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심리 현상은 내재적 의미가 스며 있는 총체로서 직접적 대상이 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변형되어 있는 것으로드러나는 것은 직접적인 것이라는 개념 자체이다. - P112
그렇다면 현상의 경험은 베르그송의 직관처럼, 아무런 방법적인 통로가 없는 무시된 실재의 증명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서 과학적 작용에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고,그 작용이 언제나 회송되는 의식의 선과학적 삶을 명시함이요, 해명함이다. 그것은 비이성적 전환이 아니고 지향적 분석이다. - P113
반성은 자기의 결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에 대해서도 자각하지않는다면 충일할 수 없고 대상의 전체적 해명일 수 없다. 우리는반성적 태도, 난공의 코기토에 자리 잡을 뿐만 아니라 그 반성을반성해야 하고 반성이 뒤이어 일어나게 되는 것임을 자각하는, 따라서 반성의 규정의 일부를 구성하는 자연적 상황도 이해해야 하며, 철학을 실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세계의 광경과 우리존재에서 야기하는 변형도 보고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철학적 인식은 절대적 인식이 될 수 있고 특수성이나 기술이기를 그만둘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존재에서 실현되어서는 안 되는그만큼 덜 의심스럽게 되는 절대적 통일이라는 것을 더 이상 확언할 수 없고, 철학의 중핵은 모든 곳에 위치하면서도 어느 곳에도위치하지 않는 자율적 • 선험적 주관이 더 이상 아니며, 반성을 영원히 시작하는 데서, 이를테면 개인의 삶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에 착수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견된다. - P118
그렇지만 우리는 모든 심리학주의가 정화되기만 하면그것이 철학적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고서 심리학적 기술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고유한 결과 속에 매몰된지각적 경험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이해될 수 없었던 기술들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들이 참이게 보일 수있는 관점을 철학적 참조와 예기에 의해서 정착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학 없이 시작할 수도 없고 심리학만 갖고 시작할수도 없다. 철학은 해명된 경험인 것처럼 경험은 철학을 얘기한다.그러나 이제 현상적 장은 충분히 한정되었으므로 그 애매한 영역으로 들어가서, 심리학자의 자기 비판이 우리를 2차적 반성에 의해서 현상의 현상에 이르게 하고 현상적 장을 결정적으로 선험적장으로 바꾸어놓을 때까지, 그곳에서 심리학자와 함께 하는 제1보를 확실하게 내디뎌보자. - P120
(로미오) 사랑이 연약하다고? 아니지, 너무 거칠고무례하고 아프게 까칠해서 가시처럼 찌른다네. - P76
미규정성에서 규정성으로 이행하는 것, 자기자신의 역사를 새로운 의미의 통일성에서 언제나 다시 파악하는것, 이것이 바로 사고인 것이다. - P77
나는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대상을 이중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 둘 중 하나만을지각한다면, 그것은 내가 두 상의 도움으로 단 하나의 대상의 관념을 멀리서 구성하기 때문이다." 지각은 감성이 신체적 자극에 따라제공한 신호에 대한 ‘해석‘이 되고" 정신이 자신의 인상을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위해 만든 ‘가설‘이 된다." - P80
지각을 분석하는 나와 지각하는 나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구체적인 반성 행위에서 그 거리를 극복한다. 바로이것으로서 나는 내가 무엇을 지각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고증명하고 두 자아의 불연속성을 실제로 지배한다. 궁극적으로 코기토는 그 의의가 보편적 구성자를 드러내야 하거나 지각을 지적 작용에 환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의 불투명성을 한번에 지배하고 유지하는 반성의 사실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성과 인간 조건을 이렇게 확인한 것은 실로 데카르트의 해결과 일치할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데카르트주의의 궁극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주장할 수 있다. - P93
정서적인 거리에 따라서 동일한 현상이 비극이나 희극으로 색깔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이미 알려진 이야기들을 새롭게 작품화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가 바로이 해석의 차원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 P5
작품에서 줄리엣은 아직 14살이 되지 않았지만 부모의 동의 없이 결혼이 가능한 나이이다. 카풀렛 부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이미 줄리엣의 나이에 결혼해서 딸을 낳았다. 줄리엣과 로미오의 사랑이 비극으로 나가는 근본 원인은 두 집안의 해묵은 갈등관계로 표현되는 과거, 전통의 힘과 자유로운 개인의 욕망, 의지 사이의 해소될 수 없는 대립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은 인습을 부정하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이를 여전히 포섭하고 봉쇄하고 있는 전통의 힘 사이에서 개인의 의지가패배하는 데 있다. - P7
사랑은 자신을 벗어나는 행위이다. 자신을 벗어난다는 것은 정신이육체에서 일탈한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반대로 정신이 완전히 육체 속으로 몰입해서 육체화 한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어떤 경우이든 격정적이고 광기에 찬 사랑은 일종의 탈존(ex-stasis)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자아망각의 결정체인 죽음과 쉽게 동일시되어 왔다. 몰아의 상태를 의미하는 죽음은 또한 같은 의미에서 사랑의 정점이나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과 죽음은 서로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 P9
안티고네와 하에몬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상징적인 성적 결합을 통하여 완성된다. 불어 표현에서 성행위의 정점을 "작은 죽음"이라 부르는것도 흥미롭다. - P11
셰익스피어는 안티고네』와 매우 비슷한 결말을 통해 사랑과 죽음의동질성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hony and Cleopatra)에서 보여준다.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의 죽음을 통해서 옥타비우스(Octavius)의 노예로서의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자신 안에 깃든 "불멸의 염원들"을 실현하기 위해 안토니를 따라 죽는다. 그녀는 죽음의 순간에 "남편이여, 내가 갑니다"(Husband, I come. 5.2.281)라고 외치는데, 이는 성적인 쾌감의 절정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죽음을 육체적인 사랑의 완성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전성기를 지난 성인들의 세계를 보여준다면,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C. 1591-96)은 사랑과 죽음의 문제를 젊은이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다루고있다. - P13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이 같은 사랑의 복잡한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가장 두드러진 언어기법은 모순어법(oxymoron)이다. 모순어법이란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을 함께 끌어 모아 얼핏 보면 어리석게 보이지만 다시 보면 예상 밖의 균형감각을 자아내는 기지에 찬 수사기법이다. - P15
모순어법은 이 작품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통일된 수사법이다. - P17
남성들끼리의 물리적인 폭력은 여성들을 향할 때는 "처녀들의 머리,즉 처녀성"(1.1.24)을 자르려는 성적인 폭력으로 화한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삶과 죽음, 사랑과 폭력과 같은 서로 이질적인 주제들이 한데 혼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주제를 표현하는 장치가 바로 모순어법이다. 따라서이곳의 모순어법은 단지 언어적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구조적으로 이끌어가는 극적 장치이다. - P17
라이언이 주장하듯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유토피아적인 사랑은 탐욕적이고 계산적인 위계질서에 입각한 지배적인 사고에 오염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하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줄리엣의 사랑은 그녀를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대안이지만, 그 대상이 원수 집안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여전히현실에 갇혀있다. 이것이 그녀의 사랑이 초월을 꿈꾸지만 처음부터 죽음과 맞물려 있는 이유이다. - P21
반복어법, 접속사 생략 등의 수사적 기법을 동원하고 있는 카풀렛의한탄은 자연의 주기, 시간의 힘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변화하는 이 작품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바뀐다는 것(turn)은 다시 말해서 수사비유(trope)에 대한 어원적인 의미이며, 의미의 뒤틀림(turn)이란 곧 비유(metaphor)의본질이다. 코러스가 얘기하듯이 이 작품에서 증오에서 사랑이 나왔고,따라서 사랑이 폭력과 죽음의 씨앗을 처음부터 잉태하고 있다면, 그 반대로 죽음은 다시 사랑을 잉태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변화를 가져온다. - P30
https://m.blog.naver.com/syeong21/223761810538나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계발이나 외적 성공을 지향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내가 말하는 지속 가능성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속에서 가능한 성장이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의 윤리’를 수용하면서도, 반복과 매너리즘에 머무르지 않는 살아있는 창조적 진화를 체험하고 싶다. 조직은 고통과 모순이 교차하는 공간이지만, 바로 조직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 있는 사유를 지속할 수 있을까?이 질문은 나에게 ‘봄의 철학’을 가능하게 한다. 봄은 언제나 처음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익숙해진 관계 속에서도 다시 타자를 보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책임을 묻는다. 나는 이러한 ‘봄’의 시선으로 조직이라는 공간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효율과 기능 뒤편에 가려진 얼굴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윤리적 책임과 창조적 가능성을 다시 찾아가는 것 말이다. 이는 내가 말하는 봄의 철학이다. 그러나 봄의 철학은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고, 시간과 관계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살아 있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