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 격하게 솔직한 사노 요코의 근심 소멸 에세이
사노 요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생충열전>을 낸 인연으로 을유문화사의 책을 종종 증정받는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을유가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라는 점이다.
이번에 거기서 신간을 내면서 그 비결을 알 수 있었다.
내 책의 편집자는 편집을 하는 와중에 내게 수백통이 넘는 문자와 메일을 보냈다.
낮 동안엔 문자로 질문에 답을 하고,
집에 가서 컴퓨터를 켠 뒤 메일함에 들어가면 열통이 넘는 메일문의가 와 있었다.
그 편집자는 한 문장, 아니 한 단어조차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앞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런 표현 말고 좀 다른 표현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이쯤되면 귀찮을 만도 하지만, 그의 지적이 모두 타당한 것들이고,
내 책을 잘 만들기 위해 편집자가 고생을 하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밤 늦게는 물론이고 주말까지도 그 편집자의 메일은 계속됐다.
이런 편집자와 같이 일하는 건 행운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비단 내 책에만 이런 꼼꼼함이 발휘되지는 않았을 터,
그 결과가 바로 “을유에서 나온 책들은 다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가 보장돼요”라는 독자의 평이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집이다.
에세이집은 아주 유명한 저자가 아니면 팔리기 어렵다.
동화작가인 사노 요코는 매니아들 사이에서야 유명할지 몰라도,
난 그 이름조차 처음 들어봤다.
왜 이름이 낯이 익을까 생각해본 결과 존 레논의 아내였던 오노 요코랑 발음이 비슷한 탓이었다.
하지만 저자를 모르는 건 크게 상관이 없었고,
난 곧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해주는 이야기에 빨려들어갔다.
유머도 곳곳에서 발휘되지만, 특히 좋았던 건 매사 조급해 하지 않는 여유였다.
예컨대 저자의 집 근처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찰은 저자에게 전날 밤 행적을 물었다.
그런데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게 아닌가?
여기에 대한 저자의 결심, “알라비아를 기억해 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범인으로 날조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일기를 쓰기로 했다.” (221쪽)
다 읽고 나니 책을 보내준 을유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있는 책이긴 해도,
을유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사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책을 읽다가 마음이 아파지는 대목이 있었다.
211쪽을 보면 “내가 나이 아흔다섯에 뇌연화로 편안하게 잠들 듯이 간다면....이리저리 상상해 본다.”는 구절이 있다.
실제로 저자는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데,
저자 바람대로 95세까지 이런 유의 에세이집을 더 낸 뒤 뇌연화로 가셨다면 좋을 뻔했다.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