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환상문학전집 13
루돌프 에리히 라스페 지음, 귀스타브 도레 그림, 이매진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선물받은 책을 비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 아닌 책을 “대단한 책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리뷰의 신뢰도를 더 중요하게 아는 나는 일단 비판을 한 뒤 그분에게 가서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기곤 한다.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선물해주신 분은 내가 평소 존경하는, 소위 말해서 내공 있는 분이다. 그분이 주신 책이라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읽기 시작했는데, 읽을수록 영 아닌 거다. ‘이 남작의 모험은 모두 사실이다’라며 걸리버, 신밧드, 알라딘이 서명을 한 대목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으며, 유치의 극치였고-도끼를 던졌는데 달에 가서 박혔다는 둥-잔인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저자는 단지 가죽을 얻기 위해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던 곰 천마리를 죽인다.

“칼을 놈(곰)의 한쪽 뒷발에다 휘둘렀더니 발가락 세 개가 떨어져 나갑디다...주머니칼을 꺼내 제일 덩치 큰 곰의 어깨를 쑤셔 버렸습니다...나는 같은 방법으로 놈들을 하나하나 몰살키셔...”

여기에 무슨 교훈이나 유쾌함, 하다못해 전복성이 있는가?


인종에 대한 편견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흑인들이 노예로 쓰기 위해 백인들을 끌어간다는 얘기를 하는 대목.

[검은 인간, 즉 흑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선단과 마주쳤습니다. 이 비열한 인간들은...유럽인들이 타고 가던 배를 포획...노예로 부리려고....콘월 지방까지 선단을 보낸 것입니다...농장에서는 채찍질로 사람들을 길들여 가며 남은 평생 동안 죽도록 일을 시켰고 말입니다]

중세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흑인=노예’의 등식과는 매우 달라 당황스럽다. “흑인들이 마음에 지닌 야만적인 편견, 즉 백인들은 영혼이 없다는 편견”이란 대목도 도처에 만연한 인종주의를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튼 남작은 흑인들의 노예선을 공격, 가라앉혀 버린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백인들을 구해 냈지만, 흑인들은 모두 물속으로 다시 밀어 버렸습니다]

먼 미래에 자신의 조국-남작과 저자 모두 독일인이다-이 유태인을 학살하고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하게 되는 걸 안다면,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할까?


흑인에 대한 적대감 이외에, 아프리카에 대한 노골적 폄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아프리카 왕은 우리를 고등한 인간으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견해라면...존중했습니다..우리는 영국의 정치 체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그들의 정부를 조직하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이렇게 잘해주려 하지만, 남작은 이내 아프리카인들에게 실망한다.

[관대함은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지요. 어떤 영혼들에게는 정중함이라는 것이 아무 효과도 없고 강제력만이 존경과 숭배를 불러일으킬 뿐...]

건질 게 하나도 없는 이 따우 책이 300년 동안이나 독자에게 읽히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읽는 중간에 선물을 해준 그분께 물어봤다. “저...이 책 별로 재미 없던데요”

그분의 대답, “재미 없어요. 저도 읽다가 관둔 책이어요!”

미리 물어보기 다행이다 싶었다.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이런 리뷰를 쓰지 못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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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2005-06-0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도 따우님처럼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은 아련한 기억이 남아있어요. 마치 돈키호테의 또 다른 버젼처럼 느껴졌던 흥겨운 이야기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네요. 아까비...도서관에서 이 책을 지나치면서 담번에 읽을 거 없음 봐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예요.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일요일, 마태님과 제가 한꺼번에 악평을 썼네요. 너무너무 반가워요 히히. 그리고 책 주신 분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서 기쁘군요 :)

마태우스 2005-06-05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호호 맞습니다
따우님/죄송하다뇨. 이 책, 달거리 모임 때 받은 책이죠 아마? 그때 따우님이 책을 주셨을 때, 뭐라도 주고자 하는 마음이 고마웠어요. 알라딘 분들은 만날 때마다 책을 선물하는 게 거의 관행이 되어 있더이다. 이 책을 어릴 적에 읽으셨단 말이죠. 으음... 저도 그때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릴 때의 전, 지금도 그렇지만 굉장히 유치했었거든요^^ 글구 님 내공 있는 분 맞아요. 제게 언제나 가르침을 주시는데요
사과님/아름다운 일요일, 전 12시 반부터 6시 반까지 잠을 잤습니다. 또 졸려요... 그나저나 사과님은 저만 좋아하는 것 같아요!

ceylontea 2005-06-0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히나 2005-06-06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도 웃기지, 마태우스님 악평 땜에 지금 궁금해질려는 참이어요 ㅎㅎ

클리오 2005-06-06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렸을 때 참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보니 저런 책이었군요.. 이런....

stella.K 2005-06-0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름대로 유명한 책인 줄 알았더니 읽지 말아야겠군요. 그래도 제가 선물해 드린 책이 좀 낫죠? 별 세개를 주셨으니...마태님께 어떤 책을 선물해 드려야 잘 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흐흐.

마태우스 2005-06-0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그 책 리뷰 때문에 제가 얼마나 죄송했다구요... 님은 마음이 너무 여리세요. 험한 세상을 어찌 사시려는지....^^
클리오님/어릴 때 저런 책을 읽으시다니, 역시 님의 내공이 하루아침에 된 건 아니란 말입니다.