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산

나는 정희진 선생의 강의를 듣는다. 그런 종류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 사이에선 묘한 자부심 같은 게 있다. 이런 걸 찾아서 듣는 우리는 남들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라는. 정희진 선생이 “왜 남자가 이렇게 없어요?”라고 했을 때 우리는 웃었다. 그 웃음에는, “무식한 남자가 이런 수준높은 강의를 들으러 오겠냐?”는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이건 물론 나만의 느낌이다).


비가 많이 오던 날, 나와 미녀는 빈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잠시 뒤 한 여인이 우리에게 오더니 미녀 옆에 있는 우산을 달라고 한다. 줬다. 우산을 받자마자 여인이 말한다.

“자리 맡으려고 우산 거기다 놔둔 건데...”

“죄송합니다. 전 또 뒷사람 우산인 줄 알고요.”

여인은 다른 자리로 갔고, 난 그걸로 상황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인은 궁시렁대기 시작한다.

“에이 씨, 남의 자리를 뺐고 그래...”

옆 사람에게 이런 말도 한다.

“우산 놔뒀는데 그냥 막 앉아 버리대.”

“에이, 뒤에 앉으니까 보이지도 않네.”

수업 시간 내내, 그녀의 불평은 계속되었다. 난 신경이 쓰여 귀한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너 여기 앉아라!”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던가.


강의에 나오는 여성학자들의 이름을 안다고 페미니즘을 아는 건 아닐 것이다.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할 지식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내가 아는 페미니즘의 정신은 타자에 대한 관용일진대, 자리 하나 가지고 저렇게 집착을 해서야 커서 뭣이 될까? 리뷰가 단 3편뿐임에도 내가 가을산님을 존경하는 까닭은, 그분은 책에서 읽은 지식을 현실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애쓰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의협에서 활동하고 FTA 반대에 앞장서시는 그분이야말로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중요한 건 책을 몇 권 읽었냐가 아니라 아는 걸 실천하는지 여부가 아닐까.


2. 호두과자

기차를 타보니 내 옆자리에 험상궃게 생긴 20대 청년이 앉아 있다. 몸도 커서 히프의 일부가 내 자리 쪽으로 넘어와 있다. 소리를 엄청 키우고 카세트를 듣는 등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든다. 그가 갑자기 판매원을 부르더니 호두과자를 산다. 꺼낸다. 큰소리로 중얼거린다.

“이게 6천원이야? 참나”

비닐에 든 호두과자는 내가 보기에도 적었다. 하지만 천안 호두과자는 원래 맛으로 승부하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하며 책을 보는데 그가 갑자기 내게 비닐을 내민다.

“드실래요?”

난 당황했다.

“괘, 괜찮습니다.”

다시금 그 팔이 내게로 온다.

“아니어요. 드세요.”

그가 손에 든 호두과자를 혼자 다 먹어도 양에 안찰 텐데, 나한테까지 권하다니. 속이 안좋아 고마움만 표시하고 결국 거절했지만, 요즘에도 이런 청년이 있는가 싶었다. 다시금 그를 본다. 그러고보니 조인성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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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8-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호두과자 먹고프네요 천안안간지 오래라 ^^

마노아 2006-08-0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이 압권이에요. 조인성 닮았다. ^^ㅎㅎㅎ

Mephistopheles 2006-08-0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우산을 자리에 놓고 내자리다...이왕이면 누구도 앉지 않을 임팩트가 강한
물건을 떨궈놓던가 ......예를 들면 속옷..아니 스타킹 아니면 빨간색 포장지의
`혁명과업완수'같은 책이요..전 개인적으로 저런 사람들 무시합니다..다 치워버리고
앉아버립니다.
2. 음.....접니다..

모1 2006-08-0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두과자에 바로 조인성으로 돌아서시다니...후후...

sooninara 2006-08-08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거절했다고 한대 맞으실까봐 걱정했어요^^

기인 2006-08-0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우산과 호두과자' 제목은 '헨젤과 그레텔' 같은 것이 아니라, '바보 이반과 악마' 같은 거(?) 네요 ㅎㅎ

해적오리 2006-08-08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저런 모습 안보일려고 노력해요..

호두과자는 우리집 냉동실에 있는데..넘 오래되서 냄새 날듯하네요..

건우와 연우 2006-08-0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여러 표정을 가지고 있군요...^^

비자림 2006-08-08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희진 선생님 강의 듣고 싶어요.
아 갈증..

또또유스또 2006-08-08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우산을 읽고...타산지석과 도둑이 제발 저린다 가 생각남
2 호두과자를 읽고... 님 뭐 잡숫고 싶은거 없나요? 제가 사드릴께요... ^^

마태우스 2006-08-09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스또님/아네요 님이 왜 발이 저립니까?? 으음, 전 뭐가 먹고 싶냐면요... 댓글로 남길께요 생각나면^^
비자림님/그 강의는 들을수록 갈증이 나요. 또 듣고 싶어서요
건우님/그러게요 저도 알고보면 안좋은 측면이 많이 있겠지요 제가 몰라서 그렇지.
해적님/호두과자는 바로 드셔야죠. 천안 것이 아닌가봐요 오래 놔둔 거 보면. 천안 호두과자는 사흘을 못넘기고 먹게 됩니다
기인님/날카로운 지적이세요^^
수니님/아니에요 표정이 순박해 때릴 것 같진 않더라구요^^
모1님/편견을 가지고 봐서 깍두기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메피님/님이셨군요! 근데요 우산을 의자 옆에라도 놔뒀으면 알아봤겠지만 의자 뒤에다 눕혀 놨는데 어케 알겠어요...나빠요 그사람.
마노아님/제가 좀 비굴하죠 하하.
하늘바람님/애 가지신 분한텐 잘해야죠. 언제 찾아뵐 때 호두과자 사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