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7월 30일(토)

장소: 써클에서

마신 양: 맥주만 잔뜩


우리 써클은 겨울과 여름에 강원도 평창으로 진료를 간다. 의사 수의 증대로 무료진료라는 게 뭐 얼마나 의미가 있냐 싶지만, 이십년 이상 진료를 간 탓에 주민들의 신뢰도도 높고, 더 중요한 이유로 우리 써클의 정체성을 진료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의도에서 계속 가고 있다. 사실 환자들 대부분이 약을 타기 위해 오는 것이니만큼, 우리가 그들로부터 도움받는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곳 주민들에게 우리는 도움이 되는 존재일 것이다. 학생들이 선배들로부터 후원회비를 받는 것도 다 그 때문이고.


학생들은 목요일 오전에 진료지로 향하며,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없는 선배들은 주로 주말에 강원도로 간다. 올해 역시 그랬다. 십여명의 선배들이 도착을 했을 때 후배들은 우리를 열렬히 맞아 줬고, 소개에 이어 거창한 술판이 벌어졌다. 학생들이 만든 갖가지 음식을 안주삼아서. 그 술자리는, 늘 그렇듯이 새벽 다섯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마지막까지 있어본 적은 여러 번이지만, 이번에는 2시도 안되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술도 안취했는데 그래 보기는 오랜만이다. 평소 학생들과 어울리는 건 자신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좀 이상했다. 그냥 외로웠고, 그들과 어울리는 게 어색했다. 1년 선배의 배신으로 난 지도교수를 제외하곤 가장 나이많은 선배였다. 그게 날 그렇게 만들었나보다. 후배가 어렵다면, 나보다 한 살 아래 세명을 비롯해 선배들끼리 어울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도 싫었다. 이유가 뭘까. 나름대로 생각해 본 이유다.


1) 가장 나이가 많다는 게 나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느끼게 했다. 여학생 둘을 앉혀놓고 20분간 떠든 결과 내 유머는 아직도 통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하는 일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날 허망하게 만들었다.

2) 읽던 책이 재미있어서 다음이 궁금했다. 실제로 숙소에 간 나는 휴대폰으로 불을 밝혀가며 그리샴의 <브로커>를 읽었다. 세시 반 정도까지 그랬던 것 같다.

3) 술이 떨어졌다. 술은 맥주와 감로주였는데, 어느 순간 마실 술이 없었다. 그때는 마침 애들이 술을 사러간 시점이었고, 조금만 기다렸으면 술이 왔을 테지만 난 그냥 숙소로 갔다. 내가 느낀 공허감은 소주로나 채울 수 있는 것이었는데 슈퍼는 다 문을 닫았고, 강원도 평창군 계촌리엔 24시간 편의점이 없었다.


결과론이지만 강원도에 갔을 때 내 몸 상태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연일 계속되는 술로 인해 몸에 무리가 올 시점, 그러니 더 마시지 않고 적당히 마시다 들어간 것은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오늘부터 새로운 술자리가 날 기다린다. Go, 마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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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05-08-01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유머는 아직도 통했다 에서 웃음 ^^; 마태우스님 잘 하셨어요. 외롭고 어색하셨다니 안타깝지만 조금이라도 덜 마셨단 건 참 잘 하신 듯. 오오. 오늘도 약속이 있으시군요. 화이팅입니다. ^^

chika 2005-08-01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으로 불 밝히며 책을 읽었다"라는 말만 눈에 들어오는데요? 위대하신 마태우스님!!

panda78 2005-08-0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 나빠져요, 마태님. ^^
술 적게 드신 건 정말 잘하신 겁니다. 박수쳐 드릴게요. 짝짝짝!
근데 올해는 100번째가 너무 빨리 올 거 같군요. 어째 작년보다 페이스가 너무 빨라진 거 아님까? - _ -

포도나라 2005-08-0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겨우 그 연세....ㅡㅡㅋ...(내가 이런 말을 써도 상관이 없는 건가?!...)에 인생무상이라뇨... 저와 가까운 어느 분은 60을 향해가는 나이에도 열정이 넘치시는데... 술이 문제이셨나 보군요~ 술이... 소주의 부재가 문제이셨나 봐여~~...

산사춘 2005-08-0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홉번밖에 남지 않으셨다면, 이제 상향조정된 기준과 이에 대한 변이 나올 때군요.
그 내용이 기대되긴 하지만, 요새 그 분도 안오시고 몸이 계속 안좋으신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인터라겐 2005-08-02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으로 불 밝혀가며.... 흑.. 아마도 마태님 전생은 조선시대 선비였을것 같아요..

마태우스 2005-08-0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무슨 말씀을.... 저 선비 아닙니다^^
산사춘님/그런 변 안하고 넘어갈래요. 저도 낯이 있죠... 글구 언제 한번 술대결 해야죠?
여행자의노래님/그게요, 평소엔 젊다고 생각했는데 20년 가까이 젊은 애들과 있으니까, 글구 그들이 절 어려워하니까 인생이 허망하게 느껴져요.
판다님/아, 그렇지 않습니다. 작년과 비교하면 확실히 페이스가 느려졌습니다. 이제 다섯달밖에 안남았으니까...가만 보자. 150일 중 이틀에 한번 먹어도 작년보다 못먹는 겁니다. 글구 후반기엔 제가 술 줄일 겁니다
치카님/저 그런 짓 잘해요. 헤헤
문나이트님/약속 안가고 말았습니다. 히유...잘했죠?
따우님/그럼요! 저야 언제라도!

클리오 2005-08-0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 상태가 안좋으신데 또 술자리가 있으시다구요.. 걱정시럽네요... 글구요, 나이든 선배가 와서 웃기면 저라도 되개 웃긴 척 하는데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왜 이렇게 도움이 안되는 말만 하지? 도망가야지... =3=3=3)

플라시보 2005-08-02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신이십니다. 첨 술일기를 쓰실때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거침이 없으시군요. 님의 앞날에 참소주와 함께 고개숙여 경배를 표하나이다.^^

마태우스 2005-08-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저 유머인생 30년입니다... 진짜로 웃는 것과 웃어주는 건 구별할 수 있죠. 그 두명, 진짜 자지러지게 웃었습니다. 그건 연기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메롱,.
플라시보님/저도 스스로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1년 반이 넘도록 술일기를 연재하고 있는 거랍니다. 알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