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녀분과 전화하다가 올해 마신 술이 몇 번이나 되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그러고보니 한달이 다되도록 술일기를 쓰지 못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100번은 넘지 않았을까 하고 술일기를 찾아보니, 내 술일기는 8월 24일 90번을 마신 데서 멈춰져 있다. 100번을 안넘었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게 다 ‘한병 초과’라는, 한층 더 강화된 알코올 기준 때문이지만.


바쁘다 바빠 신음소리를 내는 나, 사실 이번학기는 지난학기, 그 지난학기에 비할 바 없이 바쁘긴 하다. 술약속을 거의 안잡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술을 안마시느냐면 그런 건 아니다. 휴대폰 스케쥴에 적어둔 기록을 토대로 어제까지의 술일기를 써본다.


91번째: 8월 29일(화)

연고주의가 강한 우리나라, 같은 고교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천안 지역에 모임이 만들어진다. 이날 모임은 같은 학교에 있는 선배 하나가 높은 보직에 임명되서 이루어진 축하연.


실로 오랜만에 나가는 모임이었다. 그간 안나간 건 남자끼리의 모임에 점점 흥미가 없어져가는 탓도 있고, 내가 마흔살의 나이에도 거기서 막내라 재롱을 떨어야 한다는 게 한심해서다. 그날, 할 말도 없고 해서 이렇게 물었다.

“높은 보직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보직자의 명패가 학교에서 주는 게 아니라 주위 친구나 지인들이 만들어주는 거라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그러니까 내가 학장이 된다고 하면 내 친구들이 돈을 걷어서 그걸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 그분의 명패는, 우리 동문들이 걷은 돈으로 만들어진 것, 난 그렇게 민패 끼치는 게 싫어서 학장 안되련다.


92번째: 8월 31일(목)

내가 아는 미녀, 그리고 신부님과 간단하게 술을 마셨다. 그래도 술일기에 쓰는 걸 보면 소주 한병은 넘었다는 얘기다.


신부님의 학위논문은 신자유주의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젊은 분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극히 보수적이기만 한 목사 분들을 많이 보다보니 신자유주의 반대를 역설하는 그분의 주장이 무척 신선하게 들렸다. 그래, 종교계에서도 신자유주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93번째: 9월 15일(금)

진짜 바쁘긴 바빴는지, 보름 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이날 역시 학교에서 밤을 새려고 하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랑 오늘 술 좀 마셔주면 안되니?”

집에서 할 일을 챙겨 부지런히 기차를 타러 갔다. 내가 힘들 때 술친구가 되어 줬던 그였으니까.


94번째: 9월 16일(토)

친척이지만 그리 왕래가 없었던 사촌동생은 노사모라는 것만으로 나와 친해졌다. 그리고 우리 둘 다,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대선 때 누가 될 건지에 별 관심이 없고, 정치.사회 쪽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 우리가 지녔던, 살기 좋은 세상을 바라던 그 열정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노무현 씨가 한 일 중 가장 나쁜 것은 향후 오랫동안 개혁세력-이렇게 부르는 것도 좀 머쓱하지만-이 집권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일이다.

 

95번째: 9월 17일(화)

학교에서 상조회를 한다고 해서 갔다. 몸이 피곤했기에 저녁만 먹고 퇴근버스 타고 서울로 튀려고 했는데, 술과 안주를 보니 생각이 달라진다. 퍼져 앉아서 먹고, 2차까지 갔다. 역시 난...술에 약하다.

상조회 때마다 내가 간단한 퀴즈 프로를 진행하고 소정의 상품을 줬었다. 그게 인기가 있었던지 상조회 공고에는 "마교수가 진행하는 퀴즈 이벤트가 있습니다"라고 큼지막하게 씌여 있었는데, 이번엔 도저히 시간이 없어서 그걸 못했다. 그래서일까. 사람이 평소보다 반의 반도 안온 듯. 뒤늦게 몇명이 와서 자리는 겨우 메꿨지만, 사람들이 말이야 상품 안준다고 안오고 말이야... 나이도 있고, 처음 발령받은 99년부터 그 짓을 했는데 이제 다른 사람이 물려받을 때도 되지 않았을까? 보직에 위원회 10개를 관장하고, 일년에 여섯과목의 수업을 하고 있는데 상조회까지 책임지기엔 내가 너무 큰 듯하다.


96번째: 9월 20일(수)

부교수가 되었다고 지도교수한테 메일을 보냈더니 축하한다고 날을 잡으신다. 선생님이 한턱 쏘시겠다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내가 그냥 샀다. 돈 좀 썼다ㅠㅠ


요즘 학교서 잔다고 돈을 아끼는 것 같은데도 은근히 돈이 많이 나간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새벽에 먹는 것도 돈이 좀 나가고, 사우나 값, 음 그리고 또 뭐가 있지...? 아무튼 9월이 다 지나가는데 아직까지 100번을 안넘긴 내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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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퇴전문 2006-09-22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이 된 뒤에 자비로 명패를 만드는 (혹은 아예 안 만드는) 아웃사이더 같은 인사이더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번 편에선 종목과 병수와 안주에 대한 묘사가 조금 적어진 듯 하네요. 님의 술 일기는 일종의 프리미어 리그 관전 같았는데 말이죠.;

마태우스 2006-09-22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퇴전문님/그, 그게요...그럼 너무 길어질 것 같구...그리고 사실 누구랑 마셨냐만 적어놨지 술을 뭘 마셨는지는 일일이 기억이 안나서 말입니다. 그 재밌는 프리미어리그에 비유해 주시다니 정말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글구 학장은....좀... ㅠㅠ

다락방 2006-09-22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휴. 버텨내시는 체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체력을 회복하시면서 술을 드세요, 마태우스님.

마법천자문 2006-09-22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선 때 누가 될 건지에 별 관심이 없고, 정치. 사회 쪽에도 아무 관심이 없다’... 저도 얼마 전까지 비슷한 후유증을 겪었는데요. 요즘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이죠.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노무현 지지가 최선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지금과 같은 참담한 결과를 모른 채로 타임머신을 타고 2002년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무현과 그 일당의 삽질 때문에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무슨 국물 같은 거를 바라고 노무현을 지지한 게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판단한 길을 양심과 소신에 따라 선택한 사람이라면 말이죠.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운 일을 한 게 아니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비록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앞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세상일이니까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기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냥 될 수 있는 대로 밝게 생각하고 웃으면서 사는 게 제일 좋은 거 같습니다. 의사니까 저보다 잘 아시겠지만, 괜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다 우울증에라도 걸리면 마태우스님만 손해 아닙니까? ㅎㅎ

달콤한책 2006-09-22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번 안 넘긴 마태우스님이 나도 자랑스럽다. 음주 횟수를 이보다 절반으로 줄인다면 더 자랑스럽겠다." 절주하시와요^^

2006-09-22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도 많이 줄이시고

많이 바쁘시군요.

그래도 보고싶어요.^^


해리포터7 2006-09-2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일 내리 드셨네요..마태우스님 저희 남푠님과 대적할만한 실력을 보유하신 분이신거 같군요.ㅋㅋㅋ 그래도 휴식은 확실히 하시니 다행이십니다..

paviana 2006-09-2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번 술일기에는 미녀가 한번만 등장하는군요.술일기의 진정성이 의심스러워요.ㅎㅎ

Mephistopheles 2006-09-22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 되시면 알라딘에서 명패 하나 맞춰드려도 될꺼 같은데요..^^

또또유스또 2006-09-22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데요....
100번을 넘기면 뭐 하실건가요? ?? ^^
아무래도 추석 즈음하여 100번을 넘기실듯한데....
님.. 몸 아끼시며 드시어요~

실비 2006-09-22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보다 많이 술 줄이신 편이신가요? 그러면 잘했다고 상줘야되겠는걸요~~
오늘은 제가 술은 좀 마셨어요. 홍홍홍.

마태우스 2006-09-23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비님/상주세요! 어--서요^^
유스또님/100번을 넘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요 100번 이하로 마시는 게 제 목표였답니다. 120번 정도로 목표를 재설정해야겠어요. 몸 아껴야죠
메피님/하핫 학장은 체질상 안맞습니다 명패만 주세요!
파비님/저 요즘 남자랑 술 잘 안먹습니다^^ 그거만 알아 주시길!
해리포터님/제가 원래 연짱으로 마셨는데요... 요즘은 학교 일이 바빠서 말입니다. 부군이 아마 저보다 한수 위실걸요. 전 꾸준함만 돋보일 뿐 주량은 별루...
곰님/으흫흐흐흑. 제가 님한테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달콤한 책님/네엣? 50번 마시면서 일년을 보내라구요??? 그건 너무 적지 않을까요... 경제도 생각해야죠 내수진작!
소소너님/댓글 감사합니다.사실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때로 돌아간다해도 당연히 2번을 찍었을 거라고. 그거야 당연한 거겠죠... 그래서 전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답니다. 다만 정치에 무관심해진 거죠...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다 똑같다고 생각이 들고, 사회가 변할 거라는 생각을 안하게 되고, 우리나라에 대해 회의하게 되네요. 정치에 대한 열정을 그때 다 써버린 후유증이라고 생각해 주시어요.
다락방님/어맛 요즘처럼 가끔 마시면 아무렇지도 않답니다. 재작년에 진짜 대단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