯어 놓았고 아이가 우는 걸까 나가보면 고양이들이 있었다. 이렇듯 무섭고 겁나는 기억뿐이다. 지금이야 최애 캐릭터가 고양이인 춘식이고 편의점에 가는 이유 중에 하나가 고양이들을 만나는 것이어서 변화가 놀랍기만 하다. 편의점 고양이가 다가오면 두렵지 않은 척 쓰다듬어 주기까지 한다. 윗집에 사는 고양이는 화장실에서 자주 운다. 고요한 새벽이면 울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왜 안 자고 있니.


마스다 미리의 신간이 나와서 그것만 살까 하다가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함께 산 책 목록에 『생각이 많을 땐 고양이』가 있었다. 요즘 모으고 있는 유리컵도 준다기에 함께 샀다. 제목대로 생각이 많을 땐 이 책이 딱이다. 읽어보면 안다. 두 컷 만화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다들 생각이 많죠? 나만 그런 거 아니죠? 갓짱이라 불리는 고양이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마스다 미리의 글과 히라사와 잇페이의 그림이 만나서 묘한 감동을 준다. 인생 아니 묘생을 보면서 인생을 반성한다. 내가 사는 곳은 고양이가 많다. 낮에도 밤에도 그 애들은 자주 출몰한다. 시골이라서 그런가 보다 웃으면서 친구에게 말했다. 고양이를 자주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 보인다. 가게 앞에 고양이 전용 물그릇과 밥그릇이 있다, 있다. 그것도 여러 군데. 내가 사는 이 동네는 고양이 친화적인 곳이구나.


오늘의 갓짱은 매일 다른 풍경을 본다. 꽃이 피고 그네가 흔들리고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들. 누가 키우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유롭게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그날 그날 본 걸 우리에게 들려준다. 갓짱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복잡하고 어려운 일도 쉽게 쉽게 느껴져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오른다. 단순하기 때문이다. 갓짱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마주한다. 생각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다.


갓짱은 자주 무서운 공상에 빠지지만 나 역시 쓸데없는 상상을 하면서 불안을 키우지 않았던가. 고양이나 인간이나 똑같네. 안심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한 번쯤 읽어보면서 웃어보라고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이다, 『생각이 많을 땐 고양이』는. 집중하기 힘들어도 괜찮다. 두 컷 만화를 보고 유튜브를 봐도 되고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어도 된다. 그러다 다시 갓짱의 두 컷 만화의 세계로. 속상할 땐 고양이, 울고 싶을 땐 고양이, 웃고 싶을 땐 고양이. 갓짱에게라면 나의 모든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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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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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극복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다. 그 일에 매몰되어 생계를 내팽개칠 수 없으니까 잊은 척하는 것이다.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中에서)


이서수의 장편 소설 『헬프 미 시스터』의 주인공 수경은 회식 자리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다. 옆자리 동료가 수경에게 수면제인 졸피뎀을 먹인 것이다. 수경이 성과를 세워 다들 축하하는 즐거운 자리였는데. 평소 친절하고 예의 바른 동료였는데. 수경을 업고 모텔로 들어오는 걸 수상하게 여긴 여사장의 신고로 미수에 그쳤다. 그 일 이후 수경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사직서를 낸 날 팀장과 팀원들은 안도하는 듯했다. 피해를 당한 건 수경이었는데 수경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넉 달 동안 일도 하지 않고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건 심하지 않냐고 수경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마음조차 품지 않는다. 묵묵히 수경을 바라봐 주고 더 늦기 전에 수경에게 불을 켜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모두 힘들다고 하나 마나 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분노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어 한다. 『헬프 미 시스터』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인물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이상한 욕심이 있는 작가였다면 수경이 졸피뎀을 먹고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더 안 좋은 일을 겪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서수는 그렇지 않았다. 고통은 크기에 상관없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섬세하게 보여준다. 수면제를 먹었지만 여사장이 신고해서 그 뒤의 일은 당하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소시오패스적인 생각을 차단한다.


수경은 범죄를 당했고 가해자는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수경인데 법과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한 수경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과정을 『헬프 미 시스터』는 그린다. 그깟 일 좀 당했다고 그러고 있어? 이렇게 말한다면 입을 때려야 한다. 쌍욕을 듣고 맞은 건 아니었다. 일처리 늦다고 쪼이고 자기가 묻는 말에는 무조건 대답해야 하고 그러니까 1분에 한 번씩 물으면 1분마다 대답을 해야 한다고. 너의 업무는 나의 비위를 맞추는 거라고.


당신의 행동과 말은 갑질이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아니란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고 나의 성격이 문제라고 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만들었다. 문제를 알리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믿지 않는 것 같기에 아니 짐작은 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골치가 아플 것 같은 포즈를 취하기에 녹음까지 했다.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피해자는 난데 직장을 잃어버렸다.


수경은 극복이 아니라 참는 걸 선택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극복도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극복하기 위해 치료받으려면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공과금이 월세가 식비가 극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가 벌지 않으면 이 집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는가. 주식 투자에 올인하는 남편과 사기당해 집 날려 같이 사는 부모와 남편의 조카들은 누가 돌본단 말인가. 수경이 그 일을 겪고도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을 다니는 이유다.


『헬프 미 시스터』는 말해준다. 네가 겪은 그 일은 상처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물리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심한 학대를 받은 것이라고. 마음을 두들겨 맞았다고. 매 맞는 아내가 된 것 같았다. 매일 때리지는 않는다. 하루 걸러 때리고 때리고 나면 자기 변명을 한다. 이런 패턴으로 일을 다녔다. 아침에 눈 뜨는 게 끔찍했고 걸어가는 동안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매번 생각했다. 죽음을 자주 떠올리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언니 나 좀 도와줘. '헬프 미 시스터'를 번역하면 이런 뜻이겠지. 수경과 그녀의 엄마 여숙은 자차로 배송을 하다가 구직자와 의뢰인이 모두 여자인 앱 서비스 '헬프 미 시스터'에 등록해 일을 한다. 그곳에선 다양한 일을 의뢰한다. 결혼식에서 어머니와 언니 역할을 해 달라는가 하면 제사 음식 하는 자리에 가서 앞으로는 음식 하러 오지 않겠다고 말해달라고 하기도 하는. 같이 책 읽거나 아침 체조하고 사표 대신 내달라고도.


수경의 남편 우재의 말대로 '헬프 미 시스터' 의뢰의 핵심은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이다. 누군가 필요하다. 덫에 걸린 쥐를 잡아야 하는 일부터 이별 통보를 해야 하는 일까지. 겨우 그런 일로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여자의 도움이 여자는 필요하다.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서수는 『헬프 미 시스터』에서 느리고 힘이 없는 희망을 보여준다. 가난하냐 가난하지 않느냐의 기준이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먹으면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는 가슴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말을 담담하게 쓰느라 이서수는 입술을 깨물었을 것 같다.


너도 알겠지만 누군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땐 말이야. 그 일이 맞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도 아니야. 그냥 견딜 만하니까. 단지 그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수경은 속으로만 답했다.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中에서)


나는 아직도 그놈이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던 상황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나는 여전히 그놈이 나를 비꼬고 무시하는 말을 웃으며 하는 상황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나는 자주 그놈이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를 세워놓고 일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다 깼을 때 어둠 속에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업무라서 실수했을 때. 자료 입력을 하다가 오타를 쳤을 때. 가방을 메고 길을 걸어갈 때.


수경의 아버지 양천식 씨와 남편의 조카 지후인 그 둘이 걸어가면서 하는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어린 지후는 할아버지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떠한 일을 하든 자신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정한 몸짓을 하며 말을 한다. 그런 지후에게 양천식 씨는 꼬북칩을 사주고 싶어 한다. 작은 도움과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여기 아니면 네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을 때 나는 저 말을 들었었다. 나보다 몇 살 안 먹었으면서. 어딜 가나 다 똑같다. 내가 괴롭다고 했더니 참으라며 들려준 말이 고작 저 정도였다. 나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서. 나이가 많다고 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지후가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감탄했고 울었다. 지후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지후의 현실적인 도움이 바람을 타고 널리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앞이 막막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의 앞으로.


괴롭힘당해서 그만두는 건데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만두는 건데 그놈은 사직의 이유를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강요했다. 현실에 '헬프 미 시스터' 앱이 존재한다면 의뢰를 했을까. 나 대신 화 좀 내 달라고.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서야 쓰겠냐고. 자격증 따고 면접 봐서 힘들게 들어온 직장인데 이런 식으로 못 다니게 했었어야 했냐고. 안 그래도 업무 시간 내내 일만 하던 애한테 이것도 못 하냐고 네가 해야 할 일까지 떠넘기면서 일을 더 하게 만들었으면서 노력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를 쉬지 않고 하면 어떡하냐고.


수경 씨와 여숙 씨라면 떨거나 울지 않고 말도 더듬지 않으며 했을 거다. 자신들이 힘들게 살아서 남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했을 사람들이기에. 돈을 받고 하는 의뢰지만 최선을 다해 언니와 엄마의 마음으로 심지어 과몰입 하면서 화를 내줬을 거다. 『헬프 미 시스터』는 너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을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장 먹고살게 급해 일을 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씩씩한 어조로 말해준다.


견딜만한 일을 하다 보면 삶도 견뎌진다.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기적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돈이 없지 웃음이 없냐고. 웃다 보면 웃어진다. 그러니 웃어봐. 가난한 서로를 미워하는 대신 가난한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소설 『헬프 미 시스터』. 서수 언니. 수경 언니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여숙 언니도 알게 되었네. 여전히 사는 건 지치겠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손가락을 움직여서 『헬프 미 시스터』를 열게. 언니들 그곳에 항상 있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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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고양이와 우리 창비청소년문학 87
최양선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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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편의점에는 동물들이 산다. 계산대 뒤 쪽에 마련된 공간에 고양이들이 있다. 조그만 캣타워와 방석이 있다. 그 위에 한 마리씩 자리를 차지하고 대부분 자고 있다.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갈색 고양이가 다가왔다. 다가오니까 무서워하면서도 안 그런 척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알았다. 고양이의 혀가 까칠하다는걸.


집 앞 상가 건물 도로에는 늘 두 마리의 개가 있다. 한 마리는 흰둥이 한 마리는 누렁이. 흰둥이는 대부분 퍼질러져 있고 누렁이는 다가왔다. 다가오니까 무서워하면서도 안 그런 척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게 다가오면 피하지 않는다.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지 못해 애를 먹지만 다가오면 반갑다.


동네 초등학생 덕분에 알게 되었다. 누렁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는데 길 가던 초등학생 둘이 다가왔다. 과자를 손에 든 채로 누렁이를 만졌다. 그러면서 알려 주었다. 누렁이의 이름은 누룽지라고. 여기 목줄에도 쓰여있지 않냐고. 진짜 그랬다. 목줄에 누룽지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여기 편의점 강아지예요. 저기 흰 강아지는 반찬집 강아지고요.


동네 사정에 밝은 초등학생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기르는 고양이들은 임보 중이란다. 임시보호. 얼마 전에 한 마리가 입양을 갔고 나머지는 기다리고 있다고. 자식. 편의점에 무진장 많이 갔나 보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보면 그 편의점 안에는 초등학생들로 가득했다. 녀석들도 나처럼 고양이들을 보러 가는 거였구나 짐작한다.


편의점 입구에는 상자가 놓여 있다. 고양이들의 집. 한 마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털은 숭숭 빠져 있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질질. 어디가 아픈 걸까. 그런데도 바깥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최양선의 소설 『별과 고양이와 우리』의 주인공 유린은 혼자 살면서도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 준다. 할아버지와 둘이 살았던 그 애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난방 용품이라곤 전기장판 하나 달랑 있는 옥탑방에서 산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한다.


먼저 세민의 이야기가 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아들 세민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한다. 그 바람대로 되고 싶지만 어느 날부터 피아노만 치면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자신을 연주자로 만들기 위해 알바하는 누나도 내보냈는데. 그리고 지우의 이야기. 공부를 잘하는 지우. 망원경이 있는 언니 방에 들어가 별을 본다. 언니가 남겨 놓은 물건들 틈에서 별자리 이야기가 담긴 공책을 발견한다. 여든여덟 개의 별자리. 하늘을 바라보며 언니를 그리워한다.


세민, 지우, 유린은 별자리 음악 캠프에서 만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 주는 게임에서 세민은 지우의 별이 된다. 지우는 유린의 별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유린은 지우를 지켜보고 지우는 세민을 지켜본다. 편지를 전해주면서 서로를 알아 간다. 고민 많은 열여덟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면서 친구가 된다.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인 친구는 유린이었다.


자기 먹을 것도 못 사면서 고양이들의 사료를 사고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유린. 도움을 요청할 어른이 없는 유린. 『별과 고양이와 우리』는 세 아이들의 성장담이다. 쉽게 쉽게 마음을 열고 마음을 보여주는 시기라서. 머뭇거림이 있지만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면 먼저 다가갈 수 있는 나이라서. 부럽고 애틋했다. 『별과 고양이와 우리』를 읽으면서 편의점에 있는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내게 먼저 다가온 아이는 한 쪽 눈이 아팠다.


다친 거겠지. 차마 왜 한 쪽 눈이 없는지 물어보지는 못하고 짐작만 한다. 내가 걸어가는 걸 유심히 보던 아이는 털이 빠지고 침을 흘리고 있고. 어딘가에서 상처를 받고 어떤 우연에 의해 편의점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세민, 지우, 유린이 친구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어 서로를 지켜주려는 모습처럼 다친 고양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 많은 주인과 간식 좋아하는 초등학생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제목에 '우리'라는 단어가 있어서 근사했다.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었다. 왜 나와 너는 우리가 될 수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포기한 순간이 떠올랐다. 현실에서의 포기가 소설에서는 극복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우리라고 말하겠지. 그거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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