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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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채널예스에서 연재하는 장강명의 칼럼을 읽었다. 긴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정 수입과 자신만의 공간 필요하다는 글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토지문학관에 입주 신청을 한다. 『토지』를 읽지는 못했지만 『김약국의 딸들』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했다. 앞부분의 나오는 김약국의 어머니 일화가 기억에 남으니 읽어보라고 권했다. 곧바로 읽어보리라.


추석 연휴 동안 조금씩 읽었다. 많이 읽지 못한 이유는 밀린 잠을 자느라고. 자도 자도 피곤. 개피곤. 넘나 피곤. 지금도 피곤. 지난 금요일에는 백신 1차 접종을 했다. 많이 먹어야 한다기에 일단 먹었다. 팔이 욱신거리고 허기가 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증상은 없다. 《유미의 세포들》 식으로 말하자면 감옥에 가둬놨던 출출이 세포가 백신 한 방에 탈옥을 했다. D.P 조를 풀어서 잡으러 가야 하는데 귀찮아서 내버려 두고 있다.


왜 박경리, 박경리 하는 줄 알겠다. 문장이 정확하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흡입력 있게 서사를 풀어 놓는다. 장강명이 인상 깊게 기억하는 김약국의 어머니 일화는 초반에 나온다.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이런 시대를 우리가 살았단 말이지.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성에게 가혹한 과거를 가지고 살았었다. 조선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통영 묘사를 시작으로 소설은 김약국이라고 불리는 가문의 일대기를 이야기한다.


결혼을 해도 잊지 못해 숙정을 찾아온 욱은 숙정의 남편에게 죽임을 당한다. 숙정은 그날 밤 비상을 먹고 자결한다. 그의 남편 봉룡은 형세가 불리해짐을 깨닫고 도망간다. 둘 사이에는 어린 아기가 있었다. 이름은 성수였다. 죽은 어머니를 잊지 못해 옛집에 찾아와 있기를 즐겨 한다. 후에 성수는 큰아버지 봉제의 뒤를 이어 김약국의 후계자가 된다.


좋아하는 여인이 있지만 차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김약국은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 딸 다섯을 두었다. 과부 용숙, 공부 잘하는 용빈, 얼굴 예쁜 용란, 살림 잘하는 용옥, 귀염둥이 막내 용혜. 『김약국의 딸들』에서 다섯 딸의 운명은 각자 다른 생김새의 모습대로 별나게 흘러간다. 소설의 배경은 일제 강점기이다. 통영이라는 항구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인생 모습이 마음을 누른다.


다섯 딸의 인생은 어머니 한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자는 시집을 잘 가야지 팔자가 핀다는 사고방식이 유효한 시점에 쓰인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소설은 허구라 하지만 있음 직함 일을 그리는 문학이라. 읽고 나서도 이런 일이 허다하게 있었겠지. 그러니 작가가 소설로 썼겠지라는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그만큼 다섯 딸의 삶이 기막히고도 허무했다.


김약국의 딸들의 삶의 비극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한다. 봉건 제도가 남아 있는 시대라 그렇겠지만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딸이 좋아하는 이가 집에서 부리는 머슴이어서. 상대 집안의 신분과 가세가 탐탁지 않아서. 딸들의 결혼은 그런 저런 이유들로 성사가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소설은 쓰인 지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지금 시대를 반영한다.


맥락 없이 결혼은 왜 안 하냐고 질문하는 통에 처음엔 그러려니 넘겼지만 자꾸 듣다 보니 이걸 가지고 나를 놀리나 하는 마음이 뾰족해지는 게 어쩔 수 없는 요즘이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업무 시간에 한다면(제발, 업무 시간에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컴퓨터에 숨겨 놓은 사직서 파일을 떠올리지 않을 텐데.) 그러는 너 님은 왜 그거 하셨어요? 말할까 보다.


결혼이 여성이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말을 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건 『김약국의 딸들』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마음에도 없는 결혼들을 해서 몸과 마음고생하는 딸들의 인생사를 그렸지만 마지막에 박경리는 희망을 남긴다. 그 결혼이 뭐라고.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고 결정한 용빈의 심사를 이어받아 사람 많은 곳은 피해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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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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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움을 주제로 책을 쓸 수 있다니. 역시 마스다 미리답다. 서점사 신간 목록에서 발견한 『귀여움 견문록』을 보고 든 생각이다. 마스다 미리 월드의 일원으로서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장 구매해서 읽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구한다고 했던가. 지금 사면 초판 한정으로 일러스트 스티커도 준대. 스티커가 아니어도 샀을 텐데. 한정으로 준다니. 아싸.


첫 이야기부터 흥미롭다. 「하교하는 초등학생의 귀여운 실루엣」이다. 등교하는 초등학생이 아니다. 수업을 끝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마스다 미리는 귀여움을 느낀다. 출근 시간이 9시까지인지라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는지라 아이들과 함께 아침 길을 걷는다. 놀이터가 있는데 아이들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그곳에서 놀고 있었다. 가방은 던져두고. 그네를 타고 시소에 올라타 있다. 싱그러운 풍경이다.


어떤 날은 가방이 열린 줄도 모르고 걸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봤다. 조심히 다가가 가방 쪽을 가리켰다. 아이는 가방을 앞쪽으로 해서 닫았다. 비가 오진 않지만 우산을 챙겨 들고 오는 아이. 오빠 손을 잡고 걸어 올라오는 키가 작은 아이. 무언갈 먹으면서 걷는 아이. 뒤처진 친구를 기다렸다가 같이 학교로 가는 아이들. 아침의 출근길은 귀여움으로 가득했다. 이런 풍경을 쓸 수 있는 건 순전히 『귀여움 견문록』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었지. 기억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는데. 책을 읽으니 내가 가진 풍경의 깊이가 넓어졌다. 일상의 대가답게 마스다 미리는 『귀여움 견문록』에서 세밀하고 다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의미 없이 지나칠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재첩, 주먹밥, 실뜨기, 멜론 빵, 보온병 등에서 귀여움을 발견한다. 사전과 백과사전을 이용해 말의 어원을 알려준다. 하루를 지내다 귀여움을 간직한 녀석을 본다. 빙그레 웃음 짓고 책을 찾아보는 마스다 미리의 골똘한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귀여움 견문록』의 마지막에는 귀엽다의 뜻이 적혀 있다. '아름다움, 아이스러움 등 너무나도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모습이나 살아 있는 작은 것, 약한 것에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 마지막 말이 오래 남는다. '약한 것에 갖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니. 내가 귀엽다고 생각한 모든 것에 부합하는 말이다. 반찬집 앞에 앉아 있는 동네 강아지들. 그 애들은 학교에 가는 아이들 뒤를 조용히 뒤따른다. 편의점에서 키우는 고양이. 문을 열어도 비켜주지 않은 채 길막하고 있다.


카카오 프렌즈의 영원한 전무님, 라이언. 일자 눈썹이 매력적이고 세계관이 좋다. 책을 좋아하고 카페에 가기를 즐기는. 무표정한데 온갖 표정이 있다. 최근에는 냥줍을 해서 춘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같이 다니며 춤을 춘다. 펭수. 평생 친구, 10살의 남극에서 온 자이언트 펭귄. 덩치가 큰데 옷을 잘 입는다. 자신감이 넘치고 재치 있는 말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든다.


그리고 나 자신.


이라고 썼지만 나는 나를 귀여워해 주기는커녕 자주 종종 때때로 등신이라고 여긴다. 최근에 겪은 일을 소상하게 쓰고 싶은데 쓰고 나면 나의 무기력함과 센스 없음에 스스로 좌절할까 봐 자제한다. 웃지 말아야 하는데 웃고 있는. 거절해야 하는데 웃고 있는. 따지고 싶은데 웃고 있는. 그냥 망했고. 다시 태어나는 걸로. 나 자신을 귀여워할 수 없으니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귀여움을 갖고 있는 걸 찾아야겠다. 귀여움을 찾아 나서는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했지만. 귀찮으니 『귀여움 견문록』을 읽으며 누군가가 찾아낸 귀여움을 귀여워한다. 나의 일상은 순간순간 부서지긴 하지만 그동안 읽어온 책으로 앞으로 읽을 책의 힘을 빌려 조각을 이어 붙인다. 그게 나의 힘이 된다. 오늘은 차가 다니는 길에 길게 누워 있는 개를 보았다. 베란다 캣타워에서 서로 뭉쳐 있는 고양이를 보았다. 사실 개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데 멀리서 보는 건 괜찮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귀여움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힘껏 말할 수 있게 해준다, 『귀여움 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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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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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결혼 관련 사기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란 왜 저런 바보 같은 일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보면서도 마음이 섣불리 동요되지 않았던 건 나라면 절대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한 스푼까지 곁들여서. 건방진 생각이란 걸 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면 그 순간 당사자가 아주 힘들거나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 더 마음이 훅 간다는 것도 안다. 그러지 않더라도 조건을 따져서 상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나 마차 끌고 온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뭔들 내주지 못하겠냐만.


정말 사랑했다고 그럴 줄 몰랐다고. 나 이외에 만나는 사람만 여럿이라는 걸 안 순간 죽을 것 같았다는 절규. 가만있어 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을 가정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뻥, 거짓말, 구라, 사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것 같은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휴일이면 집에서 청소, 빨래, 책 읽기, 리뷰 쓰기, 꽂히는 노래 무한 반복해서 듣기, 드라마 보기(최근에 빠진 드라는 《유미의 세포들》, 세포들이 "유미, 유미" 응원봉을 들고 연호하는데 그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 감동에 휩싸였다.)가 전부라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려는 상대를 만날 상황 자체가 없다.


인터넷이 있다고? 우리에겐 온라인이 있지 않냐고? 카톡, 블로그 외에는 SNS 활동도 안 하는지라. 뭐, 사람 일은 모른다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동안 읽은 책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한지라 대충 보면 짐작 가능합니다요. 이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유즈키 아사코의 신간 『버터』는 그런 의미에서 책으로 세상만사 배우기를 즐겨 하는 나에게 딱인 책이다. 600쪽의 단단하고 무거운 이 책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이른바 '꽃뱀'이 등장하는 사건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다. 결혼을 조건으로 상대 남성에게 접근해 돈을 갈취한 여성의 용모가 '꽃뱀'의 이미지와 달랐다. 여러 남성을 현혹 시킬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다. 여성은 결혼을 원하는 남성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자살로 꾸며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여성이 요리를 잘하고 말씨에는 기품이 넘쳤다고 했다.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유즈키 아사코는 실화 모티브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가지이 미나코는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간지 기자 리카는 세 명의 남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지이에게 흥미를 느낀다. 대체 어떤 여성이기에 남성을 유혹해 돈을 얻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리카는 가지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뚱보와 악녀 이미지로만 소비될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리카는 적극적으로 가지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구치소에서 대면한 가지이는 리카에게 에쉬레 버터를 이용한 간장밥을 먹을 것을 권한다. 그 후 리카는 가지이가 말한 요리를 대신 먹기 시작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는 단순히 실화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일본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꼬고 해체한다. 예쁜 용모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들이 한눈에 반할만한 미모가 아니었음에도 대체 왜 가지이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일까. 리카는 가지이와 대화를 통해 점점 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전까지 리카는 마른 몸을 가졌다. 주간지 기자라는 남에게 보이는 용모를 일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리카였다.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취재원이나 기사 소스를 주는 '손님'에게 여성성을 어필하지 않기 노력한다. 자신이 정한 틀에 자신을 엄격하게 가둔다. 그런 리카가 가지이를 만나면서 변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결혼과 인생에 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한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받는다. 결혼은 했느냐고. 안 했다고 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어려 보인다고. 그런데 실제로 전 어리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굳이 그런 말은 안 하고 상황을 모면한다.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 개인적인 질문 오지게 한다. 유머 센스와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한 나는 얼버무리거나 답을 회피한다. 서른세 살의 리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새롭게 직시한다. 결혼과 출산을 위해 일을 그만둔 절친 레이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부서를 옮긴 선배 미즈시마. 리카는 그녀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최선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아챈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 여성은 남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가지이는 사회가 요구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신념을 이용해 유약한 남성을 골라 욕망을 충족했던 것이다.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는데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문제일까. 요리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어 시도 자체를 안 한다. 대충 사는 것 같은데 이게 나의 최선이다. 『버터』에서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리카가 요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일, 결혼, 출산, 사랑, 삶에 대한 시각이 풍부하게 바뀌는 부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선택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일 완벽한 자신을 세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신이 부여한 기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버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솔직하게 살자.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격려해 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건 부적응이 아닌 네가 원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결혼 사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건 일상, 음악, 문학, 문구점 구경, 귀여운 캐릭터 굿즈 모으기, 신간 사서 모으기, 예전에 읽은 책 다시 꺼내기, 대화가 통하는 친구 1인과 걷기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방에 앉아서 하늘 바라보기 추가.(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새로운 곳에서 일하면서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버터』를 읽으니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지하로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린다. 너는 틀리지 않았고 다른 것이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기 보다 지금 무얼 먹고 싶은지 의문하는 것으로 너의 오늘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위로받는 건 현실을 직조한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게 나를 살게 한다. (나를 포함한 둘 이상과 대화하는 건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건가요?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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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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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책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웬만하면 읽으려고 마음먹은 책은 끝까지 다 읽기에 재미가 없다 싶어도 그대로 읽는다. 책을 덮는 경우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와. 미쳤다. 흥미진진을 넘어서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겠는데. 심장아, 나대지 마. 이러면서 덮는다. 저 혼자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아껴 뒀다가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장을 연다.


박지리의 데뷔작 『합★체』가 그랬다. 그때도(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읽었다. 어쩌다가, 진짜. 우연히.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인생 소설 1순위에 올라와 있다. 다른 어떤 소설에게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 없다. 살아 있기 전까지 매해 한 권의 소설을 꾸준히 낸 소설가 박지리. 그의 첫 장편 소설 『합★체』의 시작은 이렇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지리, 『합★체』中에서)


당구장 표시까지 있는 부분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인용 부분이다. 감히 내 최애 작가의 소설을 인용해? 이런 마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부류의(난쏘공을 읽고 난쏘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문학을 하고 자신의 문학에 난쏘공을 침투 시키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덮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면 읽으려고. 격한 감동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으면서 고이 모셔둔 난쏘공을 다시 꺼내야지 생각하면서.


오합. 오체. 『합★체』의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쌍둥이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후회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백설 공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해주는 어머니이다. 일곱 난쟁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안위를 지켰으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왕자와 결혼한 백설 공주의 선택이. 일곱 난쟁이와 살면서 그중에 한 명과는 호감을 키웠을 것인데. 어찌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의문하는 어머니.


기발하고 독특한 사고관을 가진 어머니는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의사에게 가보았지만 키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거라는 답을 듣는 게 다였다. 남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자랄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합과 체였다. 합은 공부를 잘했고 체는 그냥 뭐. 체는 공부에 뜻은 없고 오로지 키 생각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 윤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함께. 가장 싫은 건 4월에 하는 신체검사였다. 윤아를 비롯한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키가 까발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북쪽 약수터에서 계룡산 도사를 만나면서 체의 모험 가득한 여름이 시작된다. 뱀에 물린 노인을 구해 주었고 그가 체의 고민을 듣고 비기를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사기꾼, 사이비라고 여겼을 텐데 우리 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키 생각뿐인 체는 계도사의 말을 듣자마자 엄마 몰래 형 합과 떠날 준비를 한다. 키가 클 수 있다면 체는 뭐든지 했을 거다. 계도사의 말은 자신이 수양한 계룡산에 가서 33일 동안 수련을 하라는 것이었다.


키가 크기 위한 특별 전지훈련을 떠난 오합과 오체의 앞날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합★체』는 특별한 소설이다. 대범하게 난쏘공의 명문장을 인용했고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쓰이고 유효할 수 있단 말이야 감탄하게 만든다. 남들이 산다는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눈치 보고 싫어도 싫다는 말 대신 좋다고 말하며 살았다, 산다. 자존감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요즘이다.


일상을 사는 나는 자주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쓴다.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싫다는 감정을 숨긴다. 대놓고 싫고 나쁘고를 표현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나쁜 마음을 책으로써 엷게 만든다. 나의 나쁨을 책은 괜찮다고 해준다. 『합★체』가 그러했다.


합과 체가 약점을 돌파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약점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조짐이 보였다. 혼자는 힘들지만 둘은 된다. 키가 작은 그들이 합체를 하면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공을 되받아 골대에 넣었듯이 상처를 가진 자들끼리 연대하면 된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은 땅에 떨어졌다. 공의 속성상 다시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르는 공을 재빨리 잡아채서 원하는 그곳을 향해 쏜다. 인생의 승리는 매 순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합★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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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1 소설 보다
서이제.이서수.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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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그렇겠지만 나이 먹어서 백수로 살려니 고충이 있었다. 국비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몇몇을 빼고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최대한 나라는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던 건 이해력 부족으로 기본적인 내용을 질문하고 그걸 또 이해 못 해서 다시 질문하고 그러다가 나이까지 공개적으로 밝히고야 말았다. 물어보는데 말 안 할 수가 있나.


뭐가 될지 모르겠다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중학교 때도 안 해본 진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아팠다. 자기 전 파스를 붙이고 잤다. 공부도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뭐든 안 그렇겠냐만. 자격증 공부하면서도 텔레비전은 봤다.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서 밤을 새우곤 했다. 식상한 전개가 빈번하게 연출됐지만 현실의 나보다 참신했다. 백수 됐다고 슬퍼하는 꼬락서니라니.


그래도 책 사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 보다 : 봄 2021』을 사고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사고. 의무적으로 사는 책이 있는데 '소설 보다' 시리즈가 그렇다. 나의 편협한 문학적 취향을 어찌 알고 서점사에서는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을 보내온다.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커피 한 잔 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봄을 건너 뛰고 여름을 읽었다. 뭔가 문학적인데. 친구라도 많으면 추천하거나 사서 주고 싶을 정도로 이번 『소설 보다 : 여름 2021』은 최고다. 대개 한 편 정도는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데 이번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모두 근사하고 멋졌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고 현재의 나를 격려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나를 응원해 주는 소설들이다.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는 솔직히 읽지 않고 건너뛰려고 했다. 난해한 소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읽다 보니 바보 같았던 어제의 우리를 농담을 섞어가며 위로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친해지고 싶은 사업에 실패한 청년의 넋두리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전까지 지구에서 살아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유쾌하다. 기후 변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류의 미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당신과 나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소설이 쓰이는 그날까지.


제발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보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를. 백수 됐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 않길 잘했다.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이러면서 때려치우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공무원 준비해볼까 하다가 포기하길 잘했다. 그랬으면 「미조의 시대」를 읽지 못했겠지.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책에 밑줄을 긋고 깜지를 쓰면서 성격 파탄자가 되어 있었겠지.


회사 사정으로 권고사직을 여러 번 당한 주인공 미조가 헬조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웃프게 그려내는 소설. 이서수는 굉장한 작가가 될 것 같다. 발랄한 김금희 같으면서 상큼한 이문구, 김종광 같다. 이야기를 써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잠이 오는데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미조와 엄마와 수영 언니의 하루가 희망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좋은 소설은 읽고 있으면 글을 쓰게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거 내 이야기잖아. 나도 쓸 수 있다. 써 보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용기까지 내게 만드는 소설.


「미조의 시대」가 그렇다. 우린 전부 「미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꿈이 있어서 나에게 미안한 시대. 꿈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가슴속에 고이 접어 둔 시대를 버텨내고 있다. 미조의 엄마가 쓰는 시가 근사했다.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길래 시의 표현이 그러했을까. 짐작이 가면서 마음이 아프다.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는 놀라울 정도로 광주 5·18 민주화 항쟁을 지금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해낸다. 앞으로도 5·18 이야기가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한정현의 인터뷰를 잊지 않아야겠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혹독한 시간을 한정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들려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그 시절에 살아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삶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여성들의 연대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는 전언을 「쿄코와 쿄지」는 남긴다.


주어진 삶이 고통이기보다는 가끔의 기쁨일 수도 있겠다는 위안을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통해 얻었다.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봄을 꺼내야겠다. 노란 빛깔의 봄은 책장에 꽂혀 있다.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봄은. 여름에는 힘들었고 가을에도 힘들 예정이지만 지나간 봄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고 싶다. 그때도 어렵고 막막했겠지만 봄의 소설을 읽으면 기이한 희망이 부풀어 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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