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 - 무례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한 연결에 대하여
김민섭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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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상은 점점 안 좋게 변해가고 있어서 실망과 분노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요즘이다. 어차피 망할 거라는데 조금 괜찮은 쪽으로 망할 수는 없을까. 이것 또한 이상한 바람이다. 망해버리는데 괜찮고 안 괜찮은 게 어디 있다고. 그래도 이왕 망할 거 덜 아프고 덜 상처받으면서 망하고 싶다. 어제도 많이 먹어 버려서 망했다는. 오늘은 절식을 해야지 하는 마음. 이렇게 다짐해도 다시 먹을 거여서 예고된 망함.


세상을 구하는데 필요한 건 세 가지. 유머와 귀여움 그리고 다정함. 이것들만 있으면 지구 멸망의 시간을 늦출 수 있다. 고 믿는다. 힘들어도 누군가의 웃긴 말 한마디와 귀여운 표정과 다정한 몸짓에 실망과 분노로 끓어오르던 마음의 온도를 낮출 수 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적정한 온도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고 존댓말로 이야기를 건네주는 일들로. 


김민섭의 에세이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는 우리의 다정함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자고 말한다. 지금 현재도 다정하니 조금만 더 다정해도 된다고 다독인다. 너는 지금도 충분히 다정해. 조그만 힘을 내서 너의 다정함을 퍼뜨려 보자고 한다. 그래 그렇다면 나의 다정함을 증폭해서 더 멀리 날려보자. 으쓱해진다. 


오늘의 나의 다정함은. 쉬는 날이지만 업무 하나를 했다. 쉬고 있지만 컴퓨터를 켜서 하루에 하나씩 요청에 답을 해주자. 내일도. 귀엽고 상냥한 말투로 메시지를 보낼 예정이고 지난 실수를 들추지 않을 것이다. 다정함이 인류의 미래를 구할 수 있다면 사나운 마음을 숨겨 보아야겠다.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는 나의 꿈에 대해 궁금해했다. 


어렸을 때는 터무니없는 꿈을 가졌다. 어느 대학교를 가겠다. 그리고 무엇이 되겠다. 실현된 건 하나도 없다. 그저 불안이 많은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그때 내가 왜 그랬지 후회를 반복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때도 꿈을 꿀 수 있다면 지금이라고 안 될게 무엇인가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는 묻는다. 꿈을 이룬 어른은 못 되었지만 다정한 어른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다정한 어른, 문서 양식에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어른, 카드 결제 서명란에 리본을 그릴 수 있는 어른, 꿈이 없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 지는 게임에서도 실망하지 않는 어른. 다정한 어른이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나에게 다정해질 것. 나를 가혹하게 대하지 않을 것. 나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빌어줄 것. 


망해버렸지만 망한 상태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한다. 나만 망한 거지 세상이 망한 거 아직 아니니까. 나에게 다정함이 부족하다면 다정함을 배워서 살아간다. 시끄럽고 복잡한 세계에서 잠시 이탈해 『우리는 조금 더 다정해도 됩니다』를 읽으며 다정함을 장착해 지구로 다시 귀환하길 바란다. 나의 다정함으로 너를 사랑할게. 꼭 안아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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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녹는 Entanglement 얽힘 1
성혜령.이서수.전하영 지음 / 다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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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녹는』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 영화, 드라마를 볼 때 이제는 아무런 정보 없이 그대로 직진하며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다. 얼마 전에 본 드라마 《조명가게》 역시 강풀 작가의 원작이라는 것만 알았지 내용에 대한 사전정보는 없었다. 


휴일 낮에 본 《조명가게》는 무서웠다. 공포물이구나. 그러다 점점 F는 울고 말았다지. 이런 이야기였구나. 강풀은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이런 발상과 주제를 생각해 내었을까. 현생에서는 불가. 다음 생에서도 사람으로 태어나는 행운을 누린다면 멋지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이서수의 단편이 실려 있다는 『봄이 오면 녹는』이었다. 그래서 책을 사지 말자마자 하면서도 주문했다. 또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 붉은 등 아래에서 책을 펼쳐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봄이 오면 녹는』에 실려 있는 각기 다른 작가의 세 편의 이야기의 주제는 '손절'이었다. 와. 얼마나 설레는 말인가. 손절이라니.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싫은 소리 듣거나 하는 걸 못 견디는 나에게 필요한 올해의 단어가 아닐까. 2025년의 너는 칼같이 손절 좀 하라는 책으로 전달하는 신의 계시.


몸이 아플 때 보던 영상은 도시에 있는 모든 걸 버리고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 혼자 사는 사람들의 영상이었다. 그들은 젊을 때 사람과 세상과 돈에 상처를 받고서 몸이 아프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훌훌 떠나보자.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내 인생에 휴식과 즐거움을 줘보자. 모든 관계와 세상을 손절하고 사는 사람들은 얼굴부터가 달랐다. 별거 아닌 일에도 웃었다. 그런 삶에도 걱정이 있겠지만 표면적으론 걱정이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내려놓을 수만 있어 모든 걸 내려놓으면 마음과 얼굴이 좋아지는가 보다. 고통과 상처를 얻고 난 뒤의 깨달음이라 비싼 값을 치른 후에 앎이어서 앞으로의 생활이 더욱 소중해지는가 보다. 『봄이 오면 녹는』을 다 읽고 나면 제목 그대로 봄이 오면 우리의 그런 관계가 눈 녹듯 과연 녹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만큼 각각의 이야기들의 결말이 파격이다. 특히 성혜령의 「나방파리」는. 아이를 읽은 종희와 일영이 영매를 찾아다니면서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사는 현재와 만나면서 아찔함을 준다. 사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선의를 가장한 악의가 무엇인지 사유하게 한다. 


이서수의 「언강 위의 우리」는 웃기는 손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손절과 이별의 차이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본다. 손절은 일시적인 헤어짐의 상태.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의 상태. 손절은 다시 만날 수도 있지만 이별은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 종선과 미진과 예슬이 어감도 이상한 빠가사리 매운탕을 먹으면서 나누는 우정은 봄이 오면 녹는 관계여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친한 게 맞아. 


앞의 두 소설이 인간관계를 손절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전하영의 소설 『시간여행자-처음 한 여행과 다르게 여행하는 것』은 시절을 손절한다. 현재의 내가 회상하는 과거의 어느 시절을 하나씩 열거하며 수치와 나태를 버린다. 과감하게까지는 아니고 천천히 오래 감정을 만지면서 손에서 놓아버린다. 과거를 손절할 수 있다면 미래 역시 손절 가능한 대상이 아닐까 희망을 준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정보란 무엇인가를 고민해 본다. 정보는 과연 정보 다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너무 많은 정보는 정보가 아니었음을. 너무 많이 알아도 문제. 자주 정보 없이 무언갈 보고 듣고 사랑해 봐야겠다. 그때 내게 달려오는 이야기의 감동의 무게가 상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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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무레 요코 지음, 이수은 옮김 / 라곰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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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되었다. 새해가 밝으면 서서히 올라오는 다짐 내지 의지. 미니멀 라이프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다짐 또는 의지. 미라병. 어느덧 유튜브 알고리즘은 청소와 정리 정돈 영상으로 점령했고 나는 그런 영상들을 누워서 보면서 나도 해야 하는데 마음으로만 몇 날 며칠째 이러고 있다. 버리는 게 아닌 남길 걸 고르면 비우기가 쉬워진다는데 물욕의 화신인 나로서는 전부 남겨야 할 것투성이다. 


비우기의 최고난도는 추억의 물건이다. 10년 넘게 일기를 쓰면서 매해 모인 일기장이 있다. 서랍장 가장 위쪽에 일렬로 놓여 있다. 한 번도 꺼내 본 적은 없다. 일기라는 게 그게 좀 다시 읽으면 부끄럽고 유치하고 나중엔 수치까지 몰려온다. 50L 쓰레기봉투를 사서 한 번에 모아서 버리는 상상만을 또 몇 날 며칠째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쉬워질까. 어느 날 내가 가방 하나면 들고 떠나야 한다면?


영상도 봤으니 책을 읽어볼까. 마침 이런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책 추천 마법사에 무레 요코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두둥 등장했다. 한동안 책장 비우기를 한다고 전자책을 사서 읽었는데 손에 잡히는 물성이 좋아 다시 종이책을 사 모으는 중이다. 이것도 반성해야 할까. 책은 아무래도 (도서관이 멀기에. 이것도 핑계이겠지.) 사서 책장을 넘기며 읽는 손맛이 중요한 거 아닐까. 합리화하는 게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거다. 


매일 그렇지만 유난히 마음이 지친 어느 날의 밤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읽었다. 붉은 등 하나만을 켜놓고 책을 읽는 밤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집에 돌아오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등을 켜두세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얼마 전에 《조명가게》를 봤기 때문이다.) 비움을 주제로 엮인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은 일상의 일상에 의한 일상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몰입감이 상당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언니 토모코와 태생이 낙천적이고 자유로운 동생 마이가 옷을 정리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진솔한 못 버리는 언니, 버리려는 동생」을 시작으로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는 제목 그대로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지진을 대비해 비상식량을 딸 모르게 잔뜩 쌓아두는 엄마, 결혼을 위해서는 서로의 애장품을 버려야 하는 예비 신혼부부, 병원 검사를 위해 잠시 집을 비운 남편의 방에서 이상하고 대단한 걸 발견하는 모녀, 집을 나간 며느리의 짐을 정리하는 시아버지까지 물건에 집착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다짐을 했다. 책은 다 읽고 사자. 옷은 비슷한 걸 사지 말자. 전부 실패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는데 어찌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응원의 의미로 사야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옷이 대대적인 세일을 한다는데 또 어찌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 산 옷 전부 옷장에 걸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 캐릭터가 있냐 없느냐의 차이만이 있다. 나 또 왜 그랬어. 머리를 쥐어 박지만 원래의 나는 이런 걸 어떡해. 


대신 마구잡이 소비는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에 통장의 잔고는 작고 귀엽고 소중하다.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내가 추가될 수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우울하고 불안한 기분에 쇼핑을 하진 않는다. 책은 다 읽으면 헌책 팔기 서비스를 이용하고 옷은 안 입고 입을 때 불편한 건 한두 개씩 정리하고 있다. 버리지 못하는 건 물건이 아닌 나의 집착과 욕심이다. 그것들만 새해에는 조금씩 비우기로 한다. 유난 떨면서 다짐과 의지를 내보이는 마음도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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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여름 소설Q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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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새삼스레 가족의 뜻을 찾아보았다. 품사는 명사이고 뜻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네이버 어학사전이 알려준다. 그러면 다시 뜻을 음미해 본다.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다,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단 말이지. 음. 그래. 그래.


그래그래 하다가도 뭐가 그래라는 반발심 내지는 의문이 든다. 그 어느 것 하나에도 해당하지 않아 자격지심이 올라오는 걸까.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걸 은연중에 뻐기고 가족애를 드러내는 것에 마음이 꼬여서 일까. 가족이라는 말은 폭력으로 다가온다. 마음을 때리는. 마음이 맞아서 아픈. 그래서 다시 가족의 유의어인 식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식구라면 괜찮지 않을까. 한 집에 살면서 혹은 한 조직에 속하면서 끼니를 같이 하고 함께 일을 하는 식구라면 마음이 덜 아플 것 같다. 요즘엔 유사가족이라는 말도 유행하지 않는가. 전부 내 마음이 꼬이고 몸이 가난을 기억해서 이런 것 같다. 가족보다는 식구나 유사가족에 마음이 가는 게. 성해나의 소설 『두고 온 여름』을 천천히 읽어 나가면서 나의 잘못과 나의 부주의함을 떠올린다. 


소설은 내가 두고 온 계절의 기억을 데리고 온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기하에게 어느 날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새어머니와 그가 데리고 온 동생 재하. 기하는 그들의 출연에 당황하고 불편해한다. 이제부터 우리가 너의 가족이란다. 기하는 새어머니와 재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 채 지낸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지 그때는 알지 못한 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새로 생겼지만 기하는 그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덟 살 어린 동생 재하를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턱대고 애정을 줄 수도 매몰차게 차가움을 표현할 수도 없어 미지근한 온도로 대한다. 그 적정의 온도가 상대에게는 가장 춥고 시린 온도인지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두고 온 여름』의 정서는 이상한 그리움이다. 그때는 틀린 게 아닌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지금은 맞은 게 아니고 지금은 깨닫게 된 것이다. 


서로를 가족이라고 부르자 했지만 그때는 그걸로 상처를 받았다. 지금은 그때의 가족이 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두고 온 여름』은 말한다. 처음으로 가족 나들이를 떠난 날 기하는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기분'을 느낀다. 그날 그 여름에 기하는 아무것도 두고 온 것이 없다고 했지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었던 시간을 두고 나왔다. 


시간이 지난 후 기하와 재하는 그 시절을 복기하면서 자책하지 않는다. 그때의 자신들의 어쩔 수 없음에 어리숙한 자신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결핍의 상처가 어린 자신들을 웃지 못하게 했다. 두고 온 건 그것이다. 가장 크게 웃을 수 있었던 유년을 데리고 오지 못했다. 대신에 기하와 재하가 가지고 나온 건 대책 없이 비관할 수밖에 없을 어른의 미래였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아리는 소설 『두고 온 여름』을 나의 시절과 기억으로 보낸다. 잘 있었니. 나는 그래 잘 있으려고 해. 담담히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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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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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1일을 기억하고 싶다. 기억하고 싶다고 해도 곧 뇌리에서 사라지겠지만. 기억하고 싶었다는 걸 기억할 수만 있더라도 괜찮으니까. 쉬는 날이었는데 잠깐 사무실에 가서 일을 했고(생각해 보니 다 해낸 건 아니었다. 빠뜨린 게 있었다. 이건 2025년 1월 2일의 나에게 맡기자.) 책을 한 권 읽었고(예소연의 『어느 순간을 가리키자면』, 추천) 씻고 외출까지 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해가 저물자 찬바람이 불었고 커피를 마시면서 카톡 방에 올라온 새해 인사에 답을 했다. 그렇게 다들 잘 지내자고. 서운하고 밉고 힘들었던 일은 2024년을 보내고 행복한 일만 가득한 2025년이 되자고. 올 한 해 먹었던 음식 중 제일 맛있는 걸 나눠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슬픈 사람들을 남겨 둘 수 없음에 마음이 아팠다. 설거지를 하면서 먹먹한 제야의 종소리를 들었다. 


사랑이 있으면 될까.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없이 사랑만 있으면 될까. 서로의 잠바 주머니에 가냘픈 손을 넣어주고 걸으면 그걸로 되지 않을까. 있었으나 없는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지 않을 미래에 목을 매지 않으며 지금만을 위해 살면 되지 않을까. 정대건의 소설 『급류』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 또한 나를 사랑하는 기적 안에서 말이다. 


여름이면 물놀이 관광객이 몰려드는 도시 진평에서 도담과 해솔은 만난다. 소방관인 아버지 창석에게 수영을 배우는 도담 앞에 물에 빠진 해솔이 나타난다. 그 순간 도담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해솔을 구하러 뛰어든다. 『급류』의 시작인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의 익사 사건은 사랑에 관한 은유이다. 사랑은 이것저것 앞뒤 가릴 것 없이 빠져드는 것. 빠져들어 죽어 버릴 수 밖에 없는 것. 


서로를 안고 죽어도 괜찮을 것으로 『급류』는 사랑을 정의한다. 진평강 하류에서 서로를 안은 채 떠오른 시신을 발견하는 장면은 이윽고 비슷한 장면으로 독자를 데리고 간다. 네 사람. 도담의 아버지 창석. 해솔의 어머니 미영. 그리고 도담과 해솔. 네 사람은 이상한 형태의 사랑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들을 끌고 간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사랑이라는 걸 알기에 그들의 사랑은 괜찮고 괜찮아졌으면 한다. 


사랑은 풍덩 혹은 서서히 빠진다. 빠져드는 모습만 다를 뿐 결국 우리는 사랑 안으로 가라앉는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건 무의미하다. 부정하고 빠져나오려 할수록 가라앉을 뿐이다. 애초에 뛰어들지 말지 빠지지 말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사랑에 빠진 서로를 안고서 숨을 참고 서서히 떠오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수면 위로 다다랐을 때 숨을 내쉬고 나온다. 그리고 살아가면 된다. 사랑을 안은 채. 사랑에 빠진 나로. 


도담과 해솔이 가진 사랑의 빛깔에 대해 생각한다. 각자의 상처가 크다고 여기는 그들의 사랑은 어느 날은 회색이었다가 어느 날은 분홍이었다가 수시로 변모한다. 다채로운 빛깔을 나눠 가지면서 그들은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거면 된다. 아픈 서로였다가 행복한 서로였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각자를 숨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살면 된다. 


아주 짧은 사랑 노래


너의 손을 잡고 

너의 등을 토닥이며

걸어가고 싶어


바람이 지나가면

햇살이 내리쬐면

더욱 좋을 거야


우리는 아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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