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네갈전을 보지 않았기에 장안의 화제인 설기현의 역주행에 대해 알지 못했다. 개콘에서 강일구라는 개그맨이 “설기현은 역주행을 하지 말아라.”는 주문을 하고, 그것 때문에 결국 당사자가 사과를 하는 사태에 이르러서야 설기현 역주행 동영상을 볼 생각을 했다. 내 생각처럼 설기현은 우리 편 공격 진영에서부터 수비 라인까지의 긴 거리를 드리블해 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실점 위기를 맞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충분했다. “아, 그쪽으로 가면 안되죠.”라는 아나운서의 안타까운 목소리도 인상적이었다.
설기현은 도대체 왜 우리 골대 쪽으로 공을 몰고 간 것일까? 난 이유를 안다. 미드필드 진영에서 숫적으로 우리가 열세였기 때문에. 그게 주 원인이라면, 한가지 더 들 수 있는 것이 개인기의 부족이다. 사실 설기현의 역주행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렇지, 우리나라 축구를 보면 백패스를 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다른 나라가 전혀 안한다는 게 아니라, 빈도 수에서 우리가 월등하다는 얘기다. 축구 역시 다른 종목처럼 순간적으로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게 중요한 경기인데 상대보다 수적으로 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개인기를 이용해 상대를 제끼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선수들은 상대 수비를 제칠 능력을 갖질 못했다. 우리가 중앙돌파 대신 측면공격에 이은 센터링으로 슈팅 찬스를 노리는 이유도 사실은 수비가 몰린 문전에서의 드리블이 자신 없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다비즈나 프랑스의 지단처럼 서너명을 우습게 제낌으로써 수적 우위를 확보해 줄 미드필더가 아쉽게도 우리에겐 없다. 설기현의 역주행은 그걸 단지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 그를 탓할 일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교 때, 그 시절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축구를 열심히 했었다. 그때 우리반에 임승범이란 친구가 있었다. 그는 진정 축구의 신이었다. 열 대여섯명이 한팀을 이뤄 축구를 하던 그때, 그는 마음만 먹으면 열명 정도를 제끼는 건 아주 우습게 해냈다. 순발력이 좋아 1대 1에서 절대 뚫리지 않는다는 철벽 수비수인 나도 그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왼쪽으로 날 돌파하리라고 예상하면 그는 어느 새 내 오른쪽을 파고든 뒤였다. 공이 그의 발에 붙기라도 한 듯 그는 공과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그는 언제나 팀 득점의 70% 이상을 해냈으며, 대여섯 골을 넣는 건 식은죽 먹기였다. 그때 내가 그리던 만화에는 마리오 캠패스, 요한 크루이프 등과 함께 차범근과 임승범이-열두살밖에 안됐음에도-들어 있었다. 중3 때, 서너명은 우습게 제치고 골을 넣는 친구를 만나긴 했지만, 열댓명을 제끼던 임승범에게는 많이 못 미쳤다.
난 그가 나중에 한국 축구를 빛낼 희대의 스트라이커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축구와 관련해서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 86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너가 잉글랜드 수비수 다섯명을 제치고 팀의 두 번째 골을 성공시켰을 때, 94년 베베토의 드리블에 이은 멋진 슈팅을 봤을 때, 기타 개인기에 이은 멋진 골이 나올 때마다 난 임승범을 생각했었다. 그는 도대체 축구 말고 다른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선수 생활을 생략하고 지도자의 길에 들어서 있는 건가? 우리 축구가 여전히 윙 플레이만 고집하고, 백패스가 난무하며, 그것도 모자라 역주행을 했다고 장안이 떠들썩한 요즘, 난 다시금 임승범을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임승범같은 유망주를 사장시켰고, 그 결과 16강이 목표인 나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