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11월 10일(목)
마신 양: 겁나게 많이, 아침에 헛구역질과 설사 여러번.
누구와: 미녀와
지금은 의대를 떠난 직원 분한테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었더니, 교수들이 무관심하신 게 힘든 일이라고 한다. 뭣 좀 해달라고 메일을 돌리면 읽고 나서 무시하는 교수가 태반이고, 심지어 메일 확인도 안하는 교수가 그렇게 많단다. 그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자주 쓰는 메일을 확인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상황은 별반 나아지는 게 없다. 환자 보는 데 바쁜 임상 선생은 물론이고, 연구에 여념이 없는 기초 선생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지만 모두가 파편화되어 자기 세계 말고는 소통하지 않으려는 곳, 그게 바로 의대다.
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3년 전 홀연히 기초 총무를 자처하고 정기적인 모임을 추진하고 있는데, 별 효과는 없다. 열심히 메일을 돌리고 전화를 해봤자 22명의 기초 교수 중 모이는 사람은 불과 7-8명, 어쩌다 10명이 왔을 때는 “대박이다!”라고 좋아했다. 나 역시 나름대로 바쁜 사람이라 그런 썰렁한 반응을 접하고 나면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나 회의가 드는데, 다행히 앞으로는 안그래도 될 것 같다.
10월 31일, 난 11월 10일에 기초모임을 한다고 메일을 돌렸다.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때 기초 선생님들끼리 만나서
세월의 덧없음에 대해 얘기해 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약을 해야 하니 참석여부를 말해달라고 했지만, 그 메일에 대한 회신은 딱 세건이 왔다. 지난주 말, 난 다시금 메일을 보냈다.
[...워낙 많은 분들이 참석하겠다고 답신을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추가로 오시는 분이 없으면 다섯자리 예약하겠습니다...]
‘다섯자리’란 말에 충격을 받은 한명이 “참석하겠다.”고 회신했을 뿐, 답변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난 정각에 나가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나 말고 나온 사람은 딱 한명, 그는 실험 때문에 바쁘다고 투덜거렸다. 오겠다고 했던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지금 어디세요?”
“어, 저 일이 아직 안끝나서요...”
그때 결정했다. 취소하기로. 모임을 취소하고 집에 가는데, 전화가 한통 왔다.
“선생님, 시간을 잘못 알아서 지금 나와보니 아무도 없네요...”
우리가 파편화된 삶을 살고 있는 건 구조적인 문제 탓이다. 그런 구조적 문제를 나 개인이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터무니없는 오만이었다. 만날 사람도 많은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잡아다가 만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난 그길로 두 번째(한 남자한테)로 실연을 당한 미녀에게 달려가 술을 마셨다. 두 번째라 그런지 그녀는 의연했고, 어제 술자리는 유쾌했다. 실연당한 사람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은 술을 마신 탓에 오늘 하루 종일 몸이 좀 안좋았지만, 기초 모임에 간 것보다 훨씬 보람있었다.
오늘 아침,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메일을 보냈다.
[어제 가질 예정이었던 기초모임이 중국집 측의 사정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저와 함께 교학과 앞에서 5분간 기다려주신 xxx 선생님께
심심한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 메일에 회신을 해준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었다. 아듀, 기초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