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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 법의학과 과학수사
브라이언 이니스 지음, 이경식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 가격을 보고 놀랐다. 무려 29,000원. 내가 산 책 중 <곰브리치> 다음으로 비싼 책이다. 열권인가를 한꺼번에 지를 때 같이 산 탓에 이 책이 그리 비싼지 몰랐었나보다. 가격 대비 만족도는 어떨까. 3만5천원인 <곰브리치>가 미술에 뜻을 품은 사람에겐 투자할 가치가 있는 책이듯, 법의학에 관심이 있다면 충분히 사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풍부한 실제 사례를 통해 법의학적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게 특히 좋은데, 아쉬운 점은 사건의 개요를 너무 간단하게 설명해 ‘책으로 읽는 CSI 과학수사대’라는 카피와 달리 박진감 같은 게 없었다는 거다. 하지만 100건이나 되는 사건을 다 소개하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책을 읽고 느낀 점을 몇 개만 나열해본다.
-많은 범죄가 돈 때문에 일어난다. 조지 스미스라는 사람은 외로운 노처녀를 유혹해 결혼한 뒤 살해함으로써 그녀가 가진 돈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세명을 죽였고, 아내를 보험에 들게 한 뒤 살해한 남편도 여럿 있었다. 또다른 사람은 길가는 사람을 죽인 후 자기 옷을 입혀놓고 자동차 폭발로 위장했고, 아내는 “남편이 맞아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보험금을 타려던 이 계획은 법의학의 발달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
-1970년대에 활약한 게이시라는 범죄자는 32명이나 되는 소년을 죽였는데, 그의 집에서 27구나 되는 시신이 나왔다. 웨인 윌리암스라는 자는 20명이 넘는 흑인을 목졸라 죽인 뒤 강물에 던졌다. 이들이 무서운 것은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죽이는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듯해서인데, 몇 년 전 세상을 놀라게 한 유영철 생각을 해보면 이게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범죄 수사의 기법은 나날이 발전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범죄자들을 검거하는데, DNA 지문법 때문에 머리카락 한올만 흘려도 범인이 잡힐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범죄자들의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현대 사회의 특징인 익명성도 한 원인이 되지 않을까.
-내가 아는 진보적 인사 한분은 지문 날인을 거부해 아직 주민등록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지문날인은 사실 인권침해적인 요소가 있고, 그분의 행동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 사건을 보자. 새벽에 가정집에 침입해 권총으로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한 ‘밤의 스토커’가 있었다. 그가 잡힌 것은 당시 주 정부에서 모든 거주자의 지문을 컴퓨터에 등록해 놓았기 때문, 이런 것 때문에 모두에게 지문날인을 강제하는 게 설득력을 얻는다. CCTV 설치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표를 던진 것에서 보듯, 보통 사람들은 인권보다는 안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 또한 그렇고, 그래서 주민증을 만들 때 군말없이 손가락 열 개를 내밀었다.
갑자기 생각이 난다. 이 책이 강남교보의 의학부문 판매량 순위에서 내 책보다 조금 위에 있었던 게. 아까의 논지를 바꾸어 법의학을 전공할 사람이면 이 책을 사도 되겠지만, 관심만 있는 정도라면 빌려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참고로 moonnight님과 이매지님한테 이 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