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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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네 맛집에 가서 지리산 흑돼지를 구워 먹었다. 다행히 오후 늦게 가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자리에 앉으면서 우스갯소리를 했다. 너를 위해 가게를 빌렸다. 지리산 흑돼지는 1인분에 16,000원. 그냥 생삼겹살은 12,000원. 뭐가 좀 다르겠지. 지리산 흑돼지라잖아. 일단 2인분 시켜서 먹어보자. 맛은? 숯불에 구워서인지 비싸서인지. 겁나 맛있었다. 먹고 2인분 또 추가.


사장님은 고교 야구를 보고 있었는데 우리가 고기에 집중하는 사이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음악을 틀었다. 발라드를 트롯으로 재해석해 부르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게 바깥에서 들리는 건 줄 알았다. 가장 웃겼던 건 김범수의 하루였다. 사랑이 날 또 아프게 해요. 슬픈 발라드는 구성진 자락으로 바뀌었다. 웃으면서 고기를 구웠다. 역시 비싼 게 맛있구나. 지리산이라 다르고만. 후식 누룽지까지 들고 마셨다.


윤성희의 소설집 『날마다 만우절』에 실린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뭐든 다 괜찮고 괜찮을 것이니 비싸도 지리산 흑돼지를 먹으라는 잔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먹었다. 지리산 흑돼지. 메뉴판에서 지리산 흑돼지를 발견한다면 꼭 먹어보시길. 열한 편의 소설이 실린 소설집인데 꼭 장편 소설을 읽은 것 같다. 인과 관계도 없이 닥치는 사고 앞에서. 내 탓인 걸까 자책하게 만드는 사고 앞에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체념하는 사고 앞에서.


『날마다 만우절』 속 인물들은 세상 사는 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 뭘 그런 것 가지고 힘들어 하누, 이런 말을 속삭이면서 통통한 손을 잡아준다. 손을 잡고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거 골라봐 말한다. 퇴직을 하던 날에는 이름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사업에 몇 번 실패하고 집에 들어앉은 남편이 미울 때는 밖에 나와 킥보드를 훔쳐 타기도 한다. 암에 걸린 걸 알았을 때는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욕을 한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기치 않은 사고 일어날 수 있다. 사고가 커서 다치거나 잘못하면 죽을 수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 산 사람은 살아야지. 윤성희는 소설 곳곳에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을 표현만 바꿔서 들려준다. 좋아하는 이가 있는데 그이랑 결혼 못 하고 죽은 남편이 돌아가면서 가족들 꿈에 나타나는 이상한 하루. 그래도 산다. 닭백숙을 해 먹고 동네 유치원에서 하는 아이들의 시 낭송을 듣는다. 동시를 지으며 마무리하는 하루. 윤성희의 원더랜드는 희미한 빛 속에 있다.


빛의 세기는 약하지만 은은하게 오래간다. 윤성희의 가족들은 대체로 철이 없고 무능하고 한심하다. 욕심도 가득하다. 젊은 날에는 대책 없는 일을 벌였다가 쫄딱 망한다. 원망하지 않는 힘. 그러거나 말거나 살아야지 하는 무한한 긍정으로 내일을 기대한다. 작가의 말에서 윤성희는 책을 읽은 후 '모두들,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썼다. 매일의 끝은 나의 한심함과 마주한다. 잘못 한지도 모르게 잘못을 하고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우린 다 죽을 거고 다시 태어나는 일도 없을 텐데.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하고 비싼 거 먹으면서 걱정하지 말고. 집에 돌아와 전구색 불을 켜고 요즘 꽂힌 노래를 무한 반복으로 틀어 놓고 『날마다 만우절』을 읽어보자. 어떤 말들은 대책 없이 자주 쓰여서 들으나 마나 할 때가 있다. 그래도 나에게만큼은 대책 없는 그 말들을 자주 해줘야 한다. 괜찮아. 힘내. 네 잘못이 아니야. 일단 시켜. 사고 싶으면 사야지. 같은.


오늘의 거짓말 하나.


서울에 산다는 외삼촌한테 전화가 왔다. 휴일에는 벨 소리를 무음으로 해놨기 때문에 받지 못했다. 문자 메시지도 왔는데 내 이름을 틀리게 적었다.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연락을 자주 하자는 말은 왜 쓴 걸까. 내가 좋아하는 말 중의 하나는 무소식이 희소식. 엄마는 죽을 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걸 알면 득달같이 내려와서 다 뺏어 갈 거라고. 막상 가져갈 것도 없는데 그런 걱정을 했다. 나는 청개구리니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처도 몰랐고.


거짓말 같은 하루. 산다는 건 낄낄거리며 거짓말을 들려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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