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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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복지시설에서 목욕을 도와주는 정치인의 얼굴은 드러나지만, 장애인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얼굴이 없다면 반응할 수 없다. 얼굴이 없는 존재, 익명화된 존재, 기호화된 존재는 오믈렛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하지 못하며, 반응하더라도 상대는 그 반응을 무시하기 일쑤다. 품격에만 초점을 두는 퍼포먼스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꼭대기에 있는 1인만을 위한 무대가 되기 쉽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로지 그에게 맞춰 움직일 뿐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15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그 반대쪽에 있는 나를 비롯하여 장애, 질병, 빈곤 등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공연에 동원되는 순수한 피해자인가? 노련한 삶을 살기 위해 애썼던 나는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일을 끔찍이도 경계했다. 그 노련함의 핵심은 나의 자존감을 지키고, 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을 빛내는 자들로부터 나의 ‘결핍’을 착취당하지 않는 전략이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각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장애를 고의적으로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그 커플은 청각장애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차이’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반문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우리 대부분은 사춘기 무렵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자기 몸의 특수성과 한계, 가능성을 확인하고, 또래들을 모방하면서 사회의 신체 운영 규범(‘품격’도 포함될 것이다)에 맞게 이를 조율한다. 자신만의 ‘몸 운용’ 스타일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나는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발전시킨 방법에 도움을 받았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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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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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아이가 다가와 "아저씨 다리 어디 갔어요?"라고 물을 때 "네가 찾으면 5000원 줄게. 망할 다리가 어디 갔는지 일주일 내내 찾아도 없거든!"3이라고 말하는 냉소적 유머 감각도 여기 해당한다. 장애나 만성질환을 오랜 기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런 상호작용 기술의 전문가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신체 기능이 쇠퇴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장애인들에게 이런 기술을 전수받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삶이 저 두 종류의 노련함으로 깔끔하게 돌파 가능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두 사건은 이처럼?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의 범인과 달리 우에마쓰 사토시는 단지 장애인을 혐오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애인을 죽이면서 자신이 그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형사처벌과 도덕적 비난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을 구원했다는?그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하기를 원했다. 그는 단지 장애인이 혐오스러워서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구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공연(퍼포먼스)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타인을 돕는다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까지 모두 문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우리가 타인과 만나 상호작용하는 일상 그 자체가 사실상 ‘공연’의 성격을 갖는다고 이해한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Goffman은 공연을 "개인이 특정 관찰자 집단 앞에서 계속하는 모든 활동, 그리고 관찰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공연에 장애인이 참여하는 경우를 모두 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행위자인 장애인도 당연히 공연에 참여해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나는 내 퍼포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내 퍼포먼스를 위해 누군가를 모욕한 일도 없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우아함’을 위해 그 순간 나와 함께했던 많은 이들과 나 자신을 게임의 일부로 만든 것은 아닌가. 이들을 현실에서 배제하여 내 삶을 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삶이 일종의 연극이라는 사실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더 큰 진실을 위해 거짓을 연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빛내는 데만 몰입하는 사람들은 작은 진실을 위해 큰 거짓을 연기한다. 나는 이를 ‘품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르고자 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모든 인간이 왜 존엄한 존재인지는 국제 인권 규범이나 헌법, 법률에 근거할 수 있지만, 그 규범과 법률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는 늘 논쟁적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는 종교인들에게는 유효하겠지만, 세속적인 현대인들에게는 타당한 근거가 아니다. 나는 추상적인 인권 규범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출발하고 싶다. 우리는 각자가 왜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존엄한 존재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에 화답하는 상호작용, 즉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를 실천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하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인간적 상호작용의 특징을 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타인을 존중할 때에도 동일한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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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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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도 한때는 나의 출생을 ‘손해’라고 느꼈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난 1980년대 초에 장애아를 기르는 일은 실로 막대한 ‘손해’였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서 자식은 부모의 기획에 따른 결과물이 아니라 긴 시간 수많은 관계와 사건을 통과하며 부모와 만나는 독립된 존재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출산과 동시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성장하고, 확장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축적하고 체화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서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부모 또한 자녀와의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성숙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지만, 부모 역시 서서히 자녀와 ‘만나가는’ 것임은 틀림없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나의 어머니에게 1980년대 초반 나의 출생은 분명 ‘손해’였을 것이다. 그러나 2016년 내 어머니와 나의 만남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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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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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삶wrongfullife’ 소송은 장애를 가진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한 유형이다. 대개 중증의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이 소송의 원고가 된다. 물론 어린아이가 직접 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가 아이를 대리하여 소訴를 제기한다. 즉 산부인과 의사의 실수로 장애아가 태어나 아이 자신에게(부모에게) 손해가 발생했으니 그것을 배상하라고 청구하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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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독감 메디컬 사이언스 2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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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대통령이 전 국민 앞에서 돼지 독감 예방 접종 프로그램을 발표한 것은 승리의 장면이어야 했다. 승리를 위한 모든 요소가 거기에 있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인간이 바이러스에 대항해 팔을 걷어붙일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들인 조나스 소크 박사와 앨버트 세이빈 박사가 포드 대통령의 옆에 서서 한마음으로 이 싸움을 축복해 주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인류를 괴롭힌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한 전례가 없는 대대적인 캠페인이 전개될 예정이었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이학 박사 학위 과정에는 나름의 요구가 있었다. 다른 모든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 과정이 그렇듯이 학위를 따려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야 했다. 강도 높은 지적 노동을 통하여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예전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롭고 귀중한 정보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하지만 토벤버거는 주요 학술지들과 검토자들이 벌이는 게임의 속성에 대해 알지 못했다. 검토자들은 때로는 무지하고 때로는 질투심이 강하며 때로는 관련 주제에 대하여 은밀한 반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논문이 푸대접을 받자 토벤버거는 상처를 받았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조류 독감은 간혹 돌연변이를 일으켜 새들을 죽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병원성이 낮았다. 이 바이러스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의 허파 세포에 침입해 폐렴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들과 달리 새의 내장 세포 속에서 평화롭게 살며 아무런 증상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론적으로 조류 독감은 인간을 감염시킬 수 없었다. 인간의 허파에는 조류의 내장 세포에 있는 효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록 가능성은 낮지만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사람을 감염시킨다면 그 바이러스는 인간이 이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데이즈 단백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어떤 인간도 그런 바이러스에 면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전 인류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첫 번째 미스터리는 ‘이 독감이 어디서 왔을까?’이다. 이 독감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전 세계 사람들을 학살한 것처럼 보였다. 이 치명적인 독감 균주가 어디서 왔는지를 설명해 주는 명백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어떤 면에서 이것은 대단한 좌절이다. 과학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 1918년 독감 바이러스를 체포했다. 그러나 그들은 범인의 살인 무기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우리가 독감에 대해 점점 오만해지는 동안, 이 흔해 빠진 질병 뒤에 숨은 새로운 전염병이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력을 모으고 있을 지도 모른다. 다음에 찾아올 대규모 유행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거에 대한 더 나은 이해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알라딘 eBook <독감> (지나 콜라타 지음, 안정희 옮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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